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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밑줄/연결 ]

 

귀신론은 소외론이고 귀신은 소외의 공포가 외화된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귀신에서 인간과 인간간의 유대를 상실하고 고립되고 파편화되어 가는 현대인들의 실상을 보게 된다.

그리고 좀비에서 권력과 자본에 의해 조작되어 자동인형이 되어가고 있는 군중들을 보게 된다.

---> 이런 생각, 이런 해석 본 적이 없다. 신선하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새벅>(1978년)

미국인에게 '쇼핑의 추억'이 부모, 자식을 비롯한 어떤 관계 보다 더 기본관계임을 꼬집고 있다.

자본에 의해 대랑 조작되고 있는 소비대중 그것이 바로 좀비의 또 다른 얼굴이다.

 

올리버 색스는 그의 저서 <화성의 인류학자>에서....주인공은 버진이라는 이름의 50세의 남자.

이 세계는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부단한 노력과 분류와 기억과 연상을 통해 우리가 만든 것이다.

하지만 버질이 45년 만에 눈을 떴을 때는 지각을 뒷받침할 만한 시각적인 기억이 전혀 없었다. 앞이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본다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대상들간의 의미적 연결이 있어야 한다. 

아니 의미적 연결이 있을 때 비로서 '대상'이 성립한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의식이 결여된 상태에서는 감각에 주어지는 모든 것이 '현실'이 된다.

의식이 부여될 경우 비로소 가상과 현실이 문제되고 그 구분이 문제된다.

 

데이비드 흄적이 어투로 마음이란 기억의 다발로 만들어진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세상이 주는 어떤 신념체계를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세상사를 끊임없이 해석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신념체계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신념체계도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매트릭스라고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의 한계이다."라는 통찰로 요약하고 있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코키토(cogito)이다.

 

'의식'과 '자기의식', 그리고 자기의식들간의 인정투쟁 등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라는.....신이 어떻게 자기의식에 도달해 가는가에 대한 도식으로서 도입한 것....인간의 정신이 출현하는 과정에 대한 서술..."자기의식은 다른 자기의식에 대해서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즉자대자적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식은 인정됨으로써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악과를 먹을 것이냐 먹지 않을 것이냐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피조물에게 자신을 배반할 수 있는 자유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연관의 획득에 있어서 '나'가 필수적임을 보았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이 가능하냐의 문제는 컴퓨터가 '자아'(self)를 가질 수 있는가하는 문제로 환원된다.

 

귀신은 소외된 인간의 외부적 투사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귀신에 대한 공포는 사실상 우리 내면 속에 들어있는 소외에 대한 공포일지 모른다. 우리는 귀신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 '관계'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귀신론'은 '소외의 인간학'으로 읽을 수 있다.

 

 

이 단계에서 더 퇴행을 계속하면 '자기' 자체가 소멸한다. 일종의 좀비화가 일어난다. 

타자로부터의 소외의 공포에 이어 또 다른 형식의 소외 '자기로부터의 소외'의 공포가 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새벽> (1978년)

 

영화평론가인 심영섭씨는 "공포영화에서 누가 또는 무엇이 괴물이 되는가는 그 사회가 억압하는 본원적 무의식을 읽어낼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우리는 '귀신'에서 인간과 인간간의 유대를 상실하고 고립되어 파편화 되어가는 현대인들의 실상을 보게 된다. 그리고 '좀비'에서 권력과 자본에 조작되어 자동 인형화되어가는 군중들을 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공포영화는 뒤집혀진 '인간학'임을 알 수 있다.

---> 영화 평론가 이면서 심리학자인 심영섭....역시 보는 눈이 다르셨던 듯...

도덕 행위의 본질은 그 응징 가능성에 있다. 이 응징이 사실 정의의 원초적 의미다.

 

'착하고, 강인하고, 관대하며, 투명하다.' 이것이 정의의 기본적 특성이다....

불신과 배신이 판치는 개체들 속에 협동을 견인해낼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사람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자발적 도움을 이끌어 내는 그 힘 때문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착하고, 강인하고, 관대하고, 투명하라." 이것이 바로 적대적 개체간에도 상생의 결합을 이끌어내는 정의의 힘이다.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신뢰의 상실은 바로 우리의 역사가 맞대응의 실천을 통해서 배반을 응징하지 못한 데서 온다.

민족의 화합과 상생을 바란다면 지금이라도 확실한 친일규명과 청산을 통해서 응징과 보상을 하고 그것을 통해 용서와 관용으로 매듭지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친일 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고 오늘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다면 내일 우리의 자손이 안고 가야할 미래의 문제이다.

---> 2006년에 쓰여진 책인데, 2024년 현재에도 시사하는 점이 있다.

 

 

[ 자평 ]  2006년 책이나 약 18년 만에 다시 읽어도 재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고, 생각할 꺼리가 있다. 

 

이 책을 읽고 좋아하게되 이 분의 책을 꽤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조용현 인제대 교수 좋은 철학책 '보이지 않는.. : 네이버블로그

 

조용현 인제대 교수 좋은 철학책 '보이지 않는 세계가 진짜일까' 펴내

  20007년 3월 7일 국제신문 SF영화 속 철학의 재발견 철학의 대중화 나선 조용현 교수 유명 영화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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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하나가 강하게 꽂힌다. 심장 깊숙이..

 

착하고, 강인하고, 관대하며, 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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