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 밑줄/연결 ]

 

'정신의 자동화'와 너무 쉽게 결합되는 우리의 돈벌이 활동의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면모...

 

오직 나의 개인화에 이바지하는 활동, 나의 독특성은 물론이고 내 곁의 타인들, 내 재능의 혜택을 입는 동료들 및 일반 시민들 - 고객이 아니라 - 과 같은 타인들의 독특성을 수립하는데 이바지하는 활동만을 '일'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고용의 죽음이란 희소식일 것이다. 고용은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고 구체화하려 노력하는 이 철학자가 의미하는 바의 일을 파괴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 WoW.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은 '일'과 '노동'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 철학자에게 배울 것은 새로운 개념 정의, 탁월한 개념 정의라고 하더니....

 

기여경제는 폭넓게 말하면 나눔의 사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연령층과 모든 국민들의 앎의 나눔 위에 기초하는 사회경제에 가까운 것이다.

 

'창조적 파괴', 스스로 갱신하여 생산성 향상을 증대시키고, 낡은 것을 없애 새로운 활동 및 생산, 노동을 조직하는 다른 방식에 자리를 만들어 주며, 소비주의에 기여하는 혁신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창조해나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능력을 말한다. 

----> 철학자 다운 멋진 정의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파르마콘(pharmakon), 즉 약이자 독이기 때문이다.....우리의 앎, 할 줄-앎과 살줄-앎을 조직적으로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보조수단이 될 것이다.

 

포드주의와 뉴딜 정책에서 생겨난 소비자본주의를 오늘날, 특히 2008년 이후 우리가 고통스럽게 겪고 있는 무관심의 경제로 변질시켜버린 겁니다.,,,, 무관심의 경제란 돌봄이라는 것, 다시 말해 시민, 노동자, 청년 세대, 노인 세대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에 대해 흔히 말하듯 국가와 문화와 사회 조직과 제도에 있어야 할 사람들 모두에 관심을 체계적으로 파괴시키는 데 놓여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더 이상 미래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투자하지 않습니다. 

 

모든 형태의 앎의 파괴가 확산되는 것을 궁핍화라고 부릅니다. 궁핍화에 의해 파괴되는 앎의 형태는 세 가지입니다. 직공, 기술자, 일반 노동자들의 '할 줄-앎', 그리고 소비자들, 좀 더 넓게는 시민들의 '살 줄-앎', 마지막으로 '개념적 앎'이 그것입니다.

 

일이란 어떤 앎의 표현입니다. 앎이라는 것은 19세기 초 '할 줄-앎'이 기계로 전이됨에 따라 직공들의 손을 떠났고, 그럼으로서 빈민으로 전락한 직공들이 몇 푼 되지 않는 봉급이나마 받기 위해 그러한 박탈에 굴복한 겁니다.

 

루스벨트가 장려하여 시행되었던 미국식 모델,,,성장의 과실을 임금 형태로 재분배하여 구매력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공유한다는 발상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일을 할 줄 안다는 건 본질적으로 자동성을 획득하여 내면화함으로써 그것을 비자동화할 수 있을 정도로 숙달의 경지에 이르는 겁니다. 

 

알고리즘이라는 자동성에 기반을 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동기계를 설계하는 목적은 사용자들의 비자동화 능력 증대에 기여하려는 거입니다.

능력이란 살 줄 알고, 할 줄 알고, 생각할 줄 아는 모든 형태의 앎이고, 그것은 네겐트로피, 즉 독특성을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자기 나름대로 아이를 키우는 방식은 표준화할 수 없는 것이죠.

 

진정한 성장이란 새로운 개인화와 새로운 가치 형태를 도입하여 엔트로피 시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기여경제입니다. 

 

저자는 인간이 자동적인 것을 내면화해 자기 것으로 바꾸는 과정을 '비자동화'로 부르는데, 지금 자동화 기술이 문제인 것은 비자동화의 가능성을 크게 줄여버린다는 데에 있다.

 

 

[ 자평 ]  아, 철학자의 눈높이라는 것은 이런 것을 얘기하는 것이구!

 

어떤 책들은 철학이 현재에는 필요없다는 투로 이야기를 한다.

"새로운 ‘지식의 패러다임’을 알면, ‘필독서 목록’을 점점 지워나가게 될 것이므로. 그렇다고 기존 패러다임으로 쓴 ‘명저’들을 무조건 읽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명저’는 새로운 지식의 패러다임으로 다시 읽어야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또 어떤 분들은 철학, 철학자라는 브랜드로 대단스럽지 않은 눈높이을 대단한 것처럼 가르치려 한다.

"철학자를 보지 마라, 그가 보고 있는 것을 보라"..."ㅇㅇㅇ은 대한민국을 철학자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 그는 철학자의 궁극적 시선은 국가다"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면 아주 아주 드믈지만 현재 우리와 같이 사는 정말 철학자의 눈높이를 보여주는 제대로 된 책들이 더러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철학자의 눈높이를 늘 강조하는 분의 주장에 따라 두 분의 내공와 눈높이가 얼마나 다른가를 느껴 보자.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