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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책 머리에)
 
이 책의 제목으로 삼은 '체계불학'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인문학을 넘어선 불교학의 연구방법론을 모색하다가 티벳불교 겔록파의 수행지침서인 <보리도차제론>에서 그 해답을 찾으면서 필자가 고안한 신조어였다. 
----> 번역되어 있는 책, 요약본을 번역한 책들이 있다는 것은 이번에 알았다.

 

(1. Systematic Buddhology와 보리도차제론)
 
현대의 인문학적 불교학의 연구성과를 취합할 경우.....십이연기설에 대한 태생학적 해석은 아비달마논사들의 조작이며,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 모호해지고, 선종의 사자상승의 전통은 허구로 판명되며....하택 신회는 종파적 이익을 위해 육조 혜능의 전기를 조작한 거짓말쟁이이며.....대부분 불전은 후대에 조작된 가짜로 판명되고, 부처님 이후 불교계에서 활동한 고승대덕들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만다.
 
앞으로 불교학자의 역할 중 하나는 현대의 문헌학적 연구성과에 토대를 두고 대소승을 망라한 불전의 모든 내용을 유기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수미일관한 하나의 신앙체계로 구성해 내어 불교신자에게 제공해 주는 불교학의 정립에 진력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기독교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lody, 체계신학)에 해당되는 불교학이다.
 
현대의 문헌학적 연구성과들 중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내용들을 취합한 후 대소승의 모든 불교사상을 포괄하는 새로운 체계불학을 구성해 내는 것이리라.
 
하사도의 삶은 재가자와 출가자가 공통적으로 닦고 익혀야 할 수행으로 이런 수행이 체화된 사람만이 전문수행자의 길인 중사도로 들어갈 수 있다.
 
중사도는 사성제와 십이연기와 같은 소승의 교학에 입각해 닦는다.
 
 
(2. 현대 불교학의 과제와 해결 방안)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라고 한다. 그와 반대로 불교는 자각의 종교라고 한다. 
'초월적 계시'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 신학이라면, 불교학은 '내재적 각'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쫑카빠(Tsong Kha Pa, 1357 ~ 1419)의 <보리도차제론, Lam  rim)에서 이러한 '신앙으로서의 불교학', 즉 체계불학의 전형적인 모습이 발견된다.
 
대소승을 망라한 모든 불전의 내용을 종합 회통하여 거대한 정신적 황궁을 축조해 낸 학승이 바로 쫑카빠이다.
 
(4. 티벳불교의 수행체계와 보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하품이나 하중품의 삶을 살고 있다. 
하상품의 삶이 되어야 비로소 <보리도차제론>에서 말하는 하사도에 해당된다.
 
지관쌍운법이란 "사마타의 시작 --> 사마타의 완성 --> 위빠사나 수행 --> 사마타가 흐트러짐 --> 사마타의 시작 --> 사마타의 완성 --> 위빠사나 수행 --> ...."로  계속되는 '교차적 지관 수행"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8.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 단절인가, 계승인가? )
 
대승불전은 모두 후대에 창작, 편집된 위경으로 부처님의 직설이라고 할 수 없다....
초기불전에서 그 전거를 찾을 수 있고 사성제의 교리에 어긋나지 않으면 불설로 인정한다는 기준을 세울 경우 대승불전의 가르침 역시 불설로 수용된다.
 
인도불교적 의미에서의 대승불교는 불탑신앙과 같은 새로운 신행 방식으로 인해 출현한 것이 아니라, 창작의지 가득한 익명의 저자들에 의해 새롭게 편찬된 다양한 불전들에 근거하여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었다. 이렇게 창작된 대승불전들이 한문 불교권에 유입되면서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대승불교고단이 형성되었다. 
 
대승비불설에 대한 반론 가운데 하나는 "그러면 현존하는 초기삼장은 불설 그대로인가? "라는 반문이다.
 
현존하는 빠알리 니까야나 한역 아함경 역시 부처님의 교설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불교의 근본을 추구해 들어가는 과정을 양파까기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알맹이를 찾을 수 없는 양파.

----> 글쎄. 이렇게 '퉁' 치고 지나 가시는 것은 너무 쉽게 결론을 낸 것이라고 본다.
----> 붓다의 경지나 선사들의 경지나 다 같은 경지이며 새로운 시대의 맞는 모방이나 둘 다 '깨달은 분'으로 퉁치고 인정하자는 말씀들도 꽤 있다. 그렇게 되면 내 생각에 경지랄 것도 없는 어중이떠중이 스님, 선사들이 다 너도 나도 부처의 경지라고 인정받는 꼴이 될 것이다. 붓다의 경지 까지 간 인간이 있다면 나는 그런 개별 인간들은 매우 매우 드물다고 전제한다. 아니 적어도 지금처럼 자기가 다 득도했다는 사람들의 총합보다는 적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너그러운 잣대면 깨달음은 너무 대중적으로 소모되고 있다. 

 
 

 
대승불교는 양파의 껍질과 같은 불교의 본질이다....
양파의 경우 벗겨지는 껍질들이 모두 양파의 육질이다. 껍질이 본질인 것이다....
어떤 대승불전이라고 하더라도 그 세계관이 초기불전의 근본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나의 인지와 정서를 불교적으로 정화시키고 향상시킨다면 불설로서 수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 불교도나 불교학도가 아니라 나는 별 상관은 없지만, 시현스님의 말처럼 나는 아니라고 본다.
----> 불설과 불설의 의미를 수용한 작품은 다른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설명한 탁월한 책이 있다고 하여 그 책이 그러니 아인슈타인이 친설한 <상대성이론> 해설서라고 하자고 하는 억지와 같다. 도스토옙스키가 직접 쓴 소설과 도스토엡스키의 문체, 스타일을 학습한 AI가 쓴 도스토옙스키가 쓴 것 같은 소설은 다른 것이다. 원작과 위작은 분명이 다르다. 원작이 워낙 오래 되고, 진위를 가르기 힘드니 위작도 대충 원작자의 스타일과 비슷하면 원작이라고 해주자는 타협은 사회적일 수 있어도 진리적일 수 없다. 

 
(9. 대승신화와 가상수행, 그리고 불교의 미래)
 
'대승비불설'은 현대에 새롭게 제기된 문제가 아니다.
남방불교 전통에서는 대승불전을 '후대에 편찬된 불교문학' 정도로 평가하며, 동아시아의 대승불교전통 내에서도 대승의 불설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대승불전이 현재의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붓다의 직설'과 '전승'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무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기피해 왔던 서구철학사에서 우리는 가끔 무에 대해 적극적 가치를 부여한 사상가, 종교가를 만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 ~ 1328)이다.
 
헤겔에 이르러 무에 대한 체계적 논의가 시작된다.
 
불교의 무아설에서 말하는 '무'에는 '인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판적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우리는 인지의 차원에서 '분노'와 '탐욕'이라는 개념에 실체가 없음도 자각해야 하지만, 감성의 차원에서 '분노'와 '탐욕'을 제어하는 도덕적, 윤맂거 실천에도 전력하여야 한다. 
 
[ 자평 ]  글쎄.. 불교도나 불교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보리도차제론>이란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10대  ~20대 선사들의 책을 닥치고 읽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후 30 ~40대를 가면서 초기불전, 서양학자 중심의 불교 관련 이론서를 가끔 읽는 것으로 변했다.
그 때 접했던 저자 중 한 분이 김성철 교수였던 기억이 난다.

 
불교도는 아니지만  '깨달음에 대한 체계'가 필요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찍 부터 나도 공감이 되었다.특히 확철대오하면 인생대사를 다 마쳤다는 식으로 방/할만 해대며 무애의 경지에 이른 듯 하는 선사들의 언행을 볼 때 더욱 그렇다. 말한 것을 실제 좀 보여 주는 분들이 있었으면 싶었다. 이 세계도 경지를 보여 주는 행보다 경지를 떠드는 말이 더 많은 분야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이 분야에서 손으 떼어낸지 오래 되었다. 어느 분야에는 광고/홍보가 있듯 이 분야도 ‘깨달음’ 광고/홍보가 있음을 철지나 알았다.

이런 관점에서 교수님이  '보리도차제론'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뭐 일부러 찾아서 읽고 공부하지는 않겠지만
그 정도 알아낸 것으로 만족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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