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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들

굿바이 카뮈 by 이윤

비즈붓다 2022. 12. 17.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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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어쩌면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은 사실에 대한 객관적 기술이라기보다, 상황에 대한 주관적 감정 판단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이성적,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어떤 이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투쟁과 그것이 만족되었을 때 엄습해 오는 권태 사이에서 마치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할 뿐이다. "   - 쇼펜하우어 

 

우리의 하루하루는 시지프스의 한 걸음 한 걸음과 같다.

차이라면 시지프스는 바위를 다시 굴려 올리기 위해 되돌아오지만, 우리는 이것을 자손들에게 넘긴다는 점뿐이다.

 

애초 영원하며 무목적인 활동이라는 악몽이 있었던 자리에서 우리는 이제 그 활동의 영원한 부재라는 지옥에 직면한다. 

 

해 파괴된다.

 

"한 시대의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다"라는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태제를 변용하면

"한 시대의 지배적 삶의 의미는 지배계급의 삶의 의미이다"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의미이 원천으로서의 욕망은 외부에서 주입된 사이비 욕망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온 욕망이어야 한다. 

여기에 그 욕망이 객관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라면 반성적 성찰을 통해 주체적으로 내면화될 필요가 있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에 가까운 의식을 얻고 그 의식을 통해 유한한 삶을 되돌아 볼 때, 세상은 하찮거나 부조리한 것 또는 무의미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는 부조리가 객관적 세계의 속성이 아니라 의식을 가진 존재가 자기를 외부에서 바라볼 때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문제임을 보여준다.

 

부조리는 세계의 속성이 아니라 의식이 자기의 외부에서 자기를 한계지어진 존재로 바라볼 때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 주관적 만족과 객관적 가치는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실체적 성분이라기보다는, 삶의 의미를 인식하려는 프레임에 가까운 것이라는 점이다.

 

폴 새가드가 <뇌와 삶의 의미>라는 책에서 밝힌 인생의 3대 의미는 바로 일과 놀이와 사랑이다.

자기보다 작은 것이 삶의 의미가 되기는 어렵다. "내 인생의 의미는 나의 가족이다"라는 말은 가능하지만, "내 인생의 의미는 나의 간이다"라고 하면 어색하다. 

 

"세계의 의미는 세계의 바깥에 있으며, 시공간 속에 있는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은 시간과 공간 밖에 있다."고 말한 비트게슈타인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나의 인생은 무엇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가지는가?  바로 삶을 둘러싼 세계이다.

의미의 의미를 삶에 적용했을 때, 인생의 의미는 나와 세계 사이의 관계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세계는 물리적, 생물학적, 사회적, 역사적, 생태적, 우주적 관계망이며, 

그 관계망 속에서 나의 포지셔닝을 구축하는 것이 내 삶의 의미가 된다. 

 

삶이란 세계-내-존재로서 자기 자신의 '포지셔닝'을 말한다. 

 

가치는 자기보존적이고, 의미는 자기초월적이다. 

가치의 보존, 즉 내부 질서의 통일은 보수이고, 가치의 초월, 즉 현재의 질서을 넘어 더 큰 가치를 향해 가는 것이 진보이다. 보수는 가치를 지키며, 진보는 의미를 추구한다. 노직은 전자를 고전주의로 보고, 후자를 낭만주의로 보기도 한다.

 

의미의 최종단계는 무의미하다기보다는 '의미 있음'과 '의미 없음'의 범주를 초월해 있다는 점에서 초의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한에 도달한 자에게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정확한 표현은 삶의 의미가 '있거나 없거나'가 아니라, '크거나 작거나'이다.

즉 디지털적인 것이 아니라 아날로그적인 것이어야 한다.

 

---> 서명원신부의 책과 같이 비판을 받을 만한 것은 받아야 한다. 

 

객관적 가치와 주관적 만족을 통한 자기완성이라는 귀납적 기준과 더 넓은 가치의 연결망 속에서의 자기초월이라는 연역적 기준을 통해 우리들의 다양한 삶의 형태에 대해 그 의미의 상대적 크기를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사람은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숲만 바라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가장 높이 나는 새는 가장 멀리 보지만, 낮게 나는 새처럼 저세히 보지는 못한다.

 

올바른 선택은 항상 총체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일 것이다. 

총체적 관점은 가치(한계 내부의 유기적 통합)와 의미(자기한계 초월)을 번갈아 추구하면서 

역동적 균형을 이루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큰 의미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 자평 ]  개기려면 베짱만으로는 안 된다. 이 정도 치밀한 고민과 배움, 분석과 사고가 있어야  읽은 시간이 고귀해 진다. 

 

이 책에도 삶의 달관한 사람의 전형으로서 '선사'들의 언급하기는 한다.

하지만 얼치기 선사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래 저래 훌륭한 작가 수준도 못되는 얼치가 선사들의 책봐는 삶의 의미를 알려주는 몇 배는 더 좋은 책이다.

내가 읽은 많은 선사들의 글은 허울만 좋은 많은 말일 뿐이었다. 수준이 선사가 아니고, 직업이 선사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저자가 우리 시대의 제대로 된 선사로 '스콧 니어링'을 언급한 것은 30대에 이 분에 빠져산 나를 돌아 보게 하는 고귀한 언급이었다. 나도 이 분 만한 선사가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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