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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기조 강연 : 간화선, 깨다름에 이르는 지름길 

수불 스님)

 

누구나 본래 완전한 마음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전도몽상에 빠진 이들은 이 마음을 등지고 알음알이를 일으킴으로써 고해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큰 일을 마치고 난 뒤에는 꽉 막혔던 속이 텅 비게 된다. 온 몸과 마음이 새의 깃털보다 가볍고 앞뒤가 툭 터져 한없이 시원해진다. 

 

(편집자 서문 :  우리는 왜 깨달음을 구하는가?)

한자경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 때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그냥 그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인식틀을 통해 걸러서 안다.

 

기존의 앎을 성립시켰던 인식틀 자체를 알아보는 앎, 그래서 세계를 기존의 앎과는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보게 하는 앎을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앎: 인식틀에 따라 나와 세계를 아는 것 = 인식틀에 매인 앎

깨달음 : 앎을 규정하는 인식틀 자체를 아는 것 = 인식틀에의 매임을 벗어나는 앎

 

깨달음의 일반적 구조

깨달음(1) : 장애 밖의 시선으로 장애를 발견

깨달음(2) : 장애 내용을 확인하여 장애를 제거

 

본래의 마음 바탕이 가지고 있는 밞음을 불교는 '본래적 깨달음'이라는 의미에서 '본각'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장벽 안에 갇혀 있어도 그것을 장벽으로 알아차리게끔 장벽 바깥으로부터 오는 시선은 바로 그 본각이 불러일으키는 시선이다.

 

 

('깨달아 감'과 "깨달음', 그리고 '깨달아 마침'

- 성취조건으로 본 깨달음의 의미)

박태원

 

'깨달음'이라는 용어는 해탈수행의 모든 과정에서 채택될 수 있다는 점과 원효의 관점을 동시에 고려하면, '깨달음'이라는 말은 크게 세 가지 맥락에서 채택할 수 있다.

첫째로, 실존이 '무아/연기의 진여지평에 직접 접속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의 성취과정'을 깨달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

둘째로, 실존이 '무아/연기의 진여지평에 직접 접속한 양상들'을 깨달음이라 부를 수 있다. 

셋째로, '무아/연기의 진여지평과 완전히 하나가 된 것'을 깨달음이라 부를 수 있는데, 이것을 '깨달아 마침'이고, 본각과 시각이 완전히 통한 '기각이 곧 본각이며, 묘각인 '궁극적 깨달음'이다.

 

붓다의 삶은 연기의 개인치유와 사회치유가 통합된 성공사례다. 

 

 

 

 

[ 자평 ]  그저 뭐... 그냥

 

자본주의란 무서운 것이다.

 

무엇으로 자기 밥벌이가 정해지면, 자기에게 밥을 주는 체계를 날카롭고 비판적으로 보기 힘들다.

적어도, 그래서 무언가를 깨달으려고 하면 그 체계를 벗어나야 한다.

내게 밥 주는 곳에서 마치 그 체계를 벗어난 것처럼 떠들어 대는 것만큼 우습게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 없다.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유익하고 효용이 있다는 주장을 해야 밥벌이가 가능한 사람들의 언어와 글은 그런 상황을 전제로 읽고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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