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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 ]

 

이 사람의 영혼이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 그 어둠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어둠에서 밝은 태양 아래로 나와 눈이 부신 것인지를 물을 것이다...

- 플라톤의 국가에서 -

 

오랫동안 쏘다니면서 내가 왜 그토록 놀랐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처음으로 그들의 실체를 본 것이다. 

그들은 신도 영웅도 아니고, 그저 자신들의 일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두 사람에 불과했다.

--> 어릴때 읽었던 위인전에 위인이 나는 내가 생각했던 위인하고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 가면서 알게 되었다.....사회가 강요한 위인임을 알았을 때 이런 느낌이었다.

 

이 지성이 나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사이에 벽을 쌓고 나를 가게에서 추방했다. 그래서 나는 전보다 더 고독해졌다. 앨너전을 다른 쥐와 함께 놀던 커다란 상자로 돌려보내면 어떻게 될까? '그들'도 앨저넌에게 등을 돌릴 것인가?

 

정신지체자에게도 인간의 감정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니머도 그들을 보고 웃는 사람들과 같은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도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해력이나-이런 말을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 관용이라는 것은 아직 미발육 상태야.

 

내 운명이 내가 예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훌륭한 사람들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완전한 답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감정적인 문제는 지적인 문제처럼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소

 

나는 미로 속에서 내가 선택한 길이 현재의 나를 존재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한 개체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존재양식이기도 하다. 많은 존재양식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으리라.

 

나는 지능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배웠어요....나는 당신들이 간과한 한 가지를 깨달았어요.

인간적인 애정의 뒷받침없는 지능과 교육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이오

 

인위적으로 향상된 지능은 그 향상된 양에 비례하는 속도로 저하된다.

 

내가 배운 모든 지식, 내가 마스터한 모든 언어를 두고 현관에 서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를 향하 할 수 있었던

말은 "엄마아아"라고 하는 외마디뿐이었다. 어미 젖에 매달리는 목마른 어린 양처럼.

 

 

[ 자평 ] 읽는다. 정리한다. 소장한다. 아들도 20년 읽을 것이다. 

 

번역자의 후기가 너무 멋지다.... 소설을 읽으면서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 찰리가 최초로 독파하는 소설로서 <로빈슨 크루소>를, 끝 부분에서 읽기 어려운 작품으로 <돈키호테>를 들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앞엣것은 찰리라는 오직 하나의 종족의 실험적 탄생을 알리기 위한 '고독'이라는 복선이고,

뒤엣것은 바로 그와 같은 장대한 구상이 실패로 끝나 '헛수고'가 된다는 암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구상에 내부에서 개인의 가능성이 종족의 가능성이라는 뉘앙스를 내포하는 점에서 <앨저넌에게 꽃을>은 심리의학적인 요소를 띠게 됩니다."

 

우리는 한 객체로서 이 소설을 찰리와 같은 작은 경험들이 있다.

한 인간이 지능적으로 성숙해 갈 때......

사춘기를 통해 나를 둘러썬 어른이라는 사회의 이런 저런 모순을 본다. 한심하다....반항한다.....이해한다....적응한다....

 

만일 자의식을 가진 최초의 인공지능(강한 인공지능하는 것)이 생긴다면

아마 '그/그녀/그것/그것들'(여튼 뭐라 부르든) 이 소설 속 찰리처럼 느끼게 될 것 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지식과 지능의 향상과 더불어 감정과 공감능력 등이 같이 성장/성숙하지 않을 때 어떤 문제가 상상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저 똑똑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이고 고독일 수 있는지.......

이 책은 내내 이런 질문을 던져 주었다... 

 

"무엇을 위해, 뭘 알고자 하는 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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