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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 ]

 

"철학을 한다는 것은 곧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키케로
"나는 죽음을 계속되는 현재의 사건으로 바라보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그저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되뇌었다." - 몽테뉴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지 않는 법을 배운 셈이다." -퐁테뉴
"잘 죽는 법을 알지 못하는 자는 잘 살지도 못한다."  - 세네카

'자아실현'센터라는 곳....궁전을 방불케 하는 그곳에서 화려한 정원과 호수 사원, 키치풍의 힌두교 건물은 완비하고 영적인 자아 각성과 신과의 대화를 증진하는 고가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 명상(마음)은 산업이 된지 오래 되었다. 

 

무지몽재주의는 첫째, 자각(자기 자신에 대한 앎)은 도달 가능하고, 둘째, 자각에는 가격표가 따라 붙으며, 셋째, 자각의 부와 쾌락, 개인의 구원을 추구하는 일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부추긴다.

 

죽음에 대한 관점의 영향력은 폭넓은 독자층을 거느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에서도 발견된다. 유명한 죽음의 다섯 단계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에 입각하여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보는 심층심리적 접근법을 발견하였으며, 이러한 접근법은 고통 완화 치료에 영향을 미쳤다..... 다만 내가 염려하는 것은 이런 접근방식들이 죽음은 환상이며 올바른 영적 준비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환상이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죽음이라는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존재를 재구성 해야 한다...우리 시대의 치명적인 특정은 바로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자꾸만 달아나려고 하는 태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디오게네스는 스스로 숨을 참는 방법으로 죽었다.

 

조르다노 브루노는 종교재판을 받고 입에 재갈이 물린 채 화형대에서 산채로 불태워졌다.

 

스피노자는 헤이그에 있는 하숙방에서 사람들이 모두 교회에 가 집을 비운 사이에 죽었다.

 

데이비드 흄은 무신론자의 죽음관에 대한 보즈웰의 물음에 반론을 하고 나서 침대에서 평온하게 죽었다.

 

칸트의 마지막 말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였다.

 

사르트르는 "죽음? 난 그런 것 따윈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은 내 삶에 존재할 자리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5만 명의 추모 인파가 몰렸다.

 

메를로퐁티는 일설에 따르면 자신의 연구실에서 데카르트의 저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숨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질 들뢰즈는 폐기종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리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

 

나의 죽음관은 에피쿠로스의 죽음관에 가깝다. 그는 네 종류의 처방을 제시한다.

(1) 신을 두려워 말라.

(2) 죽음을 염려치 말라.

(3) 좋은 것은 편하하게 즐겨라.

(4) 무서운 것은 편하게 견디라

 

"네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원조는 탈레스(Thales, 기원전 6세기)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는 기원전 585년 5월의 일식을 예측한 일로도 유명하다.

 

아낙시만드로스(Anaximader, 기원전 610~546/545)....아페이론(apeiron)즉 한계가 없는 것, 무한자(無限者)가 모든 존재의 근원적 실체라고 주장했다.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us, 기원전 372~287)은 85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으며, 그의 마지막 말은 철학적 죽음의 전형을 보여준다......

" 남기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다. 우리의 삶이 자랑하는 수많은 즐거움은 겉모습일 뿐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죽을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영예를 탐하는 것보다 허망한 것은 없다. 잘 있거라. 제자들아. 너희들의 행복을 빈다. 인생에는 이로운 일보다 실망할 일이 더 많다. 하지만 이제 나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이상 논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바라노니, 올바른 행동을 찾아 끊임없이 정진하라."

---> 만일 이 분의 마지막 말씀을 부처가 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그리 닮았는지...

---> 붓다의 마지막 말씀은 대강 이러 했다고 한다.."빅쿠들이여, 참으로 이제 그대들에게 당부하노니 형성된(조건지어진)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방일하지 말고  [해야할 바를] 성취하라.") (출처: https://blog.naver.com/5362888/221339900651)

 

퓌론(Pyrrho, 기원전 360~262)... 고대 회의주의라는 대단한 전통을 세웠다. 아무 저서도 남기지 않은 그의 사상은 제자 티몬을 통해 전해진다.

그리스어로 '회의주의자(skeptikos)'란 '묻는 자'란 뜻으로, 감히 안다고 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묻는 자를 의미한다. 모든 일에는 양 측면이 있기 마련이고, 우리는 어떤 주장 X뿐만 아니라 그 반대 주장 Y를 정당화하는 증거들 역시 얼마든지 모을 수 있다.

그는 어떤 사안의 양 측면을 동시에 바라보고 판단중지 상태 즉 모든 문제헤 대해 에포케 상태를 유지하라고 조언한다. 필론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회의주의자들은 반대도 선택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판단을 중지하고 아파시나(aphsia) 즉 침묵을 유지할 뿐이다.

 

"우리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유한한 존재인 것처럼 행동하고, 우리가 욕망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영원불멸의 존재처럼 행동한다." - 세네카(Seneca, 기원전 4~ 서기 65)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은 세네카와 스토아 철학자들을 흠모했지만 생을 마감하면서는 퓌론과 같은 회의주의자들을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현명한 철학자들"로 꼽았다. 우리는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고대 회의론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몽테뉴에게 한 가지 질문을 선물해 주었다.....진정한 철학자의 태도를 특징적으로 말해주는 그 질문은 바로 "Que sais-je?" (나는 무엇을 아는가?)이다. 

 

라로슈포코(La Rochefoucauld, 1613~ 1680)는 "태양과 죽음은 오래도록 쳐다 볼 수 없다."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1632~ 1677)는 <에티카> 4부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제시한다....

"자유인은 결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에티카>에서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겸손, 연민, 참회 같은 기독교의 덕목들을 도매금으로 부정하면서 힘과 욕망에 뿌리는 둔 덕의 겨념, 궁극적으로는 한 존재를 지속시키는 욕망을 의미하는, 유명한 자기보존(cotatus essendi) 개념을 내세운다는 점이다.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 1646~ 1716)는.. 낙관론자이고, 정통론자이고, 환상적이고 피상적이다.....라이프니츠는 최악의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음에도 이 세상이 모든 가능한 세계 중 최고의 세계라고 열변을 토하던 사람이었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 1776)....무신론자 흄은 불안감 없이, 유머를 즐기며, 쾌활하게 죽었다....흄의 저작들의 유언집행자였던 애덤 스미스는 " 그가 살아 있을 때에도 그리고 죽은 후에도 나는 그를 생각할 때마다, 아마도 인간의 연연약한 본성이 허용하는 한에서, 완벽한 지혜와 덕성이라는 관념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 그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라고 썼다.

 

칸트(Immanuel Kant, 1724~ 1804)

칸트는 최후의 말을 속삭인다. "이만하면 충분하다(Sufficit)"

칸트는 근대 철학자 중 철학 직업교사로서 생계를 유지한 최초의 주요 인물이었으며 피히테, 헤겔 등이 그의 길을 따랐다. 

칸트 전문가 W.H. 윌시는.."칸트는 과학의 권위를 주장하면서도 도덕의 자율성을 지키고자 했다."

 

괴테의 최후의 말에 대한 다른 해석이 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괴테의 마지막 말이 "좀 더 빛을(Mehr Licht)"이 아니라 "더는 없구나(Mehr Nicht)"였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하다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정신병원에 갇힌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쇼펜하우어의 가장 위대한 철학적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기본적 논지는 세계는 그저 부유하는 일련의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만일 우리가 인정사정없는 불멸의 의지에 조정당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물질이 그 의지의 결과일 뿐이라면, 그 의지의 삶은 우리의 죽음과 더불어 끝난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죽음은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개인적 존재가 새로운 형태로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것이 된다......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숨졌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경이에서 시작하는 철학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철학은 낯익은 것을 낯선 것처럼 바라보고, 낯선 것을 낯익은 것처럼 바라본다." -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1907년 <창조적 진화>가 출간된 후 베르그송의 명성은 너무나 드높아져 '베그르송 붐(le Bergson boom)'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맨해튼 브로드웨이 최초의 교통체증 기록은 1913년 베르그송의 대중강연 때문이었으며, 그는 192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이자 몇 되지 않는 철학자였다.

 

러셀은....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떤 신성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혼란과 우연의 혼합물일 뿐이다. 따라서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종교적 도그마가 아니라 이 혼란과 우연을 조금이라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과학적 탐구의 태도다...

 

102세가 되었을 때 가다머는 뉴욕 세계무역센터 태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받았다... 그는 "헤계는 내게 점점 더 낯설고 기괴해져 간다. 사람은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다. 이것이 아무런 제한 없이 내가 옹호하는 유일한 테제다." 라고 말했다.

 

보부아르(Beauvoir, 1908~ 1986)..

우리는 노년을 내적으로가 아니라 외적으로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노년은 발견되지 않고 외부에서 부과된다...

 

사람들이 가장 죽음에 대하여 가장 바라는 것은 아무런 고통 없이 한순간에 죽는 것이다. 흔히 말하듯 "아무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죽음에 대한 준비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기독교는 죽음을 훈련시키는 종교다.... 더 오래 살려는 욕망과 소멸의 공포에 사로잡힌 자칭 기독교인들의 삶이란 실제로는 절망적인 무신론자의 삶이기 때문이다.

 

몽테뉴의 말로 되돌아가면, 철학을 한다는 것은 곧 우리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죽음이 현재에 머물도록 하는 습관을 배운다는 뜻이다. 

 

[ 자평 ] 그저 뭐 그런.....

 

인간의 마지막 순간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죽음의 순간, 유언, 임종계, 묘비명 등......

 

20대에는 선사들의 '좌탈입망'이라는, '죽음'에 대해서도 자유로움을 보여주는 숭고함으로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제자나 신도들의 욕망이 끼어든, 상당히 의심스러운 event 또는 쓸모 없는 show로 생각하고 있다.

(힌트는 백성호기자의 책과 글에서 읽었는데 난 100% 공감, 동의한다..)

 

 

 

붓다의 가르침이나 선사들의 가르침으로 보면 어떤 모습, 어떻게 죽든 별스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이렇게 죽는 쇼를 보여주는 것이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허됫 자아, 망상, 허망한 몸뚱이, 거짓 몸, 거짓 자아 등등)에 대한 허명이나 숭배를 나을 수도 있기에 가르침에 위배(역행)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죽임을 정말 일종의 '아무것도 아님'을 중생에게 보여 주려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모습을 보여 주던가.....

죽은 후 열반적정이, 윤회를 벗어난 것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이 더 큰 가르침이 아닐까? 

 

(좌탈입망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어 인터넷에도 떠도는 분들은 한암스님, 서옹스님, 진목스님, 인허스님, 오명스님 등 등 꽤 있다.....)

 

 

 

 

이와 같은 주제로 읽어본 기억이 있는 책들은.....

(읽을 때는 30대 시절이라 그렇게 못 느꼈는데 지금 다시 보면 거의 과장과 포장이라고 본다.)

 

 

특이한 주제와 내용이 책이다.

띠지에 있는 홍보문구는 '위대한 철학자들은 정말 철학적으로 죽었을까?'이다.

 

대학교 철학교 교수가 쓴 책으로 철학자들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 했는가?에 집중하여 쓴 책이다.

기원전 6세기경에 살다 죽은 탈레스로 시작하여 2002년에 죽은 자니코(Janicaud)까지 약 191명이 등장한다.

철학자들이 말하거나 쓴 '죽음'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죽는 순간에 집중한 책이다. 

자료 조사 자체가 엄청난 노력이었을 것 같다.

(초고는 2006년 12월 ~ 2007년 6월에 썼다고 한다. 책을 쓰기 전 이미 철학자 휴 멜러가 '철학자들이 죽은 이유'라는 웹 사이트를 운영 중이었다고 한다.)

 

 

관심이 간 분은 몽테뉴, 스피노자, 데이비드 흄, 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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