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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언론이 원하는 것은 성공담이지, 실패담이 아니다. 성공담은 늘 영웅담이다. 이제 영웅은 사회적 정의와 도덕을 실현한 사람이 아니었다. 성공한 사람이 영웅이고, 성공 자체가 정의와 도덕적 가치이 현현이었다.

 

영웅 신화의 정점에는 글로벌 자본가들이 있었다. 주로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 같은 IT와  금융 분야의 자본가들이었다........그들은 온갖 악조건을 뚫고 성공한 인간 승리의 전범, 진정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한 인물, 예지력과 통찰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워런 버핏 같은 투기꾼이 '오마하의 현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듯, 자본가들은 경제적 구루이자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으로 위상을 갖게 되었다.

---> 누구라도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나쁘고 위험한 일이 아니다.

---> 하지만 존경과 숭배는 위험하다.

---> '누가 더 큰 자본을 빨리, 쉽게 모으는가?' = '인간의 뛰어남' ... 음 여기까지는 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 '인간의 지혜로움'으로 일치되는 것은 당연히 아닌데...

---> 2000년 이후 잘 나가는 Big tech기업들의 CEO 들을 좋아하는 것은 큰 탈이 없다. 하지만 존경하는 것은 위험하다. 

--->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우리의 '존경'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자본가의 혜안과 통찰에 감복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자본가들은 '지적 권위자'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인문주의란 '전복적 도전'과 거의 동의어다. 인문학적 사고는 반성, 회의, 비판이 핵심이다. 그러나 이 15년 동안 비판적 사유와 지성이 사회적으로 제고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기업 인문학은 비판 의식을 제고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 의식을 소거한다. 

 

기업 인문학은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목적(생존, 출세, 성공, 경제적 이익)에 복무하지만, 정통 인문학은 존재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인문학이라는 것이 본디 이익을 논하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은 거의 완벽하게 기업문화에 포섭되어버렸다. 

 

인문학자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 자기 연구를 소신껏 할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이 바로 인문학 위기의 실체다. 

 

신자유주의자 시대의 주된 통치 전략은 대중이 시간과 돈에 허덕이게 만들어 무기력, 무저항의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교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구체적인 방식은 이렇다.

첫째, 분할. 대학에는 교수의 종류가 참으로 많다....이유는? 단결된 교수 사회는 통제하기 어렵지만, 파편화된 교수 사회는 통제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가장 크다.

둘째, 서열화(차별화). 교수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서열화된다......지식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종류들 간의 격차가 클수록 좋다.....교수 사회 내부에 계급적 성격이 형성되면, 교수들은 각자 자기 계급 상승에만 몰두하게 된다.

셋째, 상화 약탈적 경쟁.....성과연봉제가 그렇다.....

넷째, 봉건제적 운영.

 

'신지식인'.....'시장 반응형' 고급 인력, 자본 친화적 지식인을 양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인문학은 자본과의 거리가 가장 멀고, 또한 태생적으로 자본에 대해 비판적이(어야)다.....철학이 자본과의 거리가 가장 멀고, 또 자본을 근저에서부터 비판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 이런 이유로 TV에 자주 나오는 인문학자는 인문학자라기 보다 '지식'을 파는 'Infortainer'다.

 

지식 융합을 요구하는 것도, 융합적 인재를 요구하는 것도 기업이고, '문제 해결 능력'이라는 것도 비즈니스와 관련된 해결 능력을 말한다.

 

학문 융합은 학생들로 하여금 넓되, 얕게 알게 만든다.....창의성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무엇 하나라도 깊이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연관 학문(주제)들을 알아나가는 것이 필요한데, 다중전공이나 융합학문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깊이 아는 것은 없는 채, 여러 가지에 대해 피상적으로 아는 방향으로 유도한다.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사상, 가치관, 철학도 있어야 한다. 

---> 이런 이유로 나도 '통섭'에 반대한다. 정확히 말하면 '개인이 통섭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 정확히 말하면 통섭적 개인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전문 개인들이 모인 '조직적 통섭'을 지향해야 한다. 

---> 소통과 협업으로 통섭을 이루기가 어렵다고,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하면 되겠다는 생각은 바보.....

 

<하류 지향>에서 우치다 다쓰루는..."어찌 보면 인재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기업이 원하는 뛰어난 인재는 주변과의 연결점이 없는 사람, 뿌리가 없는 사람인 것이다...글로벌한 인재란 일본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 일본 내 커뮤니티가 필요 없는 사람, 극단적으로는 당장 일본 열도가 붕괴하고, 원전이 재폭발해도 도망가면 그뿐일 사람들인 것이다." 

 

성화 속의 신이나 성인에게나 나타날 법한 후광에 휩싸인 애플 로고, 이것은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이 단순한 제품 설명회나 제품 시연회가 아니라, '종교적 퍼포먼스'라는 것을 말해준다. 잡스에게 애플 로고는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그 로고에 후광을 비춘 것은 신의 지위를 넘보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 것이라 봐도 무리가 없다. 그 로고 앞에서 잡스는 인류의 삶 전반을 변화시키는 자신의 전능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변화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을 통해 대중을 믿음이 영역, 종교의 영역으로 인도했다.....인문학을 잘 이용하면 자본가도 존경의 대상, 숭배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지적 권능을 갖고 대중을 지배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기술이나 경영이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것은 하나마나한 말이다. 기술이나 경영뿐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제도, 문화, 체계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문제는 비인간적인 문제들을 양상하는 신자유의적 체계 형성에 이바지하고, 그를 통해 엄청난 부와 권력을 만끽하고 있는 초국가적 자본가가 이런 주장을 했다는 점이다. 크게 보면,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 그것을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꼴이다.

---> 이런 측면에서 나를 어떤 개그맨보다 웃게 만들었던 분이 (고)이건희님이다.

지금의 학계에서는 '테크놀로지를 응용한 상품 소비의 증가를 인간의 해방, 인류의 진보인 양 찬양하는 인문학자'들이 넘쳐난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어령이다.

 

잡스를 언급하면서 정부의 장기적 지원을 촉구하는 것은 지원금을 위해 본연의 인문 정신을 버리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철학자 고병권은 이런 비판을 한 적이 있다. "인문학자들이 처방을 내리는 자가 아니라 징징대는 환자 행세를 하면서 나를 키워주면 내가 창조 경제를 키워주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어쩌다가 인문학이 하나의 이익단체처럼 되었다." 현실이 이렇다.

 

융합형 인재.....두 분야의 지식을 이용해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이윤을 올리는 인재를 말한다. '자본 증식에 기여하는 인간', 거기에 융합형 인재의 핵심이 있다......비판적 이성 능력을 온전히 상실한 사람은 본래의 인문학 관점에서 보면 '인재'가 아니라 '둔재'다.

 

'아이폰을 만들자는 인문학이 아니라 아이폰을 성찰하는 인문학이 절실하다.' 

 

지금 유행하는 인문학은 '본격 인문학'이 아니라, 자본권력이 추동한 '기업 인문학'이다. 돈벌이에 복무하는 '기업 인문학'은 물질주의, 과학기술주의, 경쟁체계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적극 포용하고 추동한다. 인문학 열풍과 함께 물질주의, 과학기술주의, 경쟁체계가 심화되는 이유다.

 

신영복, 김상조, 김호기, 정승일 등도 강연했다.....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런 지식인들도 불러서 이야기를 듣다니, 역시 일등 기업 삼성은 다르다!"... 삼성이 저명한 좌파 지식인들을 불러 강의를 듣는 것은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에 대한 관리 차원에서 좋은 방법이다.......이보다 중요한 것은 삼성 사장단을 대상으로 강연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후 자신의 몸값을 올리는 이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삼성 사장단을 대상으로 강연했다는 사실 자체가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는 준거로 인식된다. 좌파 지식인이라 해서 이런 자부심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진보 지식인의 기업 인문학 참여는 '진보의 외연 확장'이 아니라, '자본권력의 영토 확장'으로 보는 것이 옳다. 결국 변하는 것은 자본가나 자본권력이 아니라, 좌파 지식인이나 본격 인문학이다.

---> 나는 이 문자 사건 이후 김호기, 송호근 씨 책은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되었다.

---> 글쎄. 뭐 인간 사회에서 주고 받음...그리고 감사와 덕담은 이례적이지 않으며 이 정도가 죄는 아닐텔지만..이 분들은 평소에 쓰고 말했던 글과 말에 너무나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하나의 행동으로 미루어 그 뒤를 짐작해 볼 수 도 있겠다..

---> 역시 인간을 좋아하되, 함부러 존경하면 마음에 상처를 입는 법...

신영복 교수의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관계없이, CEO 인문학은 야만의 자본주의에 '인간의 얼굴'을 달아주는 꽃장식이 된다....'누구와' 더불어 '어떤' 숲을 만들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면, '더불어 숲'이란 멋진 말은 추한 사기극의 화려한 포장지가 될 수 있다.

---> 신영복 "삼성에 지금 필요한 것은 변방의 창조성" (edaily.co.kr) (2014년 10월 1일)

 

기술은 사람을 늘 이긴다 (나는 5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사람이 기술을 이기는 것을 본 적입 없다.)

 

본래 인문학은 자신은 물론 타인도 대상화하지 않는다. 인문학은 인간 소외 자체에 저항한다. 그러나 기업 인문학은 반대다. 기업 인문학의 관심은 타자는 물론 자신까지도 어떻게 하면 이윤과 성공이라는 목표를 이해 이용해 먹을 수 있을지에 집중된다. 기업 인문학은 철저한 소외의 매커니즘을 갖는다.

 

기업의 실존적 문제에 대해 질문하지 않으려면, 기업을 위해 복무하는 자신에 대한 실존적 질문도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기업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질문은 던지지 않는 것은 일종의 '정언명령'이 된다. 

---> 질문.....그렇다.... 이런 질문을 자주 하게 해야 하는데.....이제 할 시간이 없다..

 

영화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엑스트라)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인공의 생존과 성공의 걸림돌로 여겨질 뿐이다......신자유주의적 이데올리기다. 대중이 자신도 주인공처럼 경쟁을 통해 1%도 안 되는 생존과 성공을 거머쥘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안전하게 사람들을 지배하게 된다.

 

철학은 텍스트를 대중이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누군가가 개입할 여지가 큰 학문이다. 이 부분에서 자본이 끼어든다. 텍스트와 대중 사이에 끼어들어 텍스트들을 기업 친화적으로, 비즈니스 친화적으로 해석해 전달한다.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도 "고전이란 해야 할 말을 아직 다 하지 못한 책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부족한 책이다. 그 부족함은 '지금 여기서' 공부하는 사람의 주체적 독해와 사회학적 해명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것이 결여된 인문학 공부는 자칫 우민화의 과정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결국 그라민은행이 한 일은 주변부 빈민들을 빛의 노예로 만들어 착취함으로써 선진국의 배만 불린 것이었다. 그것이 사회적 기업 그라민은행이 행한 '박애'의 실체였다.

---> 2000년 중후반 그라민은행은 사회적 기업으로 엄청 떠들던 성공사례였다....<가난 없는 세상을 꿈꾼 은행가>, <착한 자본주의를 실현한 기업> 등 등

---> 외국에서는 2012년, 국내는 이런 원서들이 2015년 즈음 이 사례의 허상이 까발려 지기 시작했다.  저자는 "소액 대출이 사회적 책임을 인식한 투자라는 외양만 덧입었을 뿐, 실상은 가난한 이들을 약탈하는 대부 사업에 불과하다."고 썻다. 

---> 또 다른 책의 저자 라미아 카림은 "그라민은행을 대표로 하는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은 빈민을 상대로 자본주의의 이윤을 확대할 뿐이며 자본주의의 대안은 커녕 빈곤의 악순환을 더 가속화하는 역할을 해왔다.....방글라데시의 빈민 여성들은 오히려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가정과 마을공동체 안에서 폭력에 노출되었으며, 결국 자본의 맹렬한 공격 앞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곧 그라민은행을 대표로 한 마이크로파이낸스 기관은 빈곤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파는 기업일 뿐이며 빈곤을 더 악화시키는 역할만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마이크로파이낸스의 성장이 사유화를 가속화시키고 국가권력을 약화시키며 공공 분야 투자를 축소한다."고 썼다.

 

자본가가 국고로 환수될 돈으로 자선을 하는 것은 정부가 갖는 부의 재분배 권한을 재단이 일부 이양 받는 것과 같다. 정부는 이중으로 배임행위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걷어야 할 세금을 걷지 않는 것, 또 하나는 부의 재분배 권한을 자본가에게 넘기는 것이다. 

----> 글을 쓰는 오늘 자(2021년 2월 8일) 이런 기사가 떴다.

---> 전문]카카오 김범수 통큰 기부 약속 ”재산 절반 이상 내놓겠다”.... 재산 10조 넘는 김범수 의장 .5조원 이상 사회에 기부하기로

 

그저 자신들이 정한 윤리적 기준을 자신들이 알아서 지키도록 노력할 테니, 믿고 지지해달라는 것이 전부였다. 자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국가나 공동체에 의한 규제다. '규제받기 전에 우리 스스로 개혁하고 정화하겠다'고 나서면, 강력한 규제의 필요성에 의한 대중의 관심은 약화되고, 규제 법안은 제출되거나 통과되지 않는다.

 

'기업 윤리', '윤리 경영' 같은 말도 마찬가지다. 기업은 도덕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다. 이런 말들은 기업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도덕적이 될 수 있음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NGO들은 더는 기업과 싸우지 않는다. 대신 공정무역, 친환경 상품 소비를 촉진한다. 국가와 기업을 상대로 투쟁하고 저항하는 대신 국가/기업과 제휴하고, 그 후원을 받으며, 그 자신의 성격을 변화시켜 기업처럼 운영된다.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갖고 어떤 정치적 결정을 하는 것은 철학을 요하는 일이다. 그러나 기업들이 이런 철학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기업인들은 대개 눈앞의 가시적 이익에 연연하는 경우가 많다.

 

기부와 자선에는 중요한 정치적 기능이 숨어 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업에 의존해 살아가도 괜찮겠다'는, 혹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생각과 생활방식을 만들어낸다. 사람을 길들인다는 말이다.

 

빅 히스토리는.....오히려 무지를 조장한다. 우리가 처한 구체적인 현실을 내팽개치고 우주의 기원으로 달려가기 때문이다....빅 히스토리는 우주의 기원부터 알지 못하면 우리라는 존재, 우리가 처한 문제에 대해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협박한다....인간이 우주에서 나온 것은 맞다. 그렇다고 해서 우주의 기원부터 알아야만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이 6장. '기업 인문학의 과학 담론'을 읽으면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 평소에 과학책을 의도적으로 읽고, 의도적 좋아하는 나에게 회초리를 때리신 겪이다.

---> 나는 눈뜨고 정신이 베어져 멍청이가 될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민중의 정치의식이 첨예화되는 것은 자본권력이 가장 경계하는 바다. 빅 히스토리는 과학적 지식을 내세워 사람들을 비정치, 나아가 반정치로 이끈다.

----> 이것이 원래 누구의 말이나 글인지 모르겠으나, 보통 노무현대통령의 말씀으로 알고 있는 문장.....

 

유발 하라리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을 개선하기보다 제약회사가 만든 항우울제를 복용하거나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 자기 생각과 기분을 조작하는 데 몰두하라고 조언한다.

 

자연과학적 세계관은 가치판단의 객체로서 자신을 열외시키고, 다른 모든 존재와 사건에 대한 가치판단의 유일한 주체로 자신을 설정함으로써 전도된 인식 구조를 드러낸다. 자연과학적 세계관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의 측면이 아니다. 바로 그 자신에 관한 인식의 측면이다.

----> 이는 섬뜩하고도 매우 중요한 말이다. 

 

과학기술의 지배력은 과학기술의 발전은 무조건 선이라는 명제, 즉 과학기술에 대한 교조적 숭배에서 나온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적극적으로 인류가 마땋이 나아가야 할 길이고, 소극적으로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회 생물학이 생물학을 중심으로 인문사회과학을 흡수하려는 시도였다면, 빅 히스토리는 자연과학 전체를 동원해 인문사회과학을 지배하려는 프로젝트다. 

 

빅 히스토리 서사는 오늘날 우리가 과학기술 사회를 살게 된 것이 필연인 것처럼 기술한다.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자극한다. IT혁명이 시작될 때만 해도 장미빛으로 포장된 미래로 사람들을 현혹하더니, 이제는 협박까지 동원해 '이미 결정된 미래'를 받아들이라고 한다.

 

아예 제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 법적/사회적 제도는 물론이고, 사회적 패러다임 자체를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제4차 산업혁명에 사회를 뜯어 맞추자는 것이다. 인간은 목적이고, 과학기술은 수단이다. 그런데도 제4차 산업혁명 옹호론자들은 그 관계를 너무 쉽게 전복시킨다.

 

궁극적으로 기업은 법과 제도의 혁파를 통해 돈을 번다.

 

자본에게서 무언가를 받으면, 우리는 그들에게 무언가를 주어야 한다. 일반 서민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정치권력'이다. 

 

1877년 미국 19대 대통령 러더퍼드 B. 헤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정부는 더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다. 이제는 기업의,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정부다."

 

이제까지 인류 역사에서 '경쟁력'이 도덕의 기분이 된 적은 없었다. 기업사회는 인류가 수천년간 공유해온 도덕 개념까지 바꿔놓았다. 

 

기업 운영은 기획과 실행이 분리되어 있으며, 실행은 다시 고도의 분업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까닭에 기업 범죄를 저질러도 죄의식이 최대한 분산된다...

 

 

[ 자평 ] 이런 작가는 자신을 버려야 얻을 수 있는 작가다. 왜 자주 책을 내지 않는지 화가 난다.

 

한 때 나는 '박민영빠'였다.  ( + 고병권, 이진경, 김규항 ) 

그 시절 출간된 그의 책을 전부 읽었다. 마음에 든다.....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을 보게 해 주고 안다고 생각했던 것을 그러냐?고 되 물어 준다. 따뜻하게 날카롭다.

그의 책의 중심에는 날카롭게 사회를 보는 사람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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