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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신자유주의는 억압당하는 노동자를 자유로운 경영자로, 자기 자신을 부리는 경영자로 만든다. 

지금은 누구나 경영자인 자신에세 고용되어 자신을 착취하는 노동자다.

누구나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계급투쟁도 자신과의 내적 투쟁으로 바뀐다. 

오늘날 실패하는 사람은 자책하고 부끄러워한다. 사람들은 사회를 문제시하는 대신에 자신을 문제시한다.

----> 이 분만의 독특한 첫 생각은 아니다. 이미 이런 생각을 하고, 메시지를 던진 분들이 있다.

 

예속된 주체는 자신이 예속된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그는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이 지배 기술은 저항을 아주 효율적인 방식으로 무력화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저항이 거의 없다. 오히려 우울과 소진을 동반한 순응주의와 합의가 대세다.

 

지금은 모든 각자가 각자를 상대로 경쟁한다. 기업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절대적 경쟁은 생산성을 엄청나게 높이지만 연대와 공동체 정신을 파괴한다. 

소진하고 우울하고 개별화된 개인들은 혁명 군중을 이루지 못한다.

 

공유 경제는 결국 삶의 총체적 상업화로 이어질 것이다.

 

 

(자본주의와 죽음 충동)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성장은 실은 암 덩어리들의 목표 없는 번성이다.

 

프로이트는 높은 질서들을 깨달을 줄 아는 이성을 간간히 언급하지만, 결국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충동들이다. 

 

자본은 성장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더 많은 자본은 더 적은 죽음을 뜻한다. 

죽음으로 부터 달아나기 위해 자본이 축적된다. 

 

무한한 자본은 몸과 죽음을 상징하는 그림자를 사라지게 한다.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움이 자본주의를 추진한다. 자본주의의 축적 및 성장 강박은 임박한 죽음 앞에서 깨어 난다. 

 

죽음에 맞선 싸움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유발한다. 그러는 사이에 현재는 - 다름 아니라 삶은 - 없어진다. 

 

우리는 죽기에는 너무 생기가 넘치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다. 

 

 

(인간에 대한 총체적 착취)

 

디지털화는 이제껏 상업적 활용이 불가능했던 생활 영역을 경제적 착취에 예속시킨다.

 

빅 데이터는 지배를 위한 지식을 산출한다. 그 지식은 당사자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심리에 개입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주권자란 망 내부의 데이터에 대한 처분권을 가진 자다.

 

신뢰란 타인을 모름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긍정적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신뢰 덕분에 우리는 앎이 부족해도 행위할 수 있다. 

내가 타인에 관한 모든 것을 사전에 알면, 신뢰는 불필요하다....

 

신뢰는 신뢰로 보답받지 못할 가능성을, 배신당할 가능성을 함축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 강제도, 어떤 명령도 없는데 자발적으로 발가벗는다.

 

오늘날 우리는 단순히 국가 감시의 희생자가 아니라 시스템 안의 적극적 실행자다. 

 

 

(디지털 파놉티콘에서)

 

삶의 총체적 기록은 신뢰를 정보와 통제로 완벽하게 대체한다.

 

 

(오직 죽은 것만 투명하다)

 

투명사회는 긍정 사회다. 

사물이 모든 부정성을 떨쳐 버릴 때, 매끄러워지고 평평해질 때, 자본과 소통과 정보의 원활한 흐름에 저항 없이 편입될 때, 사물은 투명해진다. 행위가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과정에 예속될 때, 행위가 고유한 특이성을 내려놓고 오로지 가격으로 자신을 표현할 때, 행위는 투명해진다.

 

특유의 긍정성을 띤 투명사회는 같음의 지옥이다.

 

신뢰는 앎과 모름 사이의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투명한 요구는 다름 아니라 신뢰가 사라진 곳에서 드높다.

투명사회는 신뢰가 사라져가기 때문에 통제의 의지하는 불신 사회다.

 

피터 한트케..."나는 타인들이 나에 관하여 알지 못하는 바에 의지하여 살아나간다."

 

무릇 삶의 본질인 내면성, 자발성, 사건성은 투명성과 대립한다.

 

투명성 비판이 겨냥하는 표적은 투명성의 이데올로기화, 우상화, 총체화다. 

 

 

(군중 속에서)

 

디지털 관행은 조급함, 기다릴 수 없음, 지루함을 견딜수 없음을 포함한다.

 

사회 시스템이나 경제 시스템이 실제로 절대적이고 확고한 안정성과 자명성에 도달하여 어떤 대안도 허용하지 않으면, 실은 결정할 것이 없어진다. 어떤 정치적 행위나 정치적 결정도 불필요해진다. 그러면 정치인들이 밀려나고, 시스템을 관리하는 전문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 그 시스템을 관리하는 전문가들이 과연 누가될까? 

----> 자본주의 조직에 돈을 벌고 지키고, 축적하는 책임의 정점에 있는 CEO들이 마치 우리 사회나 인류가 나아가야 할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과 기대를 버리고, 감시해야 한다.  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는 훌륭하다. 하지만 이들은 의견도 one of them일 뿐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역할과 성과보다 너무 큰 기대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디지털 관행은 구속되지 않음, 임의성, 단기성을 포함한다. 디지털 관행은 책임감을 대폭 약화한다. 

 

 

(데이터주의와 허무주의)

 

데이터가 아무리 방대하더라도, 데이터만으로는 인식을 산출할 수 없다.

 

데이터주의는 필시 허무주의와 짝을 이룬다. 데이터주의는 의미와 맥락을 포기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괴로운 공허)

 

진정한 신자유주의적 생산 전략...

나는 나 자신의 경영자로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생산해야 한다는 강제에 예속된다. 

자신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면도날을 움켜쥔다.

 

안정된 자아는 타인 앞에서 비로소 발생한다.

반면에 과도한 자기 관련, 나르시시스적 자기 관련은 공허감을 낳는다. 나는 자아에 빠져 익사한다.

 

현재 사회의 주요 특징은 모든 부정성의 제거다. 모든 것이 매끄럽게 연마된다. 

매끄러운 것에는 맞섬의 부정성이 없다. 

 

 

(정면 돌파)

 

대화할 능력, 타자를 마주할 능력, 경청하고 대답할 능력은 오늘날 모든 분야에서 사라져간다. 

 

 

(뛰어오르는 사람들)

 

디지털 사진은 기억 매체가 아니다. 오히려 쇼윈도 같은 전시 매체다.

 

 

(아름다움은 낯섦 안에 있다)

 

모든 것을 같게 만드는 지구화, 세계의 총체적 현금화와 다를 바 없는 지구화는 사람에게서 의미와 방향 감각을 앗아간다.

 

낯선 것은 고유한 것을 위해 필수적이다. 낯선 것이 없으면 우리는 고유한 것을 보지 못한다. 

 

 

(다들 서두른다)

 

 

(에로스가 우울을 이긴다)

 

타자란 항의입니다. 나에게 항의하는 상대가 타자라는 거죠.

우리는 타자의 다름을 보는 능력, 곧 예의를 상실했지요.

 

행위가 예측하다면, 그것은 행위가 아니라 계산일 거예요.

행위는  항상 예측 불가능한 영역으로, 미래로 뻗어나갑니다. 

바꿔 말해, 투명사회는 미래가 없는 사회예요. 미래란 완전한 타자의 시간적 차원이니까요. 

오늘날 미래는 다름 아니라 최적화된 현재예요.

 

저에게 철학은 전혀 다른 삶꼴을 구상하고 다른 삶의 기획들을 적어도 생각으로 검증해보는 시도입니다. 

 

 

("유감스럽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실현한다는 환상 속에서 나 자신을 착취하는 거죠

 

 

[ 자평 ]  진짜 철학자의 책은 읽어 볼 가치가 있다. 철학자를 설명하는 강사와 어떻게,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있다.

 

4차 산업 혁명,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등이 우리 사회와 인류를 행복과 건강으로 이끈다는 신념으로 똘똘뭉친 바보들이 이런 책들을 좀 읽었으면 좋겠다.

 

편협하고 무식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소수에게 피해를 주지만 이런 의견을 행동으로 관철시킨다면 만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특이 이런 사람이 정치인이나 경영자일 경우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저자의 아래 말을 좀 바꿔서 쓰고 싶다.

"투명성 비판이 겨냥하는 표적 (DX, AI, AIX, AX 등 등 뭐라 말하든 당신의 말하는 그것은)은

투명성의 이데올로기화, 우상화, 총체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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