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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역자의 말)
카뮈는 생전에 자신의 <이방인>을 한마디로 요약해 달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 사회는,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라도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나는 단지, 이 책의 주인공이 그 손쉬운 일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선고 받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1부)
(I)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
---> 너무나 유명한 문장이다.
---> 내가 읽은 번역본은 2019년 5쇄 발행된 번역본이다.
---> 2022년 2월 개정판에서 이정서씨는 이를 다시 수정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심지어 말했다. "제 잘못이 아닙니다."
이제 무엇보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침묵이었다.
이 시골에서의 저녁 시간은, 서글픈 휴식 시간과도 같았던 것이다. 오늘, 넘쳐흐르는 태양은 이 지역에 요동치면서 비인간적이고도 위압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렇게 너무 서둘고, 확실하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나는 어떤 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II)
그건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려다 사장에게 이미 그렇게 말했던 것을 떠올리곤 그만두었다.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어쨌든 누구에게나 얼마만큼의 잘못은 있지 않은가.
언제나처럼 또 한 번의 일요일이 지나갔고, 엄마는 이제 땅속에 묻혔으며, 나는 다시 직장으로 돌아갈 것이고,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IV)
그녀가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V)
그는 내게 생활에 변화를 주는 데 흥미를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람들은 결코 삶을 바꿀 수 없다고, 어떤 경우의 삶이든 그 나름의 좋은 점이 있으며, 여기서의 내 삶도 결코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언짢아하면서, 나는 언제나 삐딱하게 대답을 하고 야망도 없으며, 비즈니스에는 절망적이라고 말했다. 저녁에 마리가 나를 보러 와서는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런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개의 실제 병은 늙어 가는 것이었고, 늙어 간다는 것은 치유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VII)
나도 알았다. 그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한 걸음 더 옮겨 봤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한 걸음을, 다만 한 걸음을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같은 것이었다.
(2부)
(I)
"안 됩니다. 그건 거짓이니까요" 나는 대답했다. "그건 말이라는 것이 결코 그다지 대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침묵하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해 보고는, 사실 후회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갑갑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II)
감금 초기에, 그럼에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가 구속받지 않는 사람의 생각을 가졌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종종 되뇌곤 했던 것이다. 누구나 결코 모든 것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라고.
"그렇소, 자유. 바로 그거요. 당신은 자유를 빼앗긴 거요."
"그러네요. 그렇지 않으면, 뭐가 징벌이겠어요." 나는 이해할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그것을 왜 내게서 빼앗아 버리는 것인지. 나중에야 나는 그것도 징벌의 일부임을 깨닫게 되었다.
(III)
검사는 이 사건에서 우연은 이미 양심에 너무 많은 패악을 가했다고 쏘아붙였다.
"나는 이 사람이 범죄자의 심정으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기에 기소합니다."
(IV)
나는 정중하게. 거의 애정을 담아. 실제로 어떤 것을 후회하는 게 내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여러분.사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나는 영혼이 없다. 그리고 인간적인 게 아무것도 없다. 또한 인간의 마음을 보호하는 도덕적 원리 가운데, 내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것 하나도 없다, 고 말입니다.
그것은 태양때문이었다고. 법정에 웃음이 일었다.
(V)
사람들은 항상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과장된 생각을 품게 된다. 반대로 나는 모든 것이 단순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새벽과 항소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필경에 나는 가장 이성적인 것은 스스로를 억제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어쨌든, 나는 실제로 무엇이 내게 흥미를 불러일으키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무엇이 내게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낙담하는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나는 단지 두려울 뿐이었고,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너무나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확실성은 여자 머리카락 한 올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고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죽음에 인접해서야, 엄마는 해방감과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됐다고 느꼈음에 틀림없었다.
누구도, 그녀의 죽음에 울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나 역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마치 이 거대한 분노가 내게서 약을 씻어 내고, 희망을 비워 낸 것처럼.
나는 내 사형 집행일 날 많은 구경꾼들이 있고 그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역자노트)
소설에서 문체는 정말 중요하다. 아니 '중요하다'라고 말할 정도가 아니라, 거의 전부다. 문체가 없는 작가는 소설가라기보다 스토리작가인 것이다.
문화적 차이? 그 친구는 소설이 안 읽히는 것이 문화적 이질감 때문으로 아는 것이다. 번역이 잘못되어서 일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하는 것이다. 소설 <이방인>에서 무슨 문화적 차이를 느낄 수 있다는 말인가?
---> 내가 이런 친구였구나 싶었다.
---> 문화적 차이가 소설 이해를 조금 어렵게 하는 것도 분명 있다고 본다.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 내게는 약간 그랬다. 그러나 <이방인>에는 문화적 차이가 있기에는 너무 얇고 작은 소설이다. 역자의 말이 맞을 것이다.
아무리 소소한 일상이라도 그것이 작품 속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어떠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냥 원고량을 늘리기 위해 의미 없이 쓰는 문장은 한 문장도 없다. 특히 카뮈 같은 작가에게는.
지금 뫼르소가 총을 쏜 가장 큰 이유는 '눈을 찌르는' 칼날 때문이다. 그 번쩍이는 칼을 든 사람은 앞에서 친구(레몽)를 잔인하게 찔렀던 바로 그 위험한 사내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 바로 정당방위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뫼르소가 아랍인을 왜 쏘았을까?라는 질문에 '태양 때문이라고' 답하고 있다. 자그마치 25년 동안 우리는 저 엉터리 번역에 우리의 사고를 지배당해 온 것이다.
정당한 이유로서의 한 발과 위장된 도덕, 종교, 권위,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를 향한 무의식적인 발사.
---> 프랑스 원전을 읽은 분들이나 전문가들이 어떻게 해석을 하는지 모르겠다.
---> 나도 태양때문이라고 상식적으로 읽었고, 그래서 왜 이것이 명작인지 모르겠으나 읽어야 한다니 읽었었다.
---> 이정서씨의 번역으로 읽고 이 소설에 읽기가 꽤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의 해석에 공감이 간다.
결코 카뮈가 쓴 걸 옮긴 게 아니라, 역자가 창작했다고 볼 수 없다.
---> 이 한 문장도 이렇게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고, 어떻게 번역되는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나을 수 있다는 점에 섬뜻했다. 심하게 확대하면 어떤 번역서로 읽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책을 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방인>은 결코 뜻을 음미하며 몇 번을 읽고 이해해야 할 철학서가 아니다. 읽으면서 그냥 뒤가 궁금해져야 마땅할 '이야기(소설)'인 것이다.
번역서를 읽으면서 이해가 안 된다면 자신을 의심하기이 앞서, 역자의 권위에 우선 주눅 들지 말고 그가 번역을 잘못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볼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 자평 ] 왜 반복해서 읽어야 함을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알듯 모를 듯 반복해서 읽고 있는 나. 그래서 번역본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또 다른 삶의 진실을 알려 준 책.
2022년 2월 14일 시작하여 21일 다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프랑스어 원전으로 쓴 이방인, 영어로 번역된 이방인, 김화영 교수가 번역한 이방인, 이정서씨가 번역하 이방인... 어떤 것이든 각자가 다른 이방인을 읽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된 문장으로만 보면 김화영교수의 이방인과 이정서씨의 이방인이 매우 다른 작품처럼 읽힌다.
그 만큼 번역본은 매우 중요함을 알았다.
특히나 이방인처럼 카뮈가 짦은 문장으로, 아주 짧게 쓴 소설에서 오역이나 자의적 해석은 작품을 읽는 치명적인 실수나 오해를 불어 일으킬 확률이 높다고 본다.
무언가 비판을 하려면 데이터와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비판자의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내가 읽은 이정서씨의 번역본 모두에 신뢰가 간다. 옳은 지적이고 근거가 있고 그의 번역이 더 잘 읽히며 이해가 간다. 다만 김화영 교수님도 재번역을 해서 다시 냈다고 하니 언제 한번 재독은 김화영교수 번역본으로 하겠다.
앞 부분 '역자의 말'에 장정일씨가 이런 말을 했다고 써있다.
"이방인 번역 비판의 99%는 자의적 해석과 생트집" 라고...
예를 들어 "단도를 뽑아서 태양빛에 비추며 나에게 겨누었다." (김화영 번역)
"칼을 뽑아서 태양 안에 있는 내게 겨누었다." (이정서 번역)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라고..
장정일씨는 소설가라는 분이 저 두 문장에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느껴지는가?! 난 소설가가 아닌데도 차이가 꽤 있다고 느껴 지는데….
글쎄, 장장일작가의 말대로 모든 번역은 어찌보면 자의적 해석이니 그 부분은 맞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어떤 점에서 이정서씨가 생트집을 잡았다는 지 모르겠다. 책에 있는 그의 지적을 가지고는 논리적 설득이 되지 않는다. 또한 장정일씨가 번역한 번역본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번역 실력을 보여준 적이 없지 않은가?
장정일씨는 이정서씨의 번역본 지적을 읽어 보기나 했는지 의심이 된다. 책에 거의 반을 차지하면서 꼼꼼히 따지듯 지적한 이정서씨의 지적이 나는 매우 수긍이 가는 지적이고, 페스트나 시지프의 신화를 김화영교수본으로 읽었는데 그 번역도 의심이 갔다. (정확히 번역이 의심이 간다는 말이다. 돈을 내고 산 독자는 의심할 권리가 있다고 본다.)
역자노트에서 지적하는 기존 번역서에 대한 비평을 나는 모두 합리적으로 수긍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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