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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내용 ]
ㅇ 명상이나 종교에 있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주관적 착각에 빠져 객관적 사실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ㅇ 집단적 틀....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틀....집단주의의 틀...이 집단주관은 명상과 종교의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의식 구조를 이해해는 데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ㅇ 집단 특유의 공통된 의식....인종, 민족, 종교, 문화권, 지역권에 따라 매우 중층적으로 형성되어 있다......여러 형태의 주관의 틀을 버리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서구 과학의 위력은 바로 객관화에 있다.
ㅇ 종교나 명상의 세계는 지금도 여전히 집단주관에 비친 것을 마치 절대 객관적인 진리인 양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ㅇ 자기 내면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있으면 진정한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없다. 언젠가는 다시 이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ㅇ 우리의 삶은 내면과 외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면의 세계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외면의 세계를 소홀히 하는 것은 삶의 전체적인 효율성에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ㅇ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일상의 현실은 현실이다....일상의 삶에는 깨달음으로 풀 수 없는 것들이 많다.
ㅇ 객관성과 전체성이야말로 방대한 명상의 숲을 제대로 헤치고 나아갈 수 있는 주요한 길잡이다.
ㅇ 감각적인 쾌락이란 묘한 것이어서 점점 보다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게 된다.
ㅇ 나는 역사상 이 네 가지 길을 가징 잘 조화시킨 사람음 석가모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초롱초롱한 지혜와 대자대비한 사랑을 동시에 발휘하였다....선정의 경지에 있어서도 가장 깊은 단계에 이르렀고, 그러면서도 깨달음에 안주하지 않고 한평생을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다. 그래서 나는 석가모니를 가장 위대한 요가 수행자로 생각한다.
ㅇ 요가 삼매 체험의 가장 큰 한계는 무한한 기쁨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 요가에서는 진리의 속성을 존재(sat), 의식(chit), 기쁨(anada)이라고 한다. 요가 수행자들은 이 세 가지 가운데서 특히 기쁨을 추구한다.
ㅇ 요가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내면적인 깨달음을 너무 강조하여 외면적인 일상 세계를 무시한다는 것이다.....어떤 의미에서 요가의 성자들은 카스트 제도에 대한 무의식적인 방조자들이다.
ㅇ 힌두교적인 세계관과 요가 철학의 한계......이 현실 세계는 덧없는 꿈이고 내면의 무한한 기쁨만이 진실한 실체이다......현실의 아픔을 구체적으로 개혁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ㅇ 한 개인의 과도한 성에너지의 낭비가 개인의 황폐화를 가져오듯이, 사회 구성원 전체가 과도하게 성에너지를 낭비하면 그 사회와 문화를 지탱하는 내적인 지지력이 무너지면서 사회 전체가 황폐화된다.
ㅇ 소주천과 쿤달리니는 집단주관의 틀에서 나온 것이다...각기 자기가 속해 있는 문화권의 집단주관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다르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ㅇ 무언가 미지의 생명 에너지 (프라나 or 기...등)가 흐르는 통로나 센터가 있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대부분 여러 형태의 집단주관의 색안경을 통하여 그것들을 보기 때문에 그 실제적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
ㅇ 동북아의 가장 대표적인 집단주관의 하나인 음양오행.....객관적인 실제가 아니라 단지 이 세계를 해석하는 매개체의 하나일 뿐....
ㅇ 선민 사상은 당연히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유대민족의 집단주의적인 믿음인 것....유대민족의 편협한 민족신이었던 야훼는 예수라고 하는 종교적 천재에 의해 갑자기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으로 변모한다. 이후 야훼는 유대민족의 민족신 수준에서 세계의 신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ㅇ 자기가 체험한 것이 실재하는 세계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문화권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들은 실재의 세계를 자신들의 개인적 내지는 집단적 주관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것이므로 완전하거나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ㅇ 나중에 가서는 결국 마음을 닦고 그릇된 세계관을 바로잡는 수행법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육체가 기를 다스리는 수행법보다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법이 더 우위에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ㅇ 단학에는 성자가 없다. 단학으로 깨달음을 얻어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궁극적인 지표를 전달 주는 성자를 본 적이 없다.....그들의 가르침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감동을 주거나 삶의 지표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ㅇ 설령 아득한 고대에는 우리의 것이었다고 하여도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사람들에 의해 발전을 하여 중국화된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중국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
ㅇ 중국의 미가 화려미와 웅장미를 위주로 하고 있다면 우리의 미는 자연미와 조화미를 위주로 하고 있다. 청자의 은은한 맛과 백자의 담백한 맛이 그것을 말해 준다.
ㅇ 주문을 외우면 그 주문이 지니고 있는 문화적/종교적 집단주관의 틀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명상법들도 집단주관의 틀의 영향을 받지만 주문 명상법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한 편이다.
ㅇ 일단은 새로운 차원의 과학 기술이 시급하다....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과학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
ㅇ 실체가 없어 인연에 의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변천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제행무상이라고 한다.....연기야말로 불교 세계관의 핵심이다.
ㅇ 중국 불교는 인도 불교와는 다른 불교, 즉 중국적인 불교라고 할 수 있다.....언어나 개념의 차이가 아니라 사유 구조, 정서, 감각, 생활 양식 등의 문화 전반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선종은 보다 본격적으로 중국화된 '불교'라고 할 수 있다.
ㅇ 유식은 명상을 바탕으로 성립된 정밀한 심리학이다.....유식은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각광받을 수 있는 불교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선종이 지나치게 논리를 무시하는 데 비해 유식은 매우 논리적으로 우리 마음의 구조를 대해 설명한다.
ㅇ 유식에서는 "삼라만상은 오로지 식이다"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 말을 풀이하면 우리가 나의 외부에서 실재한다고 여기는 대상 세계는 모두 인식의 표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뜻이다.
ㅇ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을 항상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보고, 자기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식이 바로 말나식이다.....세계의 모든 종교나 명상법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자기 중심성을 버릴 것을 강조한다.
ㅇ 나라는 것이 없는데도 나라는 것이 있다고 집착하는 어리석음....없는데도 있다고 여기는 것은 착각이다. 이 착각이야말로 바로 제칠식의 가장 큰 뿌리이며, 모든 고통의 뿌리인 것이다.
ㅇ 우리의 눈에 세상의 이런 모습이 보이고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은 우리 인류 공통의 집단주관에 의한 것을 따름이다. 즉, 모든 대상 세계가 이 모습 이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바라보는 내 마음, 즉 견분의 수준에 의해 그렇게 투영된 것일 따름이라는 것....
ㅇ 선종이라 할 때, '선'자는 여덟 단계 요가 중 칠단계인 '디아나'에서 온 것이다... 생각이 교란됨이 없이 하나의 대상에 완전히 집중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
ㅇ 선종 특유의 양상....불립문자를 강조하는 경향, 깨달음에 있어 단도직입을 중시하는 성향, 깨달음 이후의 일상성을 중시하는 성향, 이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ㅇ 노장 정신의 진정한 계승자는 도사와 신선가들이 아니라 바로 선사들......선사들은 겉으로는 불교의 껍질을 쓰고 있지만 실제 그 깨달음의 내용은 바로 노장의 정수를 이었던 것....
ㅇ 빛이나 소리 혹은 기나 우리 몸의 일부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궁극적인 실상에 이르기 어렵다. 이에 비해 이 세계와 마음의 참모습에 집중하는 것은 처음에는 무척 힘들어 참으로 막막하지만 제대로만 하면 자기 마음의 근원적인 모습에 보다 쉽게 다가설 수 있다.....오로지 본질의 그것만을 추구한다....다른 명상법에 비해 단도직입적으로 궁극적 세계로 들어가는 편이다. 화두선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선사들이 화두을 잡는 것이 다른 어떠한 명상법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
ㅇ 내가 보았을 때 가장 뛰어난 화두는 이뭐꼬 화두 가운데서도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것이 무엇일까?"라는 화두이다.....이 화두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도 들 수 있지만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도 계속 들 수 있는 것이다.
ㅇ 선종- 단순함과 심오함의 절묘한 만남, 그러나 모호하다.......선종의 거품....첫 번째로 들 수 있는 선의 한계는 불립문자에 대한 지나친 강조이다.....선조의 가장 큰 특징인 동시에 가장 큰 한계라고 할 수 있다.
ㅇ 선종의 깨달음이 바로 석가모니로부터 내려온 정법이라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한참 거리가 있다.
ㅇ 선종의 견성뿐만 아니라 모든 깨달음은 유식의 사분설 중의 자증분을 체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궁극적이 깨달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제각기 미세한 집단주관적이 착각에서 나온 오류이다.......자증분이란 인식 주체와 인식 객체가 나누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오감의 세계와는 차원 자체가 다른 현묘하고도 현묘한 세계라 할지라도 인식된 것은 반드시 그것을 인식하는 그 무엇인가의 인식 주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ㅇ 진정한 깨달음은 어떠한 의식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의식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깊고 현묘한 것이라 할지라도 미세한 집착에 걸려 있는 것이다.
ㅇ 혹세무민하는 교주나 깨달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의식의 힘이나 영적 감화력은 강할지 몰라도 지혜가 결핍되어 있다.
ㅇ 비파사나의 장점은 다른 어떤 명상법에 비해 보편적이면서도 과학적이라는 데 있다......비파사나의 핵심은 나타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것이다.
ㅇ 비파사나의 또 하나의 장점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고 일상 생활과 괴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ㅇ 현재 의식만큼 확실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을러 소나 개나 파리나 모기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현재 의식이 어떤 궁극적인 세계보다 더 궁극적인 세계라니 ! 이 얼마나 절묘한가?
ㅇ 현재의식을 100% 받아들이는 순간 드라마는 끝이다.
ㅇ 내가 아는 바로는 역사상 현재 의식으로 완전히 돌아온 사람은 오직 석가모니뿐이다. 그 단서는 바로 사념처관에 있다....기존의 깨달음은 자증분의 경지에 이른 다음 다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자증분 너머의 증자증분을 찾아야 한다.
ㅇ 결국 완전한 진리는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어떠한 형태든지 일단 인식되어진 것은 그 속에 미세한 주관의 틀이 개입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절대 진리라고 확신하는 그것도 사실은 때가 지나면 언젠가는 변화한다. 변화하는 것은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다.
ㅇ 참으로 묘하게도 내면과 외면은 결국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안으로 끝까지 가보면 다시 밖으로 돌아오게 된다.
ㅇ 깨달음의 완성은 결국 에고의 완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존의 성자들과 깨달음 이들 가운데 석가모니의 삶이 여기에 가장 근접한다.
ㅇ 공자는 결코 노자의 몇 수 아래가 아니었다. 노자와 동등한 수준이거나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한 수 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ㅇ 공자의 위대한 점은 평범한 자질을 타고난 보통 사람으로서 끝없는 노력에 의해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ㅇ 공자는 위대한 수행자이자 교육자이자 정치가이자 사상가이자 예술가이다.....내면의 깊이보다 중요한 것은 내와 외의 조화이자 전체적인 삶의 성취도이다. 이런 면에서 보았을 때 공자는 노자보다 한 수 위인 것이다.....깨달음의 기준을 내면 세계에만 맞추지 말고 삶의 전체적인 완성도에 맞춘다면 답은 간단히 나올 것이다.
ㅇ 공자의 가르침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수기치인....안으로는 심성을 도야하고 밖으로는 그것을 세상 속에서 실천한다는 뜻.....인으로 스스로의 인격을 도야하고 예로써 사회적인 실천을 한다는 뜻...인은 자기를 닦는 도구이고, 예는 세상 속에서 실천하는 도구....
ㅇ 유가에서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성인은 수기와 치인을 동시에 완성한 사람......공자 자신이 둘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였다.
ㅇ 화광동진.....수행의 마지막 단계....노자는 이것을 '현동'이라고 하였다. 현동이란 현묘한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함....초월적인 상태에 취해 있지 않고 다시 평범한 일상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현묘한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안목이 아닐 수 없다.
ㅇ 공자의 명상법과 깨달음의 장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끝없는 배움에 대한 강조이다.....배움을 통하여 고정 관념과 편견과 교만이 쌓여 간다면 그것은 저급한 배움이다. 배움을 통하여 고정 관념을 깨고 편견을 벗어 버리고 진정으로 더욱 겸손해질 때 그것이 바로 진정한 배움이다.
ㅇ 논리나 사유는 이 세계를 인식하는 주요한 틀 가운데 하나이다. 직관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 둘이 조화를 이룰 때 세계에 대한 이해도가 더 깊어진다. 논리나 사유가 제대로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초월적인 감각이나 직관만이 각성될 경우 본인 스스로도 정신 못 차리고 나아가 남들도 엉뚱한 방향으로 인도하게 된다.
ㅇ 사유나 논리를 제대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지식을 쌓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지식을 부정하였던 노자보다는 지식을 인격 수양 방편의 하나로 인정하였던 공자를 더 높이 평가하고 싶다.
ㅇ 공자는 내면적 깨달음은 결국 '예'라고 하는 윤리와 '악'이라고 하는 예술의 형식을 빌려서 구체화.....내면적 수양과 사회적 실천의 결합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공자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 그것을 철저하게 사회화하려고 노력하였다.
ㅇ 내면적 수양과 외면적 실천을 하나로 묶으려는 유가의 시도는 결국은 미완성이었지만 그 시도 자체는 세계 어느 사상이나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것이다.
ㅇ 노자의 수행에 있어서 가장 큰 성과라고 한다면 역시 화광동진의 원리를 들 수 있다. 화광동진은 다시 일상의 현재 의식으로 돌아올 것을 강조하는 것....노자의 화광동진은 동북아에서 나온 사상 가운데 가장 심오한 것으로서 세계의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밝힌 바가 없다.
ㅇ 입체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나선형 운동이다. 나선형 운동은 우주 만물의 성장 변화의 원리이다. 우주는 나선형적인 운동을 하고 있다. 나선형 운동은 발전인 동시에 순환이다.
ㅇ 원래 미분화의 전체성 상태에서 이원성의 세계로 들어와 개체성을 지니는 것, 나는 이것이야말로 바로 원죄의 본래 뜻이라고 생각한다.
ㅇ 내가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 의식은 본질적으로 주관과 객관의 대립으로 되어 있고, 이것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 계속 이어진다....어떠한 초월적이고 심오한 경지 속데오 모두 미세한 주관적인 착각이 개입되어 있다. 절대 객관적인 진리는 알 수 없는 것이다.....완전한 깨달음은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최선을 다해 나아갈 따름이다.
ㅇ 삶의 종점에 이르는 마지막 삶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척도는 내면의 깨달음의 깊이가 아니라 바로 삶의 전체적인 완성이다.....오랜 세월 윤회를 거치면서 쌓아 왔던 고통과 쾌락, 부귀와 빈천, 기쁨과 슬픔 등이 장엄한 파노라마를 그리면서 한 생애에 모두 표출된다. 그만큼 삶의 스케일이 크게 나타난다. 그 속에서 오랜 세월 쌓아 왔던 인연의 매듭들을 다 풀고 자신이 성취한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마지막 길을 떠난다. 그리하여 삶은 역사와 문명에 큰 자취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기준이 내가 이해한 가장 무르익은 삶의 모습이다.
ㅇ 석가모니는 가장 완성에 가까운 삶을 보여 주고 있다. 일단 욕망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석가모니의 삶은 기존의 성자들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다....살아 있을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두고 많은 칭송을 받은 사람은 석가모니밖에 없다. 이상으로 보아 석가모니는 한 생애 동안 가장 낮은 욕구로부터 가장 높은 욕구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으로 두루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ㅇ 삶의 완성도는 깨달음의 완성도와 비례한다. 깨달음의 내용 면에서 보아도 석가모니가 가장 깊다...깨달음의 깊이와 논리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을 때 가르침의 원형이 비교적 잘 전수된다.
ㅇ 석가모니의 삶과 가르침이 가장 완전성에 가깝다. 안과 밖의 모든 욕망을 성취하고 그것을 모든 사람과 나누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목표이다. 아울러 그것을 위하여 눈을 감을 때가지 겸허하게 수행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좇아가야 할 모범적인 길이다.
ㅇ 석가모니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가르침은 어떠한 깨달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끝없이 객관화시키면서 자신의 삶을 전체적으로 완성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완성자에게 통용되는 가장 심오한 가르침이다.
ㅇ 모든 종교적인 체험들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의식의 힘이다. 하느님이나 알아나 시바신이나 부처님이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하느님이나 알라나 시바신이나 부처님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자기 암시와 자기 최면을 걸어 자기 내면 깊숙이 있는 의식의 힘을 각성시키는 것이다.
ㅇ 모든 종교의 힘을 유지시켜 온 것은 신이나 교주의 힘이라기보다는 바로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집단 주관적 착각에서 나온 의식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ㅇ 윤회는 원적인 것이 아니라 나선형적이다. 원은 단순한 순환이지만 나선형은 순환인 동시에 발전이다.....우리는 단순히 삶과 죽음을 반복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점차 의식의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ㅇ 의식이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영원성과 무한성을 외적 대상에서 구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구하게 된다.
ㅇ 욕망은 모든 생명체의 삶의 원동력이다. 사실 이 우주의 발전의 원동력이다.
ㅇ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욕망의 추구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삶의 완성이란 오랜 세월 동안 추구해 온 그 모든 욕망을 이루는 것이다. 만약 내면에 있는 영원성과 무한성을 깨치는 것만이 소중하고 그 이전의 모든 욕망들은 부질없다면 그것은 자신의 모든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요, 자신의 삶의 과정을 부정하는 것이다.
ㅇ 과정 자체가 바로 목적이라는 것.....과정이 바로 목적이므로 우리는 과정을 완성시켜야 한다. 즉, 삶의 과정에서 지녀 왔던 수많은 욕망들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ㅇ 과연 집단주관을 벗고 삶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명상법이 있을까? 있다. 바로 자아와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명상법이다. 자기 자신과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어떠한 명상법보다 훌륭하고 효율적이다.
ㅇ 자아와 세계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자아를 먼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해하는 이 세계는 우리 자아의 틀에 비친 세계이기 때문이다. 틀을 바로잡아야 세상을 올바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명상법에서는 우선 자신의 몸을 관찰할 것을 강조한다. 그 다음에 자신의 느낌과 마음을 관찰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깨달음조차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ㅇ
[ 느낀 점/배운 점 ]
저자가 쓴 첫 책인 '명상체험여행'(1998년)을 읽은 후 저자를 좋아한다.
아래 책을 낸 후 명상 지도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도 폐쇄하고 근래에는 전공이신 중국 인문학 쪽 책을 내시는 걸로 보인다.
명상계에는 자칭/타칭 도사, 깨달은 자, 선사 등 등이 많다.
특이 어떠한 체험을 통해 일체의 에고가 없어지고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식의 자기 자랑을 하는 분들이 많다.
이 정도면 친절한 편이고 도대체 무의미한 대화가 무슨 깨달음의 징표가 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선사들이 지천이 널려 있다.
부처님의 ㅇㅇ대 제자라는 식으로 의발을 받았다느니 어쩌니.....
이런 명상계의 잡상인들과 저자는 한 차원 높은 횟을 그어 버렸다.
스스로 깊은 체험을 하였고 나아가 체험에 대한 객관화 및 논리적인 검증을 해 본 사람만이 씹어내고 뺕어 낼 수 있는 언어가 있다
집단주의적 착각이란 개념으로 종교를 해석하는 방식이 좋았다.
특히나 욕망의 완성이 삶의 완성이고 깨달음의 완성이라는 설명. 나선형적 순환은 어느 책에서도 보기 어려운 저자의 독특한 언어이다.
이 세가지 개념이 저자의 책을 읽은 지 어언 15여 년 (2003년 발행)이 지났음에도 새롭게 마음에 새겨 진다.
저자는 "자아와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명상법이 완성된 명상법이다. 자기 자신과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어떠한 명상법보다 훌륭하고 효율적이다."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명상가들의 책을 보느라 삶의 낭비하지 말고 아랫 분들의 책을 보는 것이 100대 1,000배 삶에 도움이 된다고 본다.
더군다나 위에 말에 동의를 한다면 이 분들이 진정한 명상가일 수도 있다.
수학자 강병균교수가 쓰신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
읽어 보면 얼마나 선사들이 말도 안되게 무식한지 알 수 있다.
무아를 주장하고 가르친다는 국내 스님들 뿐 아니라 인도를 포함한 동남아 계열 스님, 명상가들이 많다. 지천에 널렸다.
내가 다시 20대~30대로 돌아간다면 그런 쓰레기들을 접할 시간에 아래와 같은 책들을 보겠다.
신경과학자 샘 해리스가 쓴 '자유의지는 없다', '나는 착각일 뿐이다.'
심리학자, 생물학자가 같이 쓴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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