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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제1장. 절대로 얼버무려서는 안 되는 것)

 

잘 알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행위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적어도 고따마 붓다는 출가자의 노동을 철저히 금하였다....

오로지 해탈/열반만을 희구하는 자(출가자)들에게는 농업이든 상거래든 모든 노동 생산의 행위는 금지되어 있다. 

이것이 고따마 붓다의 불교의 기본적 입장 중 하나이다.

 

 (제2장. 불교의 기본 구조 : 연기와 사제)

 

제행: 원인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

 

모든 현상은 원인(조건)에 의해서 형성되고 따라서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한다. 

'모든 현상은 원인(조건)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을 법칙으로 하여 개념화한 것이 이른바 '연기'설이다.

 

오늘날 'dukkha(고)'라고 하는 말을 영어로 번역할 때 흔히 unsatisfactioness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말은 '불만족'이라는 뜻인데, 이 뜻이 dukkha의 뉘앙스를 올바로 짚어 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인연에 의해서 형성된 모든 현상이 무상한 이상,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중생의 삶은 항상 불만족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업 : 나중에 결과를 가져오는 작용

 

고따마 붓다의 불표의 궁극적인 목표는 '탈선악(善惡)'이지, '반선악(善惡)'이 아니므로 열반을 지향하는 실천에 장애가 되지 않는 한 자타에게 '낙(樂)'을 가져다주는 '선'한 행위를 적극적으로 권장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제3장.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하지 않고 : 무아와 윤회)

 

'무아'라고 할 때에 고따마 붓다가 부정한 건 '상일주재(主宰) '의 '실체아(實體'라는 것이다.

'상일주재'란 글자 그대로 상주하고 단일이며 컨트롤 하는 권능을 가진(주재하는 것을 말한다.

 

'무아'의 원어인 anattan에 an이라고 하는 부정사를 붙이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아가 없다'는 의미의 '무아'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아가 아니다'는 부정의 '비아'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어쨌거나 '엄격한 무아'나 '진아의 존재' 어느 쪽인가가 답이라면 딱 잘라 답할 수 있는 물음이라고 생각되지만 고따마 붓다는 결코 이러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란 연기의 법칙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하는 모든 요소의 일시적인(임시적인) 화합에 의해서 형성된 것에 감각기관으로부터의 정보가 인지됨으로서 경험이 성립되는, 어떤 유동을 계속하는 장()을 말한다....

개체성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불교의 기본 입장은 '무아인데 윤회한다'가 아니라 '바로 무아이기 때문에 윤회한다'라는 것임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행위에 의한 작용이 결과를 남기고, 그 잠재 세력이 다음의 업(행위)를 불러일으키는 프로세스가 그저 상속(相續)한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실태이다.

 

존재하고 있는 것은 업에 의한 현상의 계기(繼起)뿐이고 그 과정, 프로세스가 '윤회'(돌아 흐르는 것)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지, 거기에 '주체'라로 말할 수 있는 고정적인 실체는 내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윤회란 정신적, 그리고 물질적인 현상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프로세스로서, 어떤 '사람'이 이생에서 다른 생으로 계속해서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5장.세계의 끝장: 현법열반과 그곳으로 가는 길)

 

'분별의 상'이라고 번역한 빠빤짜(papanca)...

본래 확대, 확산하다의 뜻이고 영어로 말하면 expansion, diffuseness, manifoldeness의 뉘앙스이다.

 

육근육경이 '멸진'되었을 때 존재하지 않는 건 인지 그 자체라기보다 거기에 '있다'든지 '없다'와 같은 판단을 성립시키는 근저에 있는 '불별의 상', 즉 확산, 분화, 환상화의 작용인 빠빤짜였을 것이다. 

 

'이미지를 만들지 마라'라고 끈질기게 말한 것도 이 빠빤짜라는 이야깃 거리를 만드는 작용을 멈추고, 더 이상 고통스런 '세계'에 얽메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친절한 지도였던 것이다.

 

욕망에 의거하여 만들어지는 다양한 이미지나 '나'라고 하는 가상을 중심으로 '전체'라는 상()을 형성한 것이 '세계'라고 하는 이야깃거리이다.

 

의식의 존재를 일상화하는 것으로 익숙해져 버린 맹목적이고 습관적인 행위(번외의 흐름)을 '막아 버리는' 것이 마음챙김(sati)의 실천이다.

 

 

(제6장. 불교사상의 제로포인트: 해탈, 열반이란 무엇인가)

 

해탈지견을 얻은 수행자는

"나의 해탈은 부동이다" 라든지,

"더 이상 다시 태어날 일은 없다.",

"범행은 원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마쳤다." 등과 같은 명백한 자각이 있다.

 

정(사마띠,)의 집중력이 초래하는 인지의 변화 없이 현상의 무상, 고, 무아를 여실하게 지견하는 일은 생각하기 어렵다.

 

여실지견이란 개념적 사고와 일상의식을 선정의 집중력으로 초월한 곳에 인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생기는 지혜가 사고의 결과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먼저 확인해 두어야 한다.

----> 이 부분이 에크하르트 톨레,토니 파슨스, 더글라스 하딩 등 현재 서구의 다양한 영적 스승들과 함께 이분(二分)을 부정하는 비이원론(Non-dualism), 곧 아드바이타들의 생각과 좀 다른 것 같다.

 

고따마 붓다의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추론과 사고가 진행된 결과 서서히 이루어지게 되는 개념적인 분별지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실존 모습 자체의 결정적인 전환, 이른바 '직각지(直覺知)'라는 것에도  또 다른 방증이 있다.

---> 방증(傍證) : 사실을 직접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되지는 않지만, 주변의 상황을 밝힘으로써 간접적으로 증명에 도움을 줌. 또는 그 증거

 

고따마 붓다의 불교에서의 '깨달음'과 해탈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실존의 전환이고 '직각지'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비구들이여, 생기지 않고, 이루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고, 조건 붙여져 있지 않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기고 이루어고 형성되고 조건 붙여진 것을 떠나버리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생성소멸하는 현상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인식하고 경험하여 그에 의해 '번뇌의 흐름이 닫히는 일'이 생겼다고 보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열반의 경험 그 자체에 대해서.....우 조티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열반이란 하나의 경험입니다. 그 순간에는 대상과 관찰이 정지합니다......

마치 무거운 짐을 옮기다가 그 짐을 내려놓은 것과 같습니다!

혹은 무언가 대단히 무거운 것을 잡아당기다가 줄이 뚝 끊어진 것과 같은 것!"

 

 

열반에 이르렀을 때에는 번뇌의 불꽃이 실제로 사라지고 만다는 것뿐이다.

 

 

 

 

(제7장. 지혜와 자비: 왜 죽지 않았던 것인가)

 

꽃은 꽃러럼 있듯이, 산은 산처럼 있듯이, 돌은 돌처럼 있듯이, '나'도 다만 그처럼 있다.

거기에는 의미도, 무의미도 없다.

 

갈애를 멸진하여 집착에서 떠난 해탈자들에게 있어서 생을 애호할 필요는 없지만 이를 혐오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해탈자들이 살고 있는 시간의 본바탕은 순수한 '유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20대에 읽었던 경봉선사의 법문짐에 유사한 내용을 본 기억이 난다.

---->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고 연극 한바탕 멋들어지게 하다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멋들어지게 하는 것인가.……

 

 

 

(제8장. 본래성과 현실성 사이에서 : 그 이후 이야기)

 

현격적 차이가 나는 게 열반에 대한 이해 방법이다.

미얀마의 불교도에게 열반이란 명상에 의한 무위의 영역에 대한 각지(知)의 문제이다.

태국의 불교도들은 열반이란 명상 때뿐만 아니라 행주좌와 전부에서 실현되는 인격의 일정한 상태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태국의 불교도에게 있어서 열반이란 명상에서의 특정한 상태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에서 의식이 지금/여기에로의 마음챙김을 유지하며 탐, 진, 치의 번뇌가 섞여 있지 않은 상태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래성'과 '현실성'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 시대나 지역의 문맥을 계승하는 형태로 새로이 말을 고치려고 한 깨달은 자들이 항상 끊임없이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 '원형'과 '모방'의 관점에서 초기 불교와 선불교를 해설한 박재현교수의 관점과 비슷하다.

---> "선불교의 역사는 '충실한 닮기'와 '새로운 원형'의 창조라는 두 가지 욕망이 뒤엉켜 진동하는 가운데 빚어낸 것"이다. 

 

(후기)

 

현대의 불교 프론티어는 본래의 불교권인 아시아가 아니라 이미 미국으로 옮겨진 것은 아닐까 느껴질 정도이다.

 

 

[ 자평 ]

 

책표지에 있는 문구가 궁금해서, 힌트가 있을 듯 하여 보게 되었다.

"해탈/열반은 '무엇'이며, 그것을 증득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무엇인가?' 라는 측면에서 그렇게 만족스러운 결실을 얻은 것은 아니다.

'해탈/열반'은 무엇인가?', '어떤 상태인가?' 등에 대해 내가 읽어본 가장 상세한 경험은 오히려 무묘앙 에오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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