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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있는 선에 대한 책을 화두 3개 정도만 보고 버렸다.
앞으로 크게 다시 찾아 볼 이유가 없을 듯 하다..
미안한 마음에 당시 읽었던 책 중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을 낸 저자의 책과
요즈음 수행자들의 눈높이가 궁금하여 수행자가 쓴 책 두 권을 샀다.
(무력한 깨달음은 주문자 생산 방식이다.)
읽고 품평해 보리라.
간 김에 요즈음 선에 대한 글들은 무엇이 있나? 살펴 보고 왔다.
첫 책은 일지 (一指)스님이 쓰신 '불교인문주의자의 경전읽기'(2018년) 중....
1960년 태어나서 1974년에 출가하였다. 1997년 불교경학연구소를 설립하여 많은 경전과 어록을 번역했다.
2002년 43세에 서울 수국사 내 10평 정도의 컨테이너 방에서 홀로 세상 밖으로 떠났다.
"오늘 선에 관심 있는 현대인들은 사이버공간 속의 수많은 선사이트에 접속하고
그곳에서 얻은 정보가 마치 선의 ,진수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
인터넷 선은 하나의 도구적 기능을 가진 정보매체로서 기능할 뿐,
바로 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디쳐 체구연마(體究鍊磨)해야 하는 선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 체구연마. 체구는 불교 용어로 '도리를 체득함'. 연마는 일상 용어로 '학문이나 기술 따위를 힘써 배우고 닦음'
"현대 한국선은 위기의 선이다. 이제 '깨달음'이라는 구호는 낡았다.
지금 "선이라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미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선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책에서 책으로 떠돌고 있다.
입심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선의 전문가, 선의 대가를 자처하고 있다...
오늘 선은 마치 인스턴트식품을 가득 채워 놓고 언제든지 파는 사상의 24시간 편의점의 한 상품처럼 여겨지고,
오늘의 선불교는 본래의 일정한 방향성을 지닌 불교적 실천이나 전망도 없이 복제품만이 넘쳐난다.
현대 한국선은 선을 운위(云謂, 일러 말하는)하는 장사치들의 상업주의에 실려서
운전학원에서 가르치는 기술이거나, 재미있는 콩트의 모음집이 되거나,
몽롱한 정신의 환상을 좇는 현대인들의 마취제 대용품이 되어가고 있다.
대승불교 본래의 지혜와 자비를 망각한 선은 불교가 아니라 도교다.
한국불교의 승가가 진정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계속 선이라고 한다면
선의 실참(實參)과 불교적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오늘 이 시점에서 정작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이 아니라,
화두나 공안에 대한 알음알이가 아니라, 먼저 정직한 인간이 되는 일이다."
혜담스님의 '그대의 마음을 가져오라' (2018년) 중...
일본 불교대학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조계사 총무원 홍보실장. 불교신문 논설위원
(조주의 '무')
"조주 선사의 등장으로 방과 할대신 조주의 입술에는 빛이 발한다는 의미의 구순피선이란 말이 생겼습니다.
<무문관>에는 3개, <벽암록>에는 11개, <종용록>에는 4개의 화두가 조주 선사의 법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부터 오늘날까지도 가장 많이 참구된 것이 <무문관> (제1칙)이고,
<종용록> (제18칙)인 '조주 화상의 개'라는 화두입니다.
간화선에 있어서의 화두는의심이 관건인데, 이미 답을 알고 있는 화두를 잡고 있으니
제대로 의심이 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의심이란 간절하게 생겨야 하는 것인데 억지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선불교의 문제점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달마 조사는 양무제 "짐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요?"라는 물음에 "모릅니다(不識)"라고 대답했다.
조주 선사의 '무'(無)자는 달마 조사의 '불식'(不識)에 다름이 아나라느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
<무문관>(제37칙)과 <종용록>(제47칙)에서 공안으로 만들어서 '뜰 앞의 잣나무'라는 화두를 참구하게 하고 있습니다.
소납은 조주 선사의 법어를 접하고 공부하면서,
선사의 법어를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무자화두는 무분별지(無分別智)인 불법의 근본을 체득하게 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즉 "죽을 먹었으니 바리때를 씻어라."는 것과 지금의 "뜰 앞의 잣나무"라는 것 등은
무분별지의 체득에서 현현(顯現)하여 나오는 일종의 상(相)이나 용(用)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 무분별지(無分別智): 올바르게 진여(眞如)를 체득하는 지혜. 진여의 모양은 형용할 수도, 분별할 수도 없으므로 모든 생각과 분별을 초월한 참 지혜로서만 비로소 알 수 있다 하여 이렇게 이른다. (네이버 용어사전)
--> 현현(顯現): 명백하게 나타나거나 나타냄
--> 상(相): 각 종류의 모양과 태도
대한불교조계종 비구 수좌라고만 소개된 시현스님의 '대승은 끝났다' (2018년) 중에서...
제목도 도발적이고 600페이지나 되는 책이라 일단 필요한 부분만 눈도둑질을 해 왔다.
책에 소개된 저자의 문제 의식은 이렇다.
"출가 수행자들이 지금까지 수 년, 수십 년을 대승경전에 입각한 수행을 나름대로 열심히 해 왔지만
별다른 진보를 경험하지 못하고 대승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 봐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의심 끝에 깨달음에 이르는 간화선의 깨달음은 근본 불교의 깨달음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70. 간화선의 정통성)
대승권에서의 중요 수행법으로서 염불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화두 수행법 즉, 간화선
북방 대승의 선불교에서 최후로 정립된 방법이다.....
이 수행법의 정통성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어 왔었다.
일단 선종이 탄생하는 과정상의 흐름을 도표로 살펴보면...
북방 선종의 근원적인 맹점은 중조인 달마 대사의 과위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 맹점은 달마가 부처님으로부터 깨달음의 법을 이어받은 28대 조사라고 주장하는 족보 편집증에서 드러난다.
한 명으로 지정된 부처님의 전법 제자는 없었다는 사실에서 이 족보의 날조성은 증명된다....
달마에서 간화선이 확립되기 까지의 수행 내용은 일심 관찰 수행법이었다.
"마음을 관찰하는 하나의 법이 모든 수행을 총섭한다."라는 신수의 '관심론'이 잘 종합/정리해 주고 있다.
여기서의 마음은 일심(불성, 자기청정심, 여래장 등과 동의어)을 의미한다.
근본불교에서의 마음 관찰 수행법은 마음의 16가지 구체적인 상태들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는 것이었음에 반해
선종의 마음 관찰 수행법이란 실체화된 마음을 관찰하는 추상적인 수행법이었다....
선종의 마음 관찰 수행법이 갖는 추상성은 후대에 묵조선에서 잘 계승되었다.
마조 도일은 실로 선종의 모든 교화 방법들을 집대성하여 화려한 완성을 보여준다.
마조 도일이야말로 중국 선종의 진정한 집대성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양 회양은 혜능의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라는 질문에 막혀서 8년 동안 참구한 끝에 깨달음을 얻는다.
이것이 간화선 수행법의 원류가 발견되는 지점이다.
황벽 희운에 의해 간화선은 정식으로 시작된다.
그는 조주 선사의 '없다'(무자 화두를 말함)이라는 공안을 종일 참구하라고 대중에게 지시했다.
간화선의 시조는 황벽 희운 선사라고 보면 된다.
이렇게 선지식의 말씀, 즉 화두를 의심하다가 깨닫는 흐름이 잡혀 갔다.
중국 선종사에서 화두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경우들은 이어졌지만
그 깨달음을 얻게 하는 핵심 원리가 '의심'에 있다는 것을 콕 집어낸 사람은 대혜 종고의 스승인 원오 극근이었다.
그는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통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로부터 언구, 즉 화두를 오직 의심하기만 하면 깨달을 수 있다는 확실한 지평이 열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의 진정한 확립자는 원오 극근이라고 하겠다.
간화선의 의심은 신심에 기초한 의심이다. (영어로는 curiosity)
화두 의심은 불법의 대의를 대상으로 지향하고 선지식의 말씀을 내용으로 삼으며 부정적인 감정이 배제된 채
순수한 열정으로 끊임없이 깨달음에 귀결되도록 만든다.
의심에는 '알아봄', '노려봄', '찾아봄'이라는 작용들이 들어 있다.
이것은 근본불교에서의 '관찰'(알아봄)과 내용상 상응하는 성질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심이 갖는 관찰의 성질이 깨달음을 이루는 알아차림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다음은 미얀마의 대표적인 고승인 마하시의 깨달음의 순간에 대한 묘사다.
- 대상과 상기가 모두 '탁'하고 끊어져 멈추어 버렸다.
- 매우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이 대상과 상기가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 대상과 상기가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등불이 '휙' 꺼져 버리듯이 매우 빠르다.
- 물속에 '쑥' 가라앉듯이 대상이나 상기가 모두 가라앉아 버렸다.
(71. 네 번째 명상과 화두열여)
"자나 깨나 한결같음"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깨달을 수 있다는 주장도
깨달음에 이르는 다양한 경로에 무지한 자의 주장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은 다양하며 깨달음도 여러 등급이 있다.
(72. 선불교는 예류자의 불교)
선불교의 인가 과정에서 욕망과 화의 근원적인 소멸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선문답 자체가 안목을 확인하는 작업일 뿐이다.
그러나 불교는 실제로 탐진치를 소멸시켜야 실제로 자기-없음을 철저하게 체득하여
실제로 생사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 궁극적인 가르침이다.
그것은 깨달음의 정점에 이르도록 한결같이 일치되는 사실임이
깨달음의 금강 잣대에서 명약관화하게 드러나 있다.
예류자를 묘사하는 '티가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도 역시 안목을 다루는 말이다.
선불교의 견성(성품을 알아본다)도 역시 안목을 나타내는 말이다.
오도송은 예류자의 오도송이라는 점이다.
동격자가 오도송을 읊는다면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는 자각을 공통적으로 말하게 되어 있다......
실제로 생사가 끝났고 어떤 상태로든 생성되지 않는 존재가 되었음을 스스로 분명히 아는
'풀려남의 앎과 봄'을 드러낸다.
부처님의 동격과의 오도송에서도 더 이상 윤회하는 삶은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선불교의 오도송에서는.......아직 확연하게 동격자의 오도송이라고 할 만한 오도송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동격자의 오도송이 생성됨의 소멸을 노래한다면
예류자의 오도송은 '자기 없이 따라서- 같이 - 생겨남'에 대한 여러 이치적인 측면이나
세 가지 결박들에서 풀려난 상황을 묘사하는 경우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예류과를 달성한 부처님의 오도송에서도 확인된다.
(선불교의 오도송 중 '의심이 없어졌다' '생사가 본래 없다' '삼천대천세계가 나와 한 몸' '두두물물이 진리' 등의 표현은
'자기 없이 따라서 - 같이- 생겨남'에 대한 이치적인 다양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 모든 오도송의 표현들은 공통적으로 예류과의 안목을 나타내고 있다.
인가만 받으면 궁극에 도달한 것이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여기는 북방 선불교의 전통에서
예류자로서의 인가는 받아들이기 거북한 주장일 것이다.
--> 너무 반가왔다..선사들의 어록을 읽으면서 오도하면 인생일대 모든 경계가 터진듯이 말하는 바가 아닌 것 같았다.
또 어떤 이는 모든 대중의 즉문에 즉설한 수준이 되는지 지껄여 대는 것이 꼴불견스러웠다.
그래서 큰스님이라는 자들을 떠났다. 어차피 불교도도 아닌데.....
붓다가 보여준 말과 행동과는 완전히 다른 짓인것 같은데.....
내가 뭐 불교학자도 아니고 불교도도 아니라... 안 보면 되지 하면서 왜 이런 찜찜함이 있는지 이 책을 읽고 알았다.
(73. 간화선의 한계)
간화선은 지적 호기심과 승부욕이 강한 기질의 사람에게는 매우 효과적인 강력한 수행법으로 다가온다.
간화선은 단점은
1) 먼저 의심이 기질상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의심하려고 해도 의심 자체가 일어나지 않거나 의심을 계속 품는 일이 너무 힘겨운 사람도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의심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고 부당하다.
2) 예류과를 달성한 후의 구체적인 수행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의심은 예류과에서 소멸된다. 다만 중국의 선사들은 '처음의 깨달음'으로 인가를 받은 이후에도
더 높아지는 단계가 있음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임을 가르쳤다.
그러나 보임의 구체적인 수행법을 제시하지는 못했고 수연이나 청정만을 귀띰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방법으로 동격자에 도달하기란 어렵거나 더딜 것으로 보인다.
간화선이 최상승선이라는 강변은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대장 노릇하며 내뱉은 허장성세의 호언장담이었다.
3) 대승의 실체사상이 스미어 있다.
간화선뿐만 아니라 중국 선종 모두에 걸쳐서 대승의 여래장사상이 기본으로 깔려 있는 것은
달마가 <능가경>을 선택하면서부터 시작된 일이다.
여래장은 곧 일심이자 불성이었고 공성으로 회통되었다.
이 실체화된 공성은 선종의 공통적인 주장인 본래무일물사상과 다시 연결된다.
결국 실체로써 무실체를 주장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선불교의 역설과 반어 화법, 격외도리, 모순적인 주장 등 등은 모두 대승경전을 불교로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무실체의 깨달음을 억지도 대승의 실체와 회통시키는 작업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경우가 많다.
완벽한 설법은 동격자라도 어렵다.
그러므로 법에 오류 없이 완벽하게 설법한다는 것은 예류자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 서점에 가면 불교를 포함하여 명상계에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자가 아마 수 백명, 수 천명은 될 것이다.
붓다고 우습고 예수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많다. 난 개인적으로는 거의 없다고 본다.
붓다는 예수는 그렇게 흔한 상품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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