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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어떤 극단적인 작업(수행)을 통해 몸이 변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몸의 변화 때문에 생각하는 차원이 다르게 명확한 앎이 찾아온다는 것. 그리고 그 몸의 변화로 인한 앎의 바로 불교의 깨달음이고,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것을.
불교의 작업은 '지극한 의심'이고 기독교의 작업은 '지극한 믿음'이라서 그 방향은 서로 반대이지만, 결과적으로 똑같은 몸의 변화에 이르게 되고 그 때문에 똑같은 앎을 획득하게 되는데, 그 앎이 바로 '이 우주는 한 몸'이라는 앎이다. 나의 몸만 '나'가 아니라 이 우주 전부가 다 '나'라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 이 책을 읽을 2013년에는 관심이 있어 줄을 친 것 같다.
---> 2021년 다시 읽으면서 '깨달음'에 이르면 '정신'이 변화는지? 아니면 '몸'이 변화는지는 커녕. 나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매우 의심스러워 한다.
---> 나는 있다 라고 믿는다. 저자의 말대로 부처나 예수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깨달은 상태'에 있는 '깨달은 분'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21세기 대중매체에서 파는 '깨달은 자'라는 분들에게서는 '깨달은 상태'를 볼 확률이 거의 없다고 본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진아'를 찾았다면 왜 그 경험을 구체적으로 밝혀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는가? 왜 그저 '찾으라'고만 하는가? 도대체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야?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고 있든, 나는 내가 '만족'에 도달했음을 알았다. 나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의문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하, 이거였구나. 이게 진아였구나. 진아를 찾으면 이렇게 되는 거였구나.......화두는 그렇게 끝났다. 내가 마침내 '진짜 나'를 찾은 것이다.
세상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게 다 보였다. 마음과 함께 있을 때는 마음이 대단해 보였는데 마음에서 떨어져 나오고 보니, 마음은 '사소한 움직임'일 뿐이라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그래서 '이게 깨달음이라는 것이구나' 했다.
결국 몸(물질)이란 마음의 결정체일 뿐이고, 마음은 의식의 결정체일 뿐이라서, 의식과 마음과 몸은 긴밀히 연결된 '한 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음이 움직이는 쪽으로 몸이 형성되는 것인데, 마음이 계속해서 '이 몸이 나'라는 믿음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에 따라, 원래는 열려있던 유체가 닫히면서 그 후로는 '이 몸이 나'라는 믿음이 정상적인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육체를 감싸고 있는 '마음몸'인 유체가 열려 있어서 외부와 소통을 해야 '이 모든 게 나'라는 인식이 생기게 되는데 그 '마음몸'의 문이 닫혀서 외부와 소통할 수 없게 되자, 그 '마음몸'이 '이 육체만 나'라고 믿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게 상식애 돼서 전승된 것이다.
---> 이런 스토리들이 대체적으로 명상계의 큰 줄기를 이루는 스토리다...
---> '진아'라는 것이 몸에 갇혀서 '몸을 나'라고 인식하는 것이 에고의 문제라는 것이며, '진아'가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아니면 깨달음의 시초라는 것.....
---> 이 들이 소중히 여기는 순서는 진아 -> 의식 -> 마음 -> 몸이다. 몸과 정신/마음/의식을 별개로 보고,,,, 진아를 가장 큰 합집함으로 본다.
---> 에너지가 물질화 되어 스스로 질량을 가지면서 모든 제약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질량은 스스로 제약성을 벗어나는 순간(깨닫는 순간) 원래 에너지라는 자유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설....
(항문조이기)
1초에 한번씩 100번을 조이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항문조이기는 알아차림 훈련이 된다. 다른 것에 마음을 쓰면서 항문조이기를 할 수 있는지 해보라. 항문조이기는 반드시 그대의 마음이 항문에 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그대가 항문조이기를 한다는 것은 그대의 마음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지 않고 한 곳에 모여 있다는 증거가 된다.
아울러 항문조이기는 쿤달리니를 상승시키는 작용을 한다.
---> 책에도 있지만 가수 김도향선생의 건강/정신 비법이다.
물론 항문조이기보다는 걷기가 더 좋다.
현대인들의 호흡의 근본적인 문제는 호흡이 짧아졌다는 사실에 있다.
---> 이는 정확히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추정일 것이다.
---> 우리는 고조선/고려/조선 시대 사람들의 호흡이 긴지 짧은지 알 수 가 없다.
---> 다만 그 시절 사람들보다 다들 바쁘게 사니, '바쁘다 = 몸을 많이 움직인다 = 호흡이 짧다'라는 상식적인 추정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비만이라는 측면으로 보자면 현대인들은 너무 몸은 안 움직인다고 볼 수 도 있다. 그래서 운동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꽤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몸을 안 움직였을 개연성도 있고, 몸을 더 안 움직이면 호흡이 더 길 개연성도 있다......
결국 몸을 결정하는 것은 마음이다. 그래서 마음이 무한을 담을 수 있게 되면 몸도 그에 부응하기 위해 변하게 된다. 그러니 먼저 마음에 무한을 담아라. 그러면 몯도 죽음을 넘어선다.
---> 대체로 이런 생각이 정신을 추구하는 명상계에 주류적인 생각이다. 맞는 말인지 나는 모르겠다.
---> 하지만 내 생각에 명상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 '몸'을 우습게 본다. 나도 그랬다. 마하리쉬가 썩은 살을 벌레가 파 먹는 것도 모르고 삼매에 열중했다는 전설은 이 업계의 best practice였다. 너무 멋지게 보였다. 온 몸/생명을 받쳐 진리를 찾는 다는 것이 얼마나 멋지게 보이는가.....
---> 하지만 40대 초입에 중환자실을 포함하여 병으로 2년을 고생하면서, 몸이라는 것을 다시 보게 됐다. 몸이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지?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은 우습지 않다.
다 놓아줘라. 기적은 기대의 노력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포기'로부터 온다.
---> 요즘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도 이것이다.
---> 이런 명상가들의 주장하는 것은 끝임없는 '알아차림'이다. 그런 알아차리의 연속을 통해 결국 '받아들임', '놓아버림'을 가르친다.
---> 과연 개인적인 문제, 사회적인 모든 문제에 대하여 붓다는 '받아들임'과 '놓아버림'을 가르쳤을까? 결국 이 세계는 진실이 아닌 허구세계(가상세계)이기 때문에 큰 관심이 없었을까? 아니면 어차피 현실은 가상이니, 코칭과 멘토라는 포장으로 아무 조언이나 마구 던졌을까? 과연 붓다는 개인이 부딪히는 사회적 모순에 개혁과 변화가 아닌 받아들임을 하라고 했을까?
---> 사회복지분야 박광준교수는 <붓다의 삶과 사회복지>란 책에서 '과연 붓다는 장애가 업보라고 말했을까?'라는 의문으로 썼다. 제행무상과 침묵을 가르치신 붓다는 사회복지에 대하여 어떤 말을 했을까?
잠을 한 번 깬 상태가 현실이 아니라 잠을 '두 번' 깬 상태가 진짜 현실이라는 얘기다.
---> 글쎄. 대행스님은 세 번 죽는 도리를 알아야 진짜 현실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한마음요전』의 내용 중에 “세 번 죽어야 도를 이룬다. 첫 번째로 내가 죽어야 한다는 뜻은 ‘나를 버려서 나를 얻는’ 소식이다. 두 번째로 또 내가 죽어야 한다는 뜻은 ‘나와 더불어 일체를 버려서 일체를 얻는’ 소식이라, 이 소식은 너무 광대무변하기에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리고 세 번째로 다시 또 내가 죽어야 한다는 뜻은 ‘나와 더불어 일체를 버려서 일체로 나투는’ 소식이다." (이 책을 나는 한마음선원에서 보내 주셔서 군대에서 받아 보았다...)
---> 두 번인가? 세 번인가 ?
이것을 보고 저것을 알고, 여기서 배우고 저기서 또 다른 걸 배우고, 그렇게 함으로 해서 앎에 도달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마라. 앎은 그대의 눈의 문제고 눈의 문제는 시력의 문제다. 그런데 그대의 시력은 많은 것을 본다고 개선되지 않는다.
---> 1000% 동의한다. 내가 그렇다. 스스로 느낀다.
---> 많이 읽고 본다고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지식을 쌓을수록 무력감이 든다.
공예장인의 놀라운 솜씨도 결국은 단순 반복에서 나온다. 하나의 대상과 반복해서 만나라. 그대의 시력은 바로 그 반복된 만남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개선된다.
보는 '양'이 문제가 아니라 보는 '깊이'가 문제다. 충분히 깊게 들여다볼 수 있을 때까지 끈질기게 들여다봐라.
우리는 생각하는 습관에 익숙하다. 그래서 존재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 생각의 습관을 적용하려고 한다. 그런데 존재의 문제는 생각 이전부터 존재하는 문제다. 그래서 생각의 매커니즘이 아예 해당이 되질 않는다. 그런데도 그대는 그대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이 생각이라는 이유로 그저 생각이라는 도구만 붙들고 늘어진다. 망치로 나사를 풀 수 있을까?
춤의 대가가 되려면 야구 연습을 할 것이 아니라 춤을 연습해야 하듯이 존재를 알려면 생각에 매달릴 게 아니라 '의식 확장' 훈련을 해야 한다.
---> 글쎄....아마 이런 스타일의 언어는 성철스님이 "화두를 참구해서 차례대로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어야만 깨닫게 된다."는 주장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유행을 한 것 같다.
---> 개인적으로는 '하나의 생각에 완전히 끄달리지 않는다'는 경지는 있을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말 그대로 하나의 생각(화두)만 100% 한다고 하는 동정/몽중/오매일여가 가능하기는 한건가? 싶다. 가능하다면 그도 목석이 뿐일텐데....살아 있는 생물이 가능하기는 할까?
순수함이란 무엇일까? 모든 것에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대의 성찰은 충분히 순수한가?
"그대 자신이나 걱정하라. 세상일은 세상이 알아서 하도록 하고, 그대는 그대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져라.....그대의 상태가 바뀌면 그대의 세상도 바뀐다." - 라마나 마하리쉬 -
"육체의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몸이 약해지면 없어져야 할 마음이 오히려 더 강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 마하리쉬-
"활홀경 다음에 오는 고요함은 사마디 속에서 녹아 들어간다. 사마디에 들어가면 깨어 있으면서도 잠자는 것과 같은 의식 상태가 나타난다. 그대가 그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자신이 항상 의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의식이 그대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 - 마하리쉬-
중도는 문제의 원인을 보는 것이다. 하나에 대해서 둘이 일어나고, 둘에 대해서 다시 넷이 일어날 때, 그것들이 서로에 대응해서 끝없이 일어나는 작용을 보는 것이 곧 중도다.
그대는 존재의 실체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존재에 대해서 알고 말고 할 그대가 아예 존재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깨달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돈을 많이 벌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문제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 자평 ] 알 수 없었고 다시 또 알수 없으므로 버렸다.
"내가 이 책을 읽었었나!. 무슨 책이지?!!"
내가 그 책을 읽은 것도 모르는 책이 더러 있다.
이 책도 그런 책 중 하나다.....
책이 없기에 인터넷으로 다시 찾아 보니 저자 소개는
'2008년 어느 봄날 마침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마침표를 찍었다. 지금은 블로그(seedan.kr)에 글을 쓰면서 시단선원(네이버 까페 drovell)에서 수행자들을가르치고 있다.'라고 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선수행자들이 가끔 자신을 소개할 때 쓰는 '(생사대사를) 마쳤다', '(모든 의문을) 끝냈다'. 등 등 이런 용어를 굉장히 엄청나게 무지하게 소스라 치게 닭살 돋게......안 좋아 한다.)
시단선원은 아직 운영 중이다.
(시단선원(示單禪院) : 네이버 카페 (naver.com))
아마 이 분이 저자이신 것 같다.
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하리쉬, 채근담, 다스칼로스 등의 깨달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저자의 다른 책도 훑어 읽은 기억이 나는데 어디 창고에 있던지 아니면 버렸을 것 같다.
이 책을 2014년 즈음 읽은 듯 하니 한 때 이런 글도 읽었구나. 그저 그럴 뿐이다.
2021년 '명상/선'으로 분류 되는 책들은 거의 손을 대지 않는다..
아주 가끔 현정선원(현정선원 (fuoyee.or.kr))에 들러 글을 몇 개 읽었는데 대우거사님도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지 이 마저도 2015년 이후 업데이트가 없다.
요즈음은 가끔 젊은 수행자들의 책을 사 볼 뿐이다.
나에게 얻어 걸린 김영식님, 설지스님, 시현스님의 작품을 좀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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