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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와 개(趙州狗子) <종용록, 제18칙>
한 스님이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준동함영(蠢動含靈)이라, 모두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개는 왜 없습니까?”
화상이 이르되
“달리 업식성(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한 스님이 화상에게 묻는다.
“개는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
“있다면 어째서 피대(皮袋)속에 들어가 있습니까?”
화상이 이르되
“알기 때문에 더욱 범(犯)한다.”
조주구자(趙州狗子) <무문관, 제1칙>
한 승이 조주 화상에게 묻는다.
"개(狗子)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말한다.
"무(無)'
(만송 행수의 '종용록'에서의 해설)
송대의 원오극근은 조주의 선을 구순피선이라고 하였다.
임제나 덕산처럼 방과 할을 사용하지 않고 말을 자유자재로 하여 수행자를 접화했기 때문이다.
--> 口脣皮禪. ‘구순피’는 입과 입술을 가리키고 '구순피선'의 의미는 훌륭한 법문을 뜻한다고한다.
--> 臨濟喝(임제할)은 고함치기, 德山棒(덕산방)은 몽둥이질이라고 한다.
(오가와 다카시 교수의 해설)
중국선종사를 전공하고 고마자와 대학 종합교육연구부 교수인 오가와 다카시 (小川隆)의 해설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몽십야'란 소설에 두 번째 밤에 주인공이 좌선하면서
'조주무자' 공안에 씨름하는 묘사가 나옵니다.......
조주무자가 송나라 대혜의 <간화선>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공안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쓰메 소세키(1867~1916)는 메이지 시기 최고의 고명한 고승 '소엔'선사(1859~1919)에게 선을 배웠다고 합니다.
소엔 노사는 무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무란 없다는 뜻을 지닌 글자인데 과연 없다는 뜻일까?
유무의 무인가? 아니면 단무(노란무)의 무인가? 어떤 무인가?"
조주의 무는 있나 없나 하는 물음에 '없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다.
있고 없고를 넘어선 절대적인 '무'를 나타내는 것이며, 논리를 버리고, 온종일 이 '무'자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 엥,, 겨우? 이런.. 끝??
(김영욱연구원, '화두를 만나다'에서 해설) (2007년)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에게도 그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주는 "무라고 대답했다. 다시 한 번 조주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자 이번에는 "유"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결코 물들지 않는 청정한 불심이 어떻게 더러운 개의 몸 속에 들어갔을까?
양 갈래로 나뉜 조주의 말에 숨은 의도는 무엇일까?"
이 화두를 푸는 해결책은 유/무 어디에도 없는 듯이 보이지만 이 두 가지를 완전히 벗어난 곳에서 모색해도 안 된다. 조주가 던진 유/무 그대로라 보면 그 말에 오염되고, 반대로 그것을 모두 벗어나려 하면 어디에도 뿌리내릴 곳이 없어 공허해진다. 그대로도 안 되고 벗어나도 안 되는 이 긴장이 화두 공부의 근본 에너지다.
어떤 화두도 낚싯바늘에 꿴 미끼와 같은 것이다.
드러난 말을 그대로 믿고 덥석 무는 것은 그것이 배를 채우는 먹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조주의 의도는 물고기를 잡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유/무 등 어떤 미끼에도 유혹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노닐도록 하는 데 있었다...
유/무 어떤 것을 물어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함으로써
두 가지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모두 풀려나게 하는 것이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어 숨을 내쉬지도 들이쉬지도 못한다.
숨통이 막히는 바로 이 자리가 무자와 대결을 할 수 있는 최적의 무대인 것이다.
(장웅연, 한국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에서 해설)(2016년)
장웅연씨는 <벽암록>에 있는 문장을 써서 해설한다.
"누군가 조주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부처님은 일체중생 모두가 불성을 갖고 있다 했는데, 왜 개에게만 없다는 겁니까?"
"자기를 '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업식(業識))"
조사선의 세계관은 즉물적이다. 무언가를 보면, 보기만 한다.
엿보지도 않고 넘보지도 않고 넘겨짚지도 않는다. 인식만 하고 분별은 안 한다....
옛 선사들은 개를 그냥 개로 바라볼 뿐 '개똥같은 것'이라고 부풀리거나 업신여기지 않았다.
스스로를 개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업식이, '개나 물어갈 현실'을 만들고 '개만도 못한 놈'의, 짓거리를 부추긴다.
개가 먹는 밥이나 주인이 먹는 밥이나, 결국엔 똥이 될 밥이다. 밥을 먹는 위치가 다를 뿐 가치는 다르지 않다.
새가 새여서 날 수 있고 산이 산이어서 단단하듯, 개는 개여서 완전하다.
--> 이 배는 또 어디 산을 가는건지?
--> 내공이 달리는 데 자기 기운보다 긴 호흡으로 어줍지 않은 무문의 '송' 흉내를 내는 것은 나 같은 비전문가 봐도 over action으로 보인다..
(강신주,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에서 해설) (2014년)
강신주씨는 <조주록>에 있는 문장을 써서 해설한다.
어느 스님이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 것 아닙니까?"
조주는 "없다(無)"라고 대답했다.
스님은 물었다.
"위로는 여러 부처들, 아래로는 개미까지도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개에게 없다는 겁니까?"
그러자 조주는 대답했다.
"그에게는 업식성(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다."
업식(業識)은 집착을 낳는 근본적인 의식, 알라야 의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업식성은 집착과 번뇌로 괴로워하는 평범한 중생의 마음을 가리키는 겁니다.
결국 업식성은 불성의 반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있는 그대로 자신과 세상을 보려면, 자신의 과거 행동으로 만들어진 습관적 무의식의 제거해야만 하니까요.
그러니까 습관적 무의식이 작동한다면,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처가 되었다면, 우리게에 습관적 무의식은 겨우내 쌓였던 눈이 봄이 되어 햇볕에 녹아 버리듯이 그렇게 사라져 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는 다릅니다.
홍선 스님은 개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처럼 깨달은 사람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말도 덧붙입니다.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불성이란 개념적으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이나 혹은 부처가 될 수 있는 바탕을 가리키니까요
이미 실현되었다면 잠재성이니 바탕이라는 말은 사용할 수 없는 겁니다.
조주 스님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업식성이 있다면 불성이 있어도 부처가 될 수 없다고 암시하면서 말입니다.
조주 스님은 지금 우리가 반드시 끊어야 할 업식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주 스님은 우리에게 불성이니 뭐니 이야기하지 말고 업식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라며 되묻고 있습니다.
"네게는 업식성이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전자라면 아직 부처가 아니고, 후자라면 부처가 된 겁니다.
--> 아.. 참... 조주 스님이 이 해석을 보면 정말 경을 치고 쓰러질 일이지 않을까?
<무문관>을 편찬했던 무문 스님이 조주의 '무자' 즉, 무라는 글자에 주목하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일개 문자로 이루어진 경전의 권위에도 굴복하지 말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불성이라는 개념의 권위에도 굴복하지 마라는 겁니다.
--> <무문관> '평어'에서 무문 스님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이 '무'를 허무의 '무'나, 있다의 반대인 없다(무)의 '무'로 참구해서는 안된다."
(한형조교수님의 번역은 좀 더 한글 스럽다)
"<없다>를 공허나 결핍으로 여기거나, 또 유와 무의 상대적 공간에서 읽으려 들지 마라...
대체 <없다>로 어떻게 훈련해야 하나. 심신이 기력을 끌어모아 이 <없다>에 집중하여
흐트러지거나 끊기는 법이 없으면, 촛불에 문득 불이 켜지듯 그렇게 소식은 찾아올 것이다."
(한형조 교수,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의 해설)(1995년)
대승은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 유정 무정에 관계 없이 불성은 편재한다고 선언했다.
사정이 그렇다면 학인의 질문에 합당한 대답은 "아무렴, 불성이 있지"여야 한다.
그 대답에 학인은 자신의 공부가 틀리지 않았음을 알고 안도(?)할 것이다. 선은 이 안도를 가로막고 나선다.
눈앞에 보이는 세계, 상식이 짜 놓은 지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구원은 없다!..
화두는 일차적으로 충격의 장치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선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학인은 이런 황당무계와 속수무책을 해결하고 문제 밖으로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생사의 언덕에서 헤메다가 다음 생의 윤회를 기다려야 한다.
조주의 "없다"는 불교적 교리의 틀 안에서는 해결될 전망이 없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우리는 어제의 그 누더기 그대로인 것이다.
길은 논리와 사유와 상상력이라는 일상적 정신 활동의 통로를 봉쇄해야 열린다....
그리하여 학인은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밀어넣어졌다. 이 깜깜한 절벽, 어두운 칠통을 어떻게 타파해 나 갈 것인가.
의식적 모색의 길이 막힌 에너지는 압축되면서 무의식의 심층으로 내려간다.
수직으로 내려가는 에너지는 집중의 강도에 비례하고 표면적의 크기에 반비례한다...
전신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지속적으로 파지하면 의식과 욕망에 의해 분리된 에너지가
점점 무의식에서 통합되어 나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촛불에 불이 켜지듯 <안과 밖이 하나라 합쳐지는> 순간이 온다.
그것은 자연스럽지만 존재의 대전회를 알리는 경천동지이다.
--> 조주 스님이 그 현장에서 그 스님에게 '무'를 던진 상황과 목적에 가장 맞는 해석이 아닌가 싶다.
--> 수행자가 아닌 경우 이 정도의 해설이라면 대중을 위한 가장 정확하고 합당한 전달이 아닐까??.
--> 한형조교수님은 유학을 전공한 동양철학자로 대학 교수로 계시다고 한다.
아래 마음과 철학(불교편)에 '경허'관련 부분을 작성하시었다.
(성본스님, 논문 '간화선의 본질과 수행 구조'에서 해설) (2007년)
현재의 한국불교에서는 고려시대 보조지눌과 혜심 등 수선사의 정해결사 이후로 간화선의 수행체계와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주로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선수행만이 중심이 되고 있고.....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정법의 안목 없는 선사들이 경전이나 어록, 공안집을 제대로 후학들에게 가르치지 못하고, 학인들이 경전이나 어록 등을 읽고 보는 것조차 못하게 하여 불법의 본질과 정신을 모르는 불교인들을 만들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간화선의 특징은 조주의 무자 화두(공안)만을 유일한 공안으로 참구하며 참선 공부를 하고 있는 점이다....
사실 간화선의 근본은 조주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며, 간화선의 수행에서 본래심을 조고해보는 도구(방편)로서
조주 무자 공안을 능가하는 체계적인 공안은 없다.
대혜선사는 대정장에서... 조주 무자를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부디 쓸데없는 사량분별의 마음을 '무'위에 올려 놓고서 시험삼아 사량해 보시오....
먼저 세간의 번뇌를 사량(思量)하는 마음을 사량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돌려서 시험삼아 사량해 보시오
어떤 곳이 사량이 미치지 못하는 곳인가?
이 '무'라는 한 자야말로 온갖 잘못되고 그릇된 지혜를 쳐부스는 무기입니다.
이 무를 깨달으려면 유무의 상대적인 의식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도리로서 무를 알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의식으로 사량해서도 안 됩니다."
불교의 정신과 정법의 안목은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한다고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무자'공안 혹은 '이뭣고?'등의 화두를 참구한다 할지라도 불법의 정신과 안목은 체득되지 않는다.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것은 각자의 번뇌망념에서 초월하여 근본적인 본래심으로 되돌아게 하는 방편일 뿐이다.
무자 공안을 참구하여 깨닫게 되면 무슨 신통 모용이 이루어져 만법을 모두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참선하는 잘못된 수행자가 많은데, 이러한 지도자를 만나면 평생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귀중한 인생을 무모하게 낭비하는 것이 된다.
부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일을 가장 잘 알고, 지혜와 인격을 구족한 인천의 스승이라고 칭송받고 있는 것도
그만큼 이 세상의 모든 일과 중생들의 고뇌 등 많은 일을 경험하고 깨달아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수많은 중생들의 고뇌를 치유할 수 있는 처방의 지혜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휘옥,김사업, '무문관 참고'에서 해설) (2012년)
승이 질문한 진짜 의도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지의 유/무를 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의 불성,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누구에게나 있는 '불성',
그것을 말로 설명하지 말고 지금 내 눈앞에서 실제로 보이라는 데 있다.
불성은 '부처의 본성', '부처가 될 가능성' 어느 쪽으로도 해석된다.
선은 언제나 '이 순간', '이 자리', '자기'를 문제로 삼으므로, '불성'을 '부처인 본성'으로 본다.
'부처가 될 가능성'은 미래의 이야기일 뿐이다.
승은 지적 이론이나 추상적인 설명이 아닌 진짜 불성을 눈앞에 보여달라고 다그친다.
조주가 '무' 공안을 던진 의도는 오로지 무자기, 무아가 되어 '무' 그 자체가 되라,
그리고 '무'가 된 당체(當體)를 지금 내 눈앞에 보이라는 것이다.
'무'를 뚫는 방법은 내 스스로 '무'가 되는 길밖에 없다.
--> 당체(當體): 불교 용어로 직접적으로 그 본체를 가리켜 이르는 말
책에는 '무'자 화두에 대하여 김사업교수가 일본 임제종 선사인 '미야모토 다이호오' 방장 스님과
독참을 한 내용이 실렸다. 이런 것은 어디서 볼 수 가 없는 귀한 글이다.
방장: '무'를 보았느냐?
김사업: 보는 자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방장: 설명은 필요 없다. 보았으면 본 것을 그대로 보여라. 자, 어떻게 보이더냐?
....
방장: '무'가 되는 것은 자신을 잊은 듯한 기분이 되는 게 아니다.
하물며 그 기분을 설명하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한 점 남김 없이 '무'에 죽어라.
'무-'하고 죽어서 오라는 게야. 크게 죽으면 크게 살아난다.
대보리심을 가지고 지지 말고 해봐
(자평)
간화선이나 묵조선이니 위빠사나 니 이런 수행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내가 느낀 바는 이렇다..
선은 묻는자와 답하는 자의 치열한 싸움이다.
목숨을 걸고 수행을 한 결과를 놓고 뚫는냐? 막느냐?를 결정하는 10초의 싸움이다.
목숨을 걸어 본 자들만이 언어나 행동이라는 무기로 온 몸으로 펼치는 진검승부다.
수행은 평생에 걸쳐 할 수 있지만 선사와의 전투는 평생에 한 번 기회밖에 기회가 없을 수도 있고
심지어 이번 생에 없을 수도 있다......
이 한 판을 날려 버린다면...
점검 받는 자 입장에서는 평생을 날릴 수도 있는 일이다.
점검 해 주는 자도 한 사람의 인생을 건 도전이기에 치열하게 응대해 줘야 하는 일이다.
특히 요즘처럼 선승이 불교방송만 틀면 나오고 유튜브만 접속하면 나오는 시대가 아니다.
또한 이 놈 저 놈 다 깨달았다고 이판사판 난리인 세상도 아니었다..
100리 1000리를 비바람과 눈발을 헤쳐서 10초에 싸움을 벌이고 올 판이다....
얼마나 귀한 10초인가?!!
이런 상황에서 말장난이나 언어 유희만 하겠는가..
이런 철저함과 절실함이 있는 상황이므로
대중작가가 쓴 '업식성(業識性)'에 대한 해설들은 되도 않는 소리다....
이런 절박함을 놓고 조주정도와 법거량을 하는 스님이...
또한 붓다 이후에 몇 손가락에 드는 스님인 조주가 업식성 정도 묻고 해설하셨겠는가?
일반인으로 무문관을 선사들의 목적과 의도, 눈높의 수준에서 읽으려 한다면
나는 가장 적합하게 해설된 책은 장휘옥/김사업 님의 해설이라고 본다.
대중서를 쓰는 작가들의 눈높이가 가장 낮은 것 같다.
적어도 불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나 수행을 하면서 글을 쓰는 분들이 책이 가장 적합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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