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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수치심 때문이다. 정치가 경제에 조롱당하고 권력이 재정 관리인에게 조롱당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느낀 수치심 말이다.

 

더 나쁜 것은 정치가 겨제 앞에 비열하게 무릎 꿇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경제학자들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터무니없는 사태의 의미를 설명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그런 사태에 관해 전혀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고백하는 사람이 바로 경제학자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콧대는 수그러들 줄 모른다.

 

경제는 이제 우리의 종교와 정치가 되었다.

 

정치인을 자신의 경호원으로 여기면서 우리 사회를 마비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경제의 속임수'다.

 

우리가 새로운 경제 양식을 만들어내 벗어나야 할 것은 자본주의라기보다는 경제에 현혹당한 정치다. 

 

경제는 미래에 대한 새로운 태도는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적어도 전례없는 풍요로움은 제공해주었다.

 

(경제학의) 폭력을 스스로 자제하기 위해서는 전통 철학이 '자기 초월'이라 부르는 자기 객체화가 필요하다.

 

경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 이끌려가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미래에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일종의 부트스트랩 역설이다. 

---> 일종의 '자기예언적 실현'? 

자기 초월적 미래....모든 주체가 자기 초월적 미래라는 같은 이미지를 중심으로 자신의 행동을 조정한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에게 부는 타인의 시선을 끄는 것이며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은 부를 욕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의 특징인 신성 상실이라는 종교적 과정을 겪으면서 공석이 된 그 자리를 경제가 차지하고 있다는 확신이었다.

 

체면을 지키고 있는 다른 학문을 흉내 내는 경제학은 스스로 미래를 예측할 책임이 있다고 자임하고 있다. 하지만 번번이 큰코만 다치고 있다. 

 

자기 충족적 예언은 애초부터 진실이라서가 아니라 어떤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믿게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미래 현실과 일치한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진실의 모습을 한 미래를 표현한 것이다. 

 

예측가는 결정론을 믿고 미래학자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믿는데, 예언자는 이 둘 사이에 있다. 

 

경제는 르네 지라르가 말하는 '모방 욕망'이 마음 대로 뛰노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대중은 모두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똑같은 목표와 방향이 필요하다"라면서, 그것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이상 그게 무엇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정치는 국민이 가끔은 자신을 초월하고 그리하여 미래를 향해 과감히 뛰어들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정치는 이런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정치가 이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 돌아볼 곳은 바로 정치에 남아 있는 성스러운 영역이다. 

 

선택의 자유라는 가정하에서 모든 세계에서 전능한 예언자를 가정하는 것과 현재의 행위들이 인과론적으로는 종속되어 있지만 가상 현실적으로는 독립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미래를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같은 명제다. 

 

 

 

[ 자평 ]  좋은 문제의식.....가끔 혼란 스러운 번역....

 

이 책을 구매할 때 서평을 참고하였다.

총 9명 중 내가 보기에 한 분을 빼고는 제대로 이 책을 읽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서 ~~~", "출판사에 받은 책을 ~~" 등의 서평들이 책을 호감도를 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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