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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 그 중요하다는 소설의 첫 문장. 근래 읽은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의 첫 문장이 될 듯 하다.
농부로서의 아버지는 젬병이었다. 사회주의자답게 의식만 앞선 농부였다. 아버지는 일삼아 <새농민>을 탐독했고 <새농민>의 정보에 따라 파종을 하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농사를 '문자농사'라 일축했다.
지나긴 세월이 바삭바삭 잘 말라 몇점 먼지로나 흩어져 있다고 믿는 것인지 어머니의 시선이 허공을 더듬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 나서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상욱아, 너 하염없다는 말이 먼 말인 중 아냐?"
고 봐라, 가시내야. 믿고 살 만허제? 영정 속 아버지도 나를 비웃는 듯 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인간을 신뢰했다.
마셔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영원히 술과 맞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한계란 그런 것이다.
아버지는 해방 전후의 한계와 여전히 맞서 싸우는 중이었고, 그사이 세상은 훌쩍 그 한계를 뛰어넘었다.
"괜찮다. 괜찮아."
자기 상태가 괜찮다는 것인지, 죽음이란 것도 괜찮다는 것인지, 살아남은 자들은 그대로 살아질 테니 괜찮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불현듯 눈물이 솟구쳤다.
"아이, 갱희야. 생각이란 것은 월매든지 바뀔 수 있니라. 긍게 니도 찬찬히 잘 생각해보그라."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허는 것이여."
무엇에도 목숨을 걸어본 적이 없는 나는 아버지가 몇마디 말로 정의해준다 한들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옳았든 틀렸든 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지키려 했다.
"지한테 득이 안 된다 싶으먼 가차 없이 등을 돌리는 것이 민중이여.
민중이 등을 돌린 헥멩은 폴쎄 틀레묵은 것이제."
"좌익 시상이 되먼 니가 쟈를 봐주고, 우익 시상이 되면 니가 자를 봐줘라."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저 질이 암만 가도 끝나들 안 해야."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누구한테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게 있는 거야. 아빠 너무 미워하지 마."
아버지는 생각했겠지. 우리가 싸워야 할 곳은 산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불빛 아래 옹기종기 모여 밥 먹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싸우기도 하는 저 세상이라고.
아버지라면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아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옛날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한 어깨에 두 짐을 지고 살아왔구나.
작은아버지나 나는 유약해서, 혹은 세상이 좋아져서 한 어깨에 두 짐 못 지는 거라고,
스스로 나자빠진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게 할배 맴이 요상허드래. 아부지라는 거이 이런 건갑다,
산에 있을 적보다 더 무섭드래. 겡찰보담 군인보담 미군보담 더 무섭드래."
(작가의 말)
빨치산의 딸으므로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의 비극은 내 부모가 빨치산이라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내 비극의 출발이었다.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다.
그 말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진작 아버지 말들을 걸 그랬다.
[ 자평 ] 한국인으로, 이 소설. 잃지 그리고 잊지
못할 것 같다.
내내 읽으면서 저자의 마음 아픈 과거에 대한 생각, 작가의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생각....
그리고 나의 아버지 생각이 났다.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2209021447001
"소설 제목은 ‘아버지의 해방일지’다. 제목의 ‘해방’은 ‘사회주의 해방’을 이루지 못한 “패배의 역사”에서 늘 한 인간으로서 실천한 나눔과 연대, 솔선수범의 삶으로 이룬 또 다른 해방을 가리키는 듯 하다. 죽음과 장례를 계기로 아리는 냉담과 냉소, 오만과 무례를 반성하며 아버지의 삶과 의미를 다시 들여다본다."
<빨치산의 딸>을 낸 건 정지아가 스물다섯 살이던 1990년이다. 부모의 증언을 바탕으로 쓴 ‘실록’이다. “빨치산의 딸로서 민중에게 부여받은 책임과 의무” “노동해방을 쟁취해낼 천만 노동자의 딸”이란 사명감으로 쓴 책이다. ‘실천문학’에 연재한 뒤 출간했다. 출간되자마자 판금 조치당했다. 정지아는 이 책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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