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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들

페스트 by 알베르 카뮈

비즈붓다 2022. 2. 2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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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1부)

 

어떤 한 도시를 아는 편리한 방법은 거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일단 습관을 붙이고 나면 그날그날을 힘들이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법이다. 우리의 도시가 바로 그런 습관 붙이기를 조장하는 터이고 보면 만사형통이라고 해도 좋겠다.

 

물음: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답: 시간의 길이를 구체적으로 체험할 것.

방법: 치과 병원 대기실에서 불편한 의자에 앉아 여러 나절을 보낼 것. 일요일 오후를 자기 방 앞의 발코니에서 보낼 것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어로 하는 강연을 경청할 것

 

"누구나 다 당하는 일인데요."학 말했다. 

"바로 그 말씀입니다."하고 그가 대답했다. "우리는 이제 누구나와 마찬가지 꼴이 되었다 이겁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오래가지는 않겠지. 너무 

저 매일매일의 노동. 바로 거기에 확신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 나머지는 무의미한 실오라기와 동작에 얽매여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멎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 자기가 맡은 직책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는 일이었다.

 

그가 자기에게 마련된 자리를 받아들인 것은 바로 그런 명예로운 이유에서였다. 이를테면 어떤 이상에 대한 충실성 때문이었던 것이다.

 

항상 자기의 착한 마음씨에서 오는 용기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2부)

 

말하자면 이 질병의 무지막지한 침범은, 그 첫 결과로서 우리 시민들을 마치 사적인 감정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자기 자신들의 현상에 진저리가 나고, 과거와의 원수가 되고, 미래마저 박탈당한 우리들은, 마치 인간적인 정의나 증오 때문에 철장 속에 갇힌 신세가 되어 버린 사람들과 똑같았다. 결국 그 견딜 수 없는 휴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상상을 통해서 다시 기차를 달리게 하고, 악착같이 침묵만 지키고 있는 초인종을 연거푸 울림으로써 기간을 가득 채우는 길뿐이었다.

 

그들은 까닭 없이 괴로워하거나 까닭 없이 희망을 품는 것이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른 채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일이 사람에겐 흔히 있는 법이니 말이다.

 

불행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일면이 있다. 그러나 추상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할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추상과 대결해야 한다.

 

추상과 싸우기 위해서는 추상과 약간은 닮을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페스트가 어느 날엔가는 사라져 버릴 불쾌한 방문자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단 찾아왔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오랜 시일을 두고 시달리다보니 사람마다 심장이 무뎌져 버렸는지, 마치 신음 소리가 인간의 타고난 언어라는 듯이 아랑곳하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가거나 그 곁에서 살고 있었다.

 

"이렇다 할 확신도 없이 그냥 관리들이 하는 방식대로 모집했던 거겠죠.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상상력입니다. 그들에겐 결코 이 재앙의 규모에 맞설 만한 능력이 없어요."

"신이 그렇게 침묵하고만 있는 하늘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 주기를 더 바랄지도 모릅니다."

 

"이 페스트가 선생님에게는 어떠한 존재일지 상상이 갑니다." "알아요." 리유가 말했다. "끝없는 패배지요."

 

"뭣 때문에 이런 일에 발 벗고 나서지요?"

"나도 모르죠. 아마 나의 윤리관 때문인가 봐요."

"어떤 윤리관이지요?"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역사상 둘에 둘을 보태면 넷이된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죽음의 벌을 받는 시간이 반드시 오는 법이다. 

 

"제일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페스트가 생겼으니 막아야 한다는 건 뻔한 이치입니다. 아! 만사가 이렇게 단순하면 좋으련만!"

 

"천만의 말씀. 함께 사랑하든가 함께 죽든가 해야지. 그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어. 그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내가 한 일입니다.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 말입니다."

 

"인간은 오랫동안 고통을 참거나 오랫동안 행복해질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가치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3부)

 

'항상 나보다 더 부자유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무렵에 품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을 요약하는 표현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사회는 날마다 죽은 사람들의 사회에 설 자리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판이었다.

 

우리의 도시에서는 이제는 거창한 감정을 품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은 단조로운 감정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절망에 습관이 들어 버린다는 것은 절망 그 자체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4부)

 

(아주 어리석은 생각도 아니지만), 어떤 큰 병 또는 심각한 번민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그와 동시에 다른 모든 병과 번민을 면제받는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성싶었다.

 

"왜나하면 암 환자가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은 본 적이 없으실 테니까 말이에요."

 

"사망자들이랍니다. 밤사이에 생긴 사망자들이죠"

"우리에게 남은 일은 숫자 계산뿐입니다."

 

"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고 있어요.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 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악 그 자체 안에서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서, 명백히 필요한 악이 있고 또 명백히 불필요한 악이 있다.

 

"성직자에겐 친구가 없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신에게 맡겼으니까요."

 

내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사형선고라는 기반 위에 서 있으니, 그것과 투쟁함으로써 살인 행위와 싸우겠다고 생각했어요.

 

최소한 나로서는 그 진저리 나는 도살 행위에 대해 단 한가지라도, 오직 한 가지라도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절대로 거부하겠다고요.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더 피곤한 일입니다. 

 

"나는 어느 경우에는 희생자들 편에 서서 그 피해를 되도록 줄이기로 마음먹는 것입니다. 희생자들 가운데서 나는 적어도어떻게 하면 제3의 범주, 즉 마음의 평화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탐구할 수는 있습니다."

 

"물론 그건 공감이죠."

 

(5부)

 

"고마워요. 나는 죽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싸워 보겠어요. 그러나 지는 판이명 깨끗하게 최후를 마치고 싶어요."

"아니요."라고 리유는 말했다. "성자가 되려면 살아야죠. 싸우십시오."

 

인간이 페스트나 인생의 노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에 관한 인식과 추억뿐이다.

 

삶의 체온과 죽음의 이미지, 그것이 바로 인식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언제나 욕구를 느끼며, 가끔씩은 손에 넣을 수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가끔씩은 기쁨이라는 게 찾아와서 인간만으로, 인간의 가난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사랑만으로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보람을 주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페스트가 대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인생이에요. 그뿐이죠."

 

노인의 말이 옳았다. 인간들은 늘 똑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힘이고 순진함이기도 하다.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운 것만으로도,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해 두기 위해서,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쓸 결심을 했다.

 

(작품해설)

 

1947년 소설 <페스트>가 출간되었을 때 른네 살의 작가 카뮈는...

 

현실 경험의 신화적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가장 주요한 모범으로 삼게 될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을 정독하고 노트를 한다. 멜빌은 카뮈의 창조를 상징과 신화의 차원으로 승격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대응 방식은 대체로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1) 기자 랑베르의 '도피적 태도'

(2) 파늘루 신부의 '초월적 태도'

(3) 이 작품의 주된 윤리적 선택인 '반항'이다.

 

치료는 곧 반항이다. 죽음의 질서를 창조해 놓은 신, 즉 '침묵하고만 있는 하늘'만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싸우는 것이 더 합당한 일이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카뮈는 타루나 리유 혹은 그랑의 '영웅주의'보다 랑베르의 '행복에 대한 강한 욕구'를 앞세우고 있는 것이다. 

 

'반항' 속에는 '행복에 대한 조바심'이 전제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 자평 ] 조심하자!. 카뮈에 전 작품을 읽어야 하는 욕망의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이는 것일 수 있다.

 

2019년 1월 코로나19 국내 첫 확진자가 나온 후 국내 확산될 즈음에 읽었을 것이다.

2022년 2월 재독할 당시 코로나19는 변이 바이러스까지 나오면서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역시 걸작은 걸작이다. 개인의 체험과 상상만으로 이런 글들을 쏟아낼수 있을까?

 

재독을 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아래 두 권의 책을 훑어 보게 되었다. 

역시 코로나와 Post-코로나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과 공통점은 약간 있었다.

다만 자칭 세계적인 미래학자라는 분들의 상상력이 소설가 하나 보다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분들의 허접한 책을 읽는 시간에 <페스트>를 한번 더 읽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에 훑어만 보고 지나갔다.

 

한 분은 한국과 아시아를 대표하는 미래학자로 '위드 코로나, 긴축, 미중 패권전쟁 3라운드, 기후변화 위기, 미래 기술'로 미래를 전망하고 있다. 뭐 여기 저기서 많이 보고 듣는 소리라 크게 특별할 것이 없어 보여서 Pass....

한 분은 예전에 많이 읽었던 독일의 미래학자로 유럽 최고의 미래학자란 분의 책이다. 이제 이런 것들에  쓸데 없는 돈,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어짐에 감사하고 Pass..

 

(세계 문학 전집을 읽고 있습니다 by 김정선)

 

카뮈의 소설을 읽다 보면 서술자가 흥미롭다고 느낄 때가 많다. 뭐랄까, 윤리적이라고 할까. 

서술자에게 윤리라는 덕목을 요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첫손에 꼽고 싶은 서술자는 단연 카뮈 소설의 서술자다.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어느 인물에게도 쉽게 스며들지 않고 들뜨지 않는데다 인물들을 극적으로 몰아붙이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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