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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단어/50대 ~

광장 by 최인훈

비즈붓다 2021. 5. 15.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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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일역판 서문)
그대로 세상은 버티고 있다.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짐작을 가지고 살고 있건 아니건, 아롱곳없다. 그럴 때 사람은 산다느니보다 목숨을 이어간다는 말이 옳겠다. 다시 말하면, 초목이나 짐승처럼, 알지 못하는 힘에 밀려서 때와 공간을 차지한다. 그런 삶을 탐탁지 못해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짐작을 알아내보려고 애를 쓴다.

그저 막연히, 산다고 절로 풀릴 숙제일리 없지만, 어쨌든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소설이 아니라 역사가 들어간다.

(1961년판 서문)
어떤 경로로 광자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대중의 광장이다. 인간은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서문)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시다.

(본문)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바다는 그 쪽에서 활싼 펴진, 눈부신, 빛의 부채다.

먼 옛날 그의 초라한 삶에서 그래도 무겁다고 해야 할 몇 가지 일들이 다가올 때도 그렇더니.....애인은? 그 말이 아직 이토록 깊고 힘센 울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 무거움이라...
---> 최인훈선생님이 이 소설을 출판한 해는 1960년도 이다. 20여년이 지난 후 1984년 체코의 한 작가가 또한 사랑과 삶을 무거움과 가벼움이란 주제로 다룬 소설을 출판한다......'Nesnesitelná lehkost bytí'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자동차 이름과 카메라 이야기와 미국에는 높은 집이 많다는 소리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사람의 본보기며, 삶의 새로운 틀을 가져온 옮김꾼이란 일은 엉터리 같기만 하다.

비평가란, 자기만의 박래품이라는 망상에 걸린 불쌍한 미치광이의 발명이지요. 이런 광장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진 느낌이란 불신뿐입니다. 그들이 가장 아끼는 건 자기의 방, 밀실뿐입니다.

몸의 길은, 으뜸 잘 보이는 삶의 길이다.

좋은 철
궁리질 공부꾼은
보람을 위함도 아니면서
코피를 흘리는데
내 나라 하늘은
곱기가 지랄이다.

"저는 가끔, 나이 많은 사람을 보면, 이런 생각을 해요. 제 손으로 목숨 끊지 않고 저 나이까지 살아냈다는건 어쨌든 장하다구"
"장한 게 아나구 할 수 없이 산 것이겠지요."

너무 큰 일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내친 말을 하고 있다. 하느님의 문서라도 보고 온 사람들처럼, 철학이란 물건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면, 정말 알고 있는 것보다 목소리를 더 높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 WoW. 멋진 지적....70년이 지난 오늘에도 통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보고지라는 소원이, 우상을 만들었다면,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몸이란, 허무의 마당에 비친 외로움의 그림자일 것다.
---> 지금은 구하기가 어려운 백석 박경진선생의 초기 책에 같은 해석들이 있다.

커다란 외로움이 던지는, 이 누리는 그 큰 외로움의 몸일 거야. 그 몸이 늙어서, 더는 큰 외로움의 바람을 짊어지지 못할 때, 그는 뱄던 외로움의 씨를 낳지. 그래서 삶이 태어난 거야. 삶이란, 잊어버린다는 일을 배우지 못한 외로움의 아들.

어떤 사람에게 미안한 일을 했다는 생각은, 이긴 사람의 느낌이다.

가난이 원수지
이다지 목숨에 치사스러움은

명준이 써오던 말들의 뜻이, 모조리 고쳐져야 했다. 새말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 조지 오웰의 <!984>에서도 언어가 중요하다.
---> 비트겐슈타인이나, 오웰이나 최인훈선생님이나 같은 것을 느끼셨나 보다.

혼자서 운다는 일은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의젖한 몸가짐이었다. 눈에 보이건 안 보이건 사람은 우상 앞에서만 운다.

여기도 기를 꽂을 빈터는 없었다. 위대한 것들은 깡그리 일찍이 말해진 후였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보다. 어김없이 움직이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 오늘날 이런 것이 조직에 없다고 할 수 있을까?
---> 국정철학이니, 조직 비전이니, CEO 경영 방향이니 우리 밥벌이 몸짓들은 남의 언어를 외우기 바쁘다....

대중은 오래 흥분하지 못한다. 그의 감격은 그때뿐이다. 평생 가는 감정의 지속은 한 사람 몫의 심장에서만 이루어진다.

"값이 있어서만 사람이 행동하는 건 아닐세."..."값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도 행동할 수 있어."

현대 무기라는 매개물은, 싸움터에서조차 몸과 몸의 만남을 가로막는다....지지는 햇볕 아래 멀리 울리는 포소리를 들으며 참호에 서 있으면, 이 거창한 죽임의 마당이, 문득 자기와는 동떨어진 먼 이야기인 것만 같은 때가 있었다.
---> 내 경험으로도 1990년 CNN이 전쟁을 컴퓨터 게임처럼 만들어 버린 기억이 있다.

---> 2021년 5월. 미얀마와 가자 지구의 죽음은 스마트폰으로 볼 때 영화와 같아 졌다. 멀리서 앉아서 보면 이것이 영화의 한 장면인지? 가상의 장면인지? 진짜 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미디어는 인간을 무디어 지게 했고, 잔인학 만들었다.

"왜 이런 전쟁을 시작했을까요?"
"고독해서 그랬겠지."
"누가?"
"김일성 동무지."
"자기가 외롭다고 남을 이렇게 할 권리가 있나요?"
"권리? 권리가 있어서만 움직인다면 벌써 천당이 왔을 거야."

"죽기 전에 부지런히 만나요.네?"

어떤 사람이 어떤 사회에 들어 있다는 것은 풀어서 말하면, 그 사회 속의 어떤 사람과 맺어져 있다는 말이라면, 맺어질 아무도 없는 사회의, 어디다 뿌리를 박을 것인가. 더구나 그 사회 자체에 대한 믿음조차 잃어버린 지금에. 믿음 없이 절하는 것이 괴롭듯이, 믿음 없이 정치의 광장에 서는 것도 두렵다.
---> 그래서 그 조직 출신이 그 조직을 개혁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 제도와 절차는 개혁할 수 있지만, 자신과 수년을 같이한 그 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 분노와 좌절, 희망과 절망을 모두 함께 개혁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과의 세월을 개혁해야 하는 것이다.....강하고 모질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개혁은 힘들기 이전에 슬픈 것이다.

미친 믿음이 무섭다면, 숫제 믿음조차 없는 것은 허망하다.

북녘에는, 이 자유가 없었다. 게으를 수 있는 자유까지도 없었다.

사람이 풀어야 할 일을 한눈에 보여 주는 것 - 그것이 '죽임'이다.

결국 조언이라 쓸데 없는 것, 사람에게 조언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하느님만이 조언할 수 있지만 그도 지금은 지쳤다.
---> 난 1000% 동의하여 그렇게 잘난 동기부여/코칭/자기개발/마인드코칭 등 등 전문가들이 이상하게 싫다.

마담도 웃고 만다. 마담도, 겪고 난 사람이다.


(사랑의 재확인 - <광장> 개작에 대하여 ) 김현

1960년은,,,,소설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광장>의 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벌써 다섯번째로 고쳐쓰고 있는 것이다.

---> 매우 특이하고 감동적이고 흥미로운 점이다.
만일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몇 번에 걸쳐서 고칠 수 있다면, 어떻게 고쳤을까?

이전의 판본에서는 그 두 마리의 갈매기가 윤애와 은혜를 다 같이 표상하고 있었지만, 전집판에서 그 갈매기들은 은혜와 윤애 대신에 은혜와 그의 딸로 표상되고 있는 것이다.

이명준을 편안하게 은혜 = 어머니 = 바다로 보내기 위한 것이다.

그 이전의 판본에서 작가는 이명준이 그와 그의 애인들과의 과거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전집판에서 그는 그에게 기쁨을 준 바다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의 뿌리를 받아준 바닷속으로 그는 그의 몸을 던져 들어가는 것이다. 바다는 단순한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던져 뿌리를 내려야 할 우주의 자궁이다.

[ 자평 ] 읽어야만 왜 읽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묵직한 절필, 사랑의 절창

현대 한국 소설을 논할 때 꼭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소설....
꽤 오래 전에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사 놓고, 책장에서 밀린 숙제처럼 나를 째려보던 광장을 읽었다.

80년대 대학생활을 한 우리 형/누나들 세대는 광장 전체를 읽은 세대다.
(팀원들에게 물어보니) 90년대 후반 수능세대들은 시험 때문에 광장을 일부 지면만 공부한 세대라고 한다.
(물론 읽은 친구들도 꽤 있겠다)
나 같은 똘이장군 학력고사 세대는 대체로 최인훈선생님의 광장을 읽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읽은 1989년판 <문학과지성사>의 머리말외에 2010년 작고하시기 전에 짧은 머리말을 또 쓰신 것 같아 그 부분은 따로 새로운 판본에서 찾아 읽었다. 본문에서는 어디를 교정하셨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김훈선생의 친절한 해설로 어디가 어떻게, 왜 바뀌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명준, 강윤애, 그리고 은혜(특이하게 성이 나오지 않는다)라는 세 사람, 두 쌍의 얽히고 섥킨 인연...
그리고 남/북의 이념, 바다, 갈매기가 짝을 이루며 밀리지 않는 주인공으로 나온다.

최인훈선생님이 이 소설을 20대 중반에 썼다고 하는데.....읽을 수록 기가막힌다.
문장의 아름다움이야 젊은 사람들도 흉내낼 수 있다지만, 인생의 깊이를 녹여내는 문장은 그 젊은 시절에 어찌 쓸까나...

내가 이 소설을 20대에 읽었다면 50대인 지금의 감동만치는 않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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