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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보다는 소설에서 배워라'는 자기계발저자이자 'Meaning 독서경영연구소' 소장인 안상헌씨가 쓴 2010년 책이다.
출판 당시 저자 소개글에 보면 3,000권 이상을 읽었다고 한다. 공공기관, 기업체 등에 자기변화와 혁신, 리더십, 고객만족 등에 관한 강의와 매체 기고 활동을 한다고 했다.
'카프카의 서재'는 소설가이자 인문학자인 김운하씨가 쓴 2013년 나온 책이다.
출판 당시 건국대학교 인문대학 몸문화연구소 연구원이라고 했다.
두 분다 베스트셀러 저자이고 필력이 좋은 것으로 소문이 나 있는 분이다.
우연히 두 책을 정리하다가 같은 책을 언급한 부분이 있어 두 분의 내공을 함 비교해 보고자 하는 (나쁜) 마음이 들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안성헌작가의 책 중... '거칠것 없는 인생,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카키스의 아버지 미할리스 대장은 아홉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터키인들 손에 교수형을 당한 기독교인들의 발에 입을 맞추게 함으로써 그들의 죽음에 경의를 표하게 하고는 아들에게 명령했다.
"잘 보고, 죽을 때까지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아버지, 누가 이분들을 죽였어요?"
아버지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자유."
이마에는 '내 맘대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가슴에는 '자유를 위해'라는 깃발이 꽂혓으며, 팔과 다리에는 '세상을 정복한다'는 이상이 근육으로 뭉쳐진 조르바는 카잔차키스가 만난 인간 군상들 중 가장 특이하고 가장 저돌적이면서 가장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였다.
조르바는 '지금 이곳에 집중하여',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아주 특이한 사람이었다.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하게 하는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못 하나 박을 때마다 우리는 승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마 대장보다 반거충이 악마를 더 미워하십니다."
자신을 구속하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엇인가 자신을 구속한다 싶으면 그는 과감히 그것을 먼저 정복해버린다.
"내가 뭘 먹고 싶고 갖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구멍이 미어지도록 처넣어 다시는 그놈의 생각이 안 나도록 해버려요. 그려면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는 겁니다....이게 사람이 자유를 얻는 도리올시다. 내 말 잘 들어요. 터질 만큼 처넣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돼요. 생각해봐요. 두목, 반쯤 악마가 되지 않고 어떻게 악마를 다룰 수 있겠어요?."
모든 걸 걸고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는가? 인생을 걸고 모두 해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목표는 있는가? 아니면 어쨌든 끝장내버리고 싶은 일이라도 있는가? 무엇을 허물어야 할지 알지만 무엇을 세워야 할지 모른다면, 그런 삶에는 방향이 없는 거다. 파괴적일 뿐 건설적이지 않다. 반면 조르바는 저항한다. 정복한다. 다스린다. 그리고 떠난다.
자유는 방향을 가져야 구체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 '무엇을 향한 자유인가'가 자유의 가치를 드러낸다.... 당신은 어떤 '방향을 가진 자유'를 꿈꾸는가? 조르바는 자기를 향한 자유, 바로 그것을 꿈꾼다.
자기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다.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삶을 돌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르바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무엇을 향한 자유를 꿈꾸는가?"
(김운하작가의 책 중..... '나는 거절한다, 삶이 아닌 모든 것을')
"그런 점은 이해하셔야 합니다. 나는 인간이니까."
"인간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요, 조르바?"
"자유라는 거지!"
"인간은 자유다!" 라는 외침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야말로 온몸으로 보여주는 사내,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의 약함과 고통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사랑으로, 손을 내미는 데 그치지 않고 목숨까지 단호히 내 걸 수 있는 진짜 용기를 가진 이 늙다리 열혈남아를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 그리스인 조르바(나에게는 희랍인 조르바가 더 익숙하다)를 생각하면 나는 항상 앤소니 퀸이 떠오른다. (중학교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토요명화인가? 주말에 명화인가? 기억은 없지만....)
--> 영화에서 본 이 표정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 또 다른 잊혀지지 않는 표정.....오드리헵번과 비비안 리의 미소...
카잔차키스는 실존 인물인 '게오르게 조르바'를 모델로 삼아 조르바의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그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호르메스, 붓다, 니체, 베르그송과 함께 게오르게 조르바를 자신의 영혼에 가장 깊은 자취를 남긴 사람이라고 쓰고 있다.
--> 게오르게 조르바란 분이 어떤 분이길래, 이런 분들과 같이 분류가 될까? ...게오르게 조르바란 분의 사진은 인터넷에 있기는 하다..
--> 김운하작가의 책에는 '게오르게 조르바'라고 나오는데 최근에 그리스 원전을 번역한 유재원교수의 인터뷰에는 '요르고스 조르바'라고 나온다....1917년 카잔차키스가 고향인 크레타 섬에서 갈탄 사업을 벌였고, 당시 실제로 만나 함께 일했던 요르고스 조르바(Georgios Zorbas, 1869~1941년)가 바로 그 조르바라고 한다. 아마 유재원교수님이 맞을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친구로부터 '책벌레'라는 농담을 듣고는 마음속 깊이 분노한다...."인생을 그토록 사랑하던 내가 어쩌자고 그것을 책 나부랭이와 잉크로 더럽혀진 종이에다 그토록 오랫동안 처박아둘 수 있었던 말인가!" 라며서 행동하는 인생을 살고자 결심한다.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 조르바에게
--> 내 10대 말~ 20대 초반의 정신을 빼앗아 갔던 '오쇼 라즈니쉬'는 그 당시 나온 수많은 책에서 늘 반복적으로 '조르바 붓다'를 21세기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제시했다. 아마 그래서 이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술, 여자, 음식, 춤.... .이런 것들에 집착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자유라면 너무 동물적이지 않은가? 쾌락주의적인 삶을 누릴 자유라는 것이 과연 조르바가 말하는 자유의 전부란 말인가?.......조르바는 마구잡이로 살아가는 막장인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조르바에게는 이 모든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의 행동은 원시적인 야생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순진무구한 시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한낱 짐승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수수께끼, 인간이란 야만스러운 짐승에 지나지 않습니다."
--> 내가 아는 지식으로 경허, 만공, 특히 춘성선사 같은 선사의 '무애행(無碍行)'과도 유사한 것 같다. 좋게 말하는 자들은 '어느 것에도 걸림이 없다'는 것이 무애행(無碍行)이라 한다. 나쁘게 말하는 자들은 막행막식(莫行莫食)이라고 한다.
---> 경허선사가 나병여성환자와 동침한 사실, 어머니가 계신 설법장소에서 옷을 벗은 사연, 춘성선사의 거침 없는 성적(??)인 설교는 아주 유명하다...
--> 박경준 교수는 '나를 끝없이 죽여 가며 동시에 나를 끝없이 살려내는, 그 중도적 노력과 실천'이 무아행이라 한다.
--> 대체적으로 무애행은 그 행위의 목적이 남을 위한 이타심에 출발한 것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타심이 없으면 파계라고 본다.
--> 내가 이런 경지를 모르기 때문에 모를 일이다...다만 붓다가 80에 돌아가실 때까지 무애행을 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래서 그 정도의 경지가 아니라면 무애행이라는 말로 파계라는 주접을 떨지 말고, 보임(保任, 닦아 나아감)이 깨달은 자의 행이 되야 한다는 생각이다....
현실에 충실한 삶의 태도는 쾌락주의저기기도 하지만, 실상 그는 단순한 쾌락주의를 넘어선 지점에 서 있다. 조르바의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것은 계산하지 않는 열정에 있다.
조르바는 결코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잃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으면서 위험 없는 쾌락을 즐기려고만 드는 현대문명사회의 째째하기 짝이 없는 쾌락주의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내가 무엇보다도 부러운 건 세상을 대하는 조르바의 태도이다. 그에게는 이 세계가 하나의 신비롭고 경이로운 수수께끼다. 그에게는 나뭇잎, 돌맹이, 바다, 새... 이 모든 것이 신비이고 놀라움이다. 그리고 더 놀랍게도, 그는 일상 속에서 늘상 보아오던 것들조차도 마치 처음 보는 낯선 것인 양 경이로운 시선으로 관찰할 줄 아는 신선한 눈을 가졌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그는 소리친다. "이 신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의 신비는?"
"놀랍지 않소, 두목?"
"무엇이?"
"글쎄요, 이 세상에 노새 같은 게 산다는 사실 말이오!"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비로운 것이다." -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나 혼자만 발기 불능의 이성을 갖춘 인간이었다. 내 피는 끓어오르지도, 정열적으로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했다."
정치와 도덕, 종교, 사상적 본능을 억압하는 위선적인 도덕 등 삶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인위적인 계율을 거부한다. 때문에 조르바의 자유는 삶의 모든 면에 걸쳐 투쟁적이고 치열함을 요구한다.
조르바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믿는다. 자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내장으로 삭여낸 것들만 믿는다. 나머지는 모두 허깨비일 뿐이다.
초라한 한 조각의 삶을 안전하게 더듬거리며 살아 가기 위해 하찮은 겁쟁이 인간들이 주변에 세워놓은 도덕이나 종교나 고행 따위의 모든 울타리를 과감하게 때려 부순다.
조르바가 도달한 삶의 궁긍적인 철학은 보편적인 생명에 대한 무한한 연민과 사랑이다.
만일 인간 세상에 보편적인 윤리란 게 가능하다면, 그 윤리의 출발점은 조르바가 말한 바로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하고 느낄 수 있는 감수성, 즉 모든 생명이 고통받고 상처받을 가능성이자,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연민의 대상일 뿐이라는 그런 유대감이 아닐까?
---> 좋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의 신화)
(안성헌작가의 책 중.....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순간에만 비극이다.)
"인간의 가슴속에서 울려 퍼지는 미칠 듯한 명징에의 요구와 이 불합리한 세계의 충돌,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
떨어질 줄 알면서도 계속 바위를 짊어지고 올려놓아야 하는 이런 부조리의 형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카뮈는 시지프의 운명에서 '새로움도, 희망도 없이 시계추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했다.
우리가 삶에 대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그 순간에만 비극이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권태로움의 벽을 마주하는 것이다. 즉, 권태란 자신과 삶이 보잘것없고 가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할 때 찾아오는 질병인 것이다.
시지프는 결코 삶이 고통스럽다고 포기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운명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고통을 안겨준 신들을 도리어 비웃고 멸시한다. 카뮈는 이런 시지프의 긍정적 자세와 용기 있는 행동을 경배하며, 무용하고 부조리한 노동의 형벌은 '반항'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일상을 긍정하고 저항하며 주인이 되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 그것이 시지프의 해법이었다.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다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그들의 탈출은 지금의 일터에서 자기만의 뿌리를 견고하게 내리는 것만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운하작가의 책 중.....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저마다 다른 것에 중독되어 있다. 나는 존재하는 것에 중독되어 있다." - 페르난도 페소아
"나는 왜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가?" 카뮈의 이 책을 이야기하려는 것도, 이 문제가 해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지프의 신화> 는 내 인생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삶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길 바라지만, 불현듯 어떤 계기로 이 세계가 근원적으로 어떤 의미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져 단지 죽음이라는 무를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자각할 때 찾아드는, 주관적 의식과 이 세계 사이의 모순과 괴리가 바로 부조리이다....다시 말해 부조리란, 이 세계 자체의 객관적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대립이요, 그러한 대립에 대한 의식적 자각이다. 부조리한 감정은 바로 이런 모순을 의식하는 순간에 찾아드는 허무와 절망의 감정이다.
다만 어느 날, '왜'라는 의문이 고개를 드는 순간, 모든 것은 놀라움의 빛깔을 띤 권태 속에서 시작된다.
무목적이고 무의미한 노동을 영원토록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신들이 시지프에게 내린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다.....이런 무시무시한 상황을 의식하는 것이 바로 부조리의 감정이요, 카뮈의 부조리 철학이 출발하는 지점...
물리계든 생물계든, 세계는 원초적으로는 어떤 '의미'라는 속성을 갖고 있지 않다....생명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시지프처럼 형벌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카뮈는 세 가지 선택지를 내놓는다. 자살하든가 종교에 위탁하든가, 반항하든가.
첫 번째 선택지인 자살... 해결책이 못된다...부조리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해소'할 뿐이다....죽음으로 도망가는 것, 체념에 불과하다.
두 번째 선택지인 종교에 귀의하는 것....자기를 포기하고 신에게 자기를 맡기는 행위는 역시 부조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비겁하게 회피할 뿐인 손쉽고 편리한 방법이다.
카뮈가 추천하는 선택은 '반항'하는 것이다....."반항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철학적 태도"이다....생의 무의미를 명료하게 의식하는 채로 끝까지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반항이다.
카뮈가 말한 반항은...부조리에 대한 반항이다......무익하고 희망이라곤 없는 노동뿐인 삶을 불굴의 의지로 감내하며, 부조리를 명료하게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 한마디로 "사막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버티는 것." 그것이 카뮈가 말하는 반항이라는 개념의 의미이다.....반항하는 인간은 부조리를 명료하게 의식하며 살아가는 영웅과도 같다. 부조리를 버티며 사는 부조리의 영웅이다.
---> 나는 이 문장에서 니체의 영원회귀와 스톡데일 패러독스가 느껴 졌다.
나는 부조리를 의식함에도 부조리를 살아갈 정신의 자유와 의지를 가진 존재이며, 나의 자유로 생의 모순과 부조리를 끝까지 살아냄으로써 내 운명과 삶의 완전한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삶이 자신에게 관대하든 아니면 잔인할 정도로 혹독하든 간에, 그는 삶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어쨌거나 삶 자체는 아무 말이 없다. 그저 오고 갈 뿐이다. 다만 우리가 삶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댈 뿐이다.
---> 그러므로 중/고등학교 때 읽었던 푸쉬킨의 시는 그 이후 마음에 새겨든 적이 없고, 니체와 카뮈는 20대 ~50대까지 내 마음을 파고 드는 것이다....푸쉬킨의 시는 20대에 읽어 버리는 자기계발서적과 같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장식한다.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야만 한다.
"그때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정말로 잘한 일일까?"
"그다지 의미가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고, 그다지 행복하지 않아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행복은 삶의 의미가 아니다. 의미 있는 삶은 단지 행복을 위한 삶이 아니라,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들이 있는 삶이다." - 철학자/인지과학자 폴 새가드
--> 요 책에 나오는 말..
질문을 던지는 자들과 그 질문을 이해할 수 있는 자들이 없다면, 세계에는 어떤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삶 속에서 삶 자체를 온몸으로 경험하면서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삶을 겪는 주체인 자기 자신이 궁금적으로 무엇인지를 매 순간 질문하고 경험하고 자신만의 답변을 찾고,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며 나누는 과정 전체가 삶의 의미이다.
---> '삶은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이야기다'라는 주제로 데이비드 브룩스 (David Brooks)가 쓴 책 '두 번째 산'은 이를 더 욱 명확하게 설명해 준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부조리를 사는 것이 아니라 신비와 미스터리를 살아간다. 신비로운 삶과 존재를 느끼고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 삶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기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내가 죽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이자 나의 삶의 의미이다.
[ 자평 ]
책을 어떤 목적이나, 시각에서 읽는지는 독자의 몫이다.
돈을 주고 값을 치렀기 때문에 라면받이를 하든, 평생을 두고 읽든, 쓰레기통에 갔다 버리든 소유주의 자유다.
내가 익숙하지 않은 분야에 책을 고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서평에 대한 책을 자주 읽는 편이다.
괜찮은 요약과 자기 경험으로 좋은 책으로 안내해 주는 좋은 서평집이 꽤 있었다.
대체적으로 나에게 책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이 있기는 하다.
내 전공분야인 경제/경영분야의 책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쓰레기 같은 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가끔 평균 이상의 질이 나오는 책도 있다.
내 전공분야가 아닌 소설/시/인문학/사회학/과학서적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평균적인 질의 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가끔 꽤 괜찮은 책이 나오기도 한다.
적어도 내가 익숙한 경제/경영분야에서는 자기계발이라는 (불가능하고 의미도 없는) 목적으로 사람을 꾀는 자들이 많다. 조심하자....대부분은, 아주 높게 쳐준다면 돈주고 사지 말고....도서관에서 필요한 부분만 보고 반납하라..
그 돈이 있으면 기부하거나 국내 소설/시 사주는 것이 경제/경영에 더 기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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