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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나의 은돈은,형식적이고 사교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사절입니다.돈 '버는 일'에 대한 사절입니다.진리 '논쟁'에 대한 사절입니다.

 

---> 멋진 선언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윌든>이 생각나는 구절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내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 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 직면해 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인류가 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존재에서 소유로 온 길을 되짚어 다시 존재로 되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 읽자 마자 생각나는 책..

 

 

세상의 본질이 무아와 연기임을 명백하게 이해하고, 자기 삶에 적용하여

생로병사에 걸림이 없게 되며, 이에 관련한 더 이상의 공부가 필요없게 된 사람이다. 나는 지금 그렇다.

 

깨달음에는 경지가 없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의 능력에는 경지가 있을 수 있다.

깨달음 사람이 갖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대응하는 능력의 차이가 있다.

 

선정과 해탈이 깨달음의 경지는 아니지만 깨달은 사람의 경지일 수는 있다.

---> 100% 동의하며 그래서 <즉문즉답>,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방식을 잘못 되었다.

---> 지혜를 가진 자에게 물을 말이 따로 있고, 지식이 있는 자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따로 있다.

---> 즉문즉답에서 묻는 대부분의 질문은 지식이 있는 분에게 물어야 하는 것이다. 

--->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태와,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는 다르다. 

 

무념에 든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생각이 멈춰진다는 것이다.  생각 없이 살지는 못한다.

 

 

나와 세상이 실체성을 갖고 완벽한 세계로 등장할 수 있게 된 기반은 인간 전두옆의 능력, 즉 생각의 마술이다.그러나 전두옆이 멈춘다고 무아와 연기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각에 기반하여 구축된 세계에서는 생각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생각은 인간의 뇌가 세상을 해석하고 이용하는 제한적인 시스템이며 생각이 인식하는 세계는 인간이 우주를 받아들여 활동하는 유일한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에 대한 논리적인 이해는 깨달음과 깨달은 사람을 구분하는 일부터 시작된다.깨달음은 무아의 비연기적인 사건이고 깨달은 사람은 연기적인 결과물이다.

 

생각없이 살아도 된다는 확신이 생긴다....전적으로 수용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모든 현실들이 지금 이대로 완벽하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닥쳐온 일을 마칠 뿐 뭔가를 조작하고 대비하지 않게 살게 된다.

 

몰라서 불안한 것이 아니라 불안해서 알고 싶은 것이다. 불안의 이유를 모름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다.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에게 적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오류를 기반으로 한다. 그런 시도는 당연히 참나(진여)를 추구하게 된다. 

실제로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완성된 이상체로서의 유아를 추구하는 것이어어 현실에서는 그렇게 시공을 초월한 참나가 달성된 바 없다.

 

'나'는 인간 유기체의 독립적인 기능이 아니라 인간 유기체의 사회적 생존의 도구인 것이다.

'나'는 사회의 한 기능으로 기억과 생각을 기반으로 존재한다.

 

배역에 몰입하여 살더라도 생각이 작동될 때마다 각성이 되기만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무의식적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한 생각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무의식의 매커니즘을 이해하라는 것이지, 온통 깨어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  설지스님의 책에도 비슷한 주장이 있다.

 

대부분의 생각들이 논리적인 전개이기보다는 심리적인 중얼거림이며 끊임없이 자기 확인, 경계, 검열 등이다.

 

--> 비슷한 주장을 하는 책이 또 있다.

 

정리하자면, 생각 사이의 틈을 벌리는 것이 핵심이다.

'개껌 던지기'로 맛보기를 해서 생각의 이해가 따라 준다면, 그 다음에는 '깨껌 물기'를 해서 사고의 패턴(회로)에 생각의 여백이 자리를 잡도록 만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늘 생각의 여백이 의식되는 것이다.

 

진리나 깨달음의 부합성은 안심을 기준으로 점검해야 한다.

지금 완전히 안심되고, 명백하여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지 확인해야 한다.

안심은 불변의 결과이므로 점검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일며되, 되려고 노력할 이유나 필요도 없다.

 

스승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스승으로 나서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불교에서의 인가제도는 깨달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능력에 대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 2004년 자꾸....웬지...어떤 분이 떠오른다..

 

무아론은 '나'의 없음이 아니라,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의 실체가 단지 생각의 다발임을 깨우치는 것이다.

'나', 사고지능, 생각은 모두 기능적 동의어다. 생명 현상과 에너지는 그 '나'에 갇혀있지 않다. 

사고지능 없이도 모든 생명체가 잘 살아가고 있다.

 

영사기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생각을 간헐적으로 꾸준하게 끊는 연습을 반복하여 새로운 습관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다...

일어나서 흐르고 있는 생각을 잠깐 끊는 것이다.

 

이해자랑이 앞서면 공에 빠지거나 허무주의에 멈출 위험이 있고, 

경험자랑이 지나치면 신비주의의 칼날을 휘드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마스터들이 동양의 위대한 가르침을 가져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소화하여 펼치고 있습니다.그에 반하여 동양은 여전히 신비주의의 그림자에서 숨어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되풀이하느라 시절이 저무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걸어온 과거의 궤적이 팔자이고 깜량이며 분수입니다. 사람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 궤적의 관성력을 저지할 만한 인과가 사람에게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머리에서 생각들이 흘러가는 것을 알아채고, 지금 꼭 필요한 생각이 아니라면 에너지를 주지 않아 끊기게 하는 것이다.

 

강박증과 조급증은 사회가 개인에게 심어놓은 사회적 장치일 뿐입니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당장의 행복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고 미래의 성과에 에너지를 쏟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 자평 ]  어떠한 선사들의 책보다, 많이 배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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