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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상은 인류가 자연 세계와 동떨어진 채 인간들끼리의 세계에서만 살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한다. 또한 인류가 다양한 비인간 사물들과의 관계, 즉 하이브리드의 세계 안에서 삶을 영위해 왔음을 분명히 자각하고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유한다.
인간중심주의적 이분법의 뿌리는 서구 르네상스의 휴머니즘과 17세기 근대 철학의 기초를 놓은 르네 데카르트의 이원론(정신/물질)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940~1960년대 서구 사회 과학 분야에서 지배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기능주의와 구조주의는, 사회가 안정된 체계 또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고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유기적 관계가 어떻게 사회의 통합과 질서를 나타내는가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치중했다.
1970년대에는 자본주의 호황이 끝나고 베트남전 반발등의 영향으로, 사회의 갈등과 변혁을 중요시하며 이를 계급 투쟁의 역사 유물론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마르크스주의가 큰 영향을 발휘했다.
사회운동이 잦아든 198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가 쇠퇴하고 포스트구조주의와 사회 구성주의가 대두했다. 사회를 일종의 언어적 구성물로 보고 다양한 의미 해석을 통해 사회 현상을 설명하려는 '언어적(문화적) 전환'이 지배적 패러다임이 된 것이다.
언어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물질성의 중요한 역할을 간과한다는 자각이 2000년대부터 일어났다. 자연, 공간, 인공물, 기술 등 비인간 사물들 또는 사회의 핵심 구성 요소라고 파악하는 '물질적(존재론적) 전환' 또는 '신유물론'이 사회 과학 전반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
21세기 사상의 공통점은 모든 근대주의적 사유의 토대를 이루는 인간 중심적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다는데 있다.
21세기 사상의 탈인간중심주의를 대표하는 인류학자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에 의하면....'우리는 스스로를 인간으로 보고 재규어를 포식자 동물로 보지만, 재규어는 자신을 인간으로 보고 우리를 재규어 자신이 잡아먹을 동물로 본다. 동물도 인간과 동등하게 생각하는 행위자'라고 한다.
서구적 근대주의적 사유에서 보면 아마존 원주민의 우주론은 비합리적인 야만인의 사유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중심적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21세기 사상에서는 지구적 생태 위기를 극복할 희망을 원주민의 사유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아마존 원주민은 동물, 식물, 무생물, 기상 현상, 인공물 등 모든 비인간에게도 인간과 동등한 영혼이 있다고 보고 이들과 공존하고자 한다.
21세기 사상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다양한 인간 및 비인간 행위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21세기 세계에서 기후 변화, 생태 위기, 과학 기술의 획기적 변화 등 하이브리드적 현상들이 점점 확대 및 심화되고 있다면, 인간 중심적 이원론에 기초한 20세기 사상은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해결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인간과 비인간을 동등한 행위자로 보면서 그들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결합을 이해하려는 21세기 사상의 탈인간 중심의 일원론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 휠씬 더 필요하고 적절하다.
(브뤼로 라투드(Bruno Latour): 인간만이 사회를 구성하는가?)
21세기사상은 주체/객체 이분법을 벗어나 비인간을 인간과 동등한 행위자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 비인간을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는 도덕적 주장을 펼치는 것은 아니다.
라투르는 총기 살인에 관해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 총기 살인은 총과 사람이 연결된 집합적 행위자 '총-사람'이 초래한 결과다. 총은 위험한 무기이지만 벽장에 따로 놓여 있다면 살인은 저지를 수 없다. 사람은 격분하더라도 손에 총이 없다면 살인까지 저지르기 쉽지 않다. 그런데 총이 사람 손에 쥐어지면 그 결합으로 인해 총의 속성과 사람의 속성이 서로 교환되고 동시에 두 행위자가 변하면서 총기 살인이라는 집합적 행위가 일어난다. 총기살인은 총과 사람이 '공동 구성'한 결과인 것이다.
라투르의 이론은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실험실 생활>(1979년)에서 과학 지식을 객관적 재현으로 보는 실증주의적 과학관과 과학 지식을 과학자 사회에 의한 사회적 구성물로 보는 사회 구성주의적 과학관 모두를 넘어서는 제3의 과학관을 제시...
인간 과학자 못지않게 비인간 사물도 과학 지식을 만들어 내는 행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균, 실험동물, 현미경, 시험관, 컴퓨터 등의 비인간 사물이 없었더라면 인간은 오늘날이 과학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 이런 맥락에서 인간과 비인간이 공동으로 과학을 구성한다고 통찰....
인간 과학자들이 비인간 사물들과 안정된 연결망을 구축했을 때 과학 지식이 비로소 성공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
비인간도 행위자로 간주한다는 것이 기존 사회 과학과 구별되는 ANT의 큰 특징...
실제 사회는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망
개코원숭이 사회는 인간 사회에 비해 압도적으로 규모가 작고 안정성도 떨어진다. 어째서 이렇게 다를까? 라투르에 따르면, 인간이 사회관계를 안정화하는 데 비인간 사물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신의 신체 외에도 도구, 기술, 무기, 교통 및 통신 수단 등을 개발하면서 더 폭넓고 안정된 관계를 영위할 수 있었다.
인간만으로 구성된 사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 즉 이질적 연결망이다. 그러므로 사회학은 사회적인 것의 사회학이 아니라 결합의 사회학을 지향해야 한다.
라투르는 <우리는 결코 근대적이었던 적이 없다>(1991년)에서 근대주의의 이원론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았다. 데카르트의 정신/물질에서 시작해 칸트의 주체/객체로 이어진 이원론적 사고에 따르면, 인간의 영역과 비인간의 영역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사회와 자연을 분리하는 과정을 '정화 작업'이라는 말로 표현했다.......근대인의 '정화된' 사고 방식과 모순되는 하이브리드화 실천을 '번역 작업'이라고 일컬었다.
인간은 하이브리드 생산이 가져올 결과를 알지 못한 채 하이브리드를 부주의하게 양산했고, 이 하이브리들이 만들어 낸 온실가스, 미세 먼지, 플라스틱 폐기물 등은 인간에게 또다시 비가시화된 채 전 지구적 환경 파괴를 유발했다.
생태 위기를 해결하려면 하이브리들에게 정당한 존재론적 위치를 부여하는 동시에 인간과 비인간의 바람직한 결합을 추구하는 새로운 원리, 즉 하이브리드의 역할을 가시화하는 인식과 실천의 원리가 필요하다.
사물의 의회란 어떤 하이브리드를 사회에 수용할 것인지, 수용할 경우 어떤 위치와 역할을 부여할 것인지를 인간과 비인간의 다양한 대변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고 결정하는 민주적 포럼을 뜻한다. 유엔의 기후 변화 회의가 그 예 중 하나
지구적 생태계를 '신기후 체계(new climate regime)'이라고 명명하고....제임스 러브록이 1960년대 말 제시한 '가이아' 개념에 주목.....라투르는 자연 개념보다 러브록의 가설이 신기후 체계의 인간 활동과 자연 세계, 그 사이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수많은 연결과 행위자들을 묘사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2018년 지구 시스템 과학자 티모리 렌턴과 '가이아 2.0' 이론을 발표.......인간은 기술과 공진화하며 지구의 자기 조절 과정에 개입한다. 인간은 스스로 기후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더 잘 인식하게 되면서 자신의 행동을 의식적으로 조절하는데, 지구 또한 인간의 개입에 따라 재차 작동 방식을 바꾼다...
---> 2019년 9월 발행된 과학잡지 '에피'(9호)에 '가이아 2.0 : 인간은 지구의 자기-규제에 자기-인식을 더할 수 있을까?'
(메릴린 스트랜선(Marilyn Strathern): 전체론으로는 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는가?)
포스트모너니즘의 다원주의는 사람들이 같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학문적으로 검토하고자 했다.
1980년대까지 서구의 인류학자들은 자신들이 비서구를 객관적으로 기술했다는 데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런데 비서구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기 시작하자 그 기술이 '서구의 시선에 의한 비서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다원주의는 저마다 다양하고 무수히 많은 세계를 논하려 하지만 왜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귀착될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전체일 수 없으며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부분들 사이의 상호 관계로 대체된다.
전체론은 인류 문명사의 측면에서 낡은 사고방식이다......전체론이 문명적 인간의 사고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약 5,000년 저 도시 혁명 이래로 인류가 비대칭적 관계, 즉 힘의 불균등한 관계를 용인하면서 힘 있는 자의 시야를 세계에 대한 앎과 등치해 왔기 때문일 것....그러나 인류가 비대칭적 관계와 시선을 허용하지 않는 이상, 이제는 새로운 관계와 앎을 모색해야 한다.
전체라고 구상되는 세계 속에 타자가 그저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할 때 우리는 타자의 세계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생명의 궤적은 그 각각의 세계가 무수한 관계들에서 나왔음을 알려 준다.
지식은 세계를 어떻게 전체로 구상하는가에 있지 않고, '어딘가'에서 온 세계와 어떻게 관계할 것이며 그 속에서 무엇이 생성되는지에 있다.....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잃어버린 관계를 되찾으라.....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1991년 출간한 <부분적인 연결들>은.... 근대 유럽 중심의 전체론적 사고를 넘어서는 '탈전체론'을 획기적으로 시도....주목받지 못했다.....2000년 이후 ...'존재론적 전회'라고 불리는 새로운 학파의 시초로 재평가됨...
(로저 브라이도티 (Rosi Braidotti): 포스트휴먼은 어떻게 지구 행성의 새로운 유대를 만드는가?)
포스트휴먼으로서 슈퍼히어로는 신체 개조와 지능증강으로 인간의 유한성을 뛰어넘는 지적/물리적 능력을 발휘할 뿐 아니라 보통 인간의 신체로는 불가능한 영속적 자기 보존을 실현한다.
한계없는 인간에 대한 갈망의 역사는 1818년 영국에서 출간된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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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철학자 로지 브라이도티는 대표작 <포스트휴먼>에서 인간의 능력을 강화해 인간중심주의의 패권을 강화하는 시도가 포스트휴먼적이라기보다 실은 휴머니즘의 이상에 가깝다고 비판하다.
근대적 패러다임의 근간을 이루는 휴머니즘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를 인간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근대적 인간이라는 개념은 데카르트의 코기토, 자유 의지의 실천 행위자, 기독교 문화권의 백인 남성 이성애자, 사유 재산을 소유하는 시민을 지시할 뿐이다. 휴머니즘은 자기 규율의 주체이자 심신이 일치하는 개인을 모든 가치 판단의 척도로 삼는다는 점에서 철저히 인간 중심적 체계다. 휴머니즘은 또한 동일성과 타자성의 이분법, 역사의 진보와 발전을 허희구하는 계몽주의를 함의한다.
미셸 푸코는 휴머니즘이 전제하는 '인간'이 유럽이라는 특정한 지정학적 위치와 근대라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개념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브라이도티도 휴머니즘이 일종의 역사적 구성물로서 다양한 우발적 가치와 지역성을 지닌다고 이해한다.
--> 놀랍다. 이런 해석.....사회학자, 철학자들의 시대를 직관하는 눈빛이 살아 있는 분석이다...
포스트휴먼을 바라보는 입장은 크게 둘로 나뉜다. 기술의 개입 때문에 인간적 가치와 위상이 상실될 것이라는 부정적 시각이 있는 반면, 포스트휴먼을 의학과 과학의 진보로 이해하는 낙관적 시간이 존재한다. 그러나 두 관점 모두 포스트휴먼을 근대적 인간과 구별되는 새로운 존재 조건으로 규명하지 않는다.
---> 놀랍다. 낙관/비관, 긍정/부정의 입장을 넘어 그저 평균적 '중간'이 아닌 한 차원 높은 '제3자적 중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이 문장을 읽으면서 유교의 중용(中庸)과 불교의 중도(中道)가 생각났다. '상반된 대립의 구도에서 취하는 선택'을 나타내는 언어인 것은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혹은 같은지? 가 궁금했다.
---> 중용은 중간이 존재하는 상대적 대립(많다/적다, 크다/작다, 높다/낮다 등)에서의 그 중간을 말한다고 한다. 중도는 중간이 없는 모순적 대립(있다/없다, 옳다/그르다, 같다/다르다 등)에서 (원래는 없는) 중간을 선택하라는 말이라고 한다..... 이중표교수의 책에 나온다.
생명 공학의 게놈 프로젝트는 휴머니즘의 전제를 탈피하는 전환점이 되었다.....인간 신체를 인공적인 기관으로 대체하거나 그것과 합체하면서 신체와 기술이 상호 연계되고 합성되는 인터페이스를 본격적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상품이 된 신체는 보디빌딩, 컬러 컨텐츠 렌즈, 지방 흡입술 등 비교적 단순한 단계의 신체 향상부터 성형 수술, 인공 관절, 인공 치아 등 인공 기관의 직접적 체내 삽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형태로 사회에 수용된다.
브라이도티는 스피노자의 내재론과 들뢰즈의 존재론을 통과한 신유물론의 입장에서 포스트휴면을 설명한다.
불평등의 심화와 빈곤, 생태계 파괴 특히 복잡한 국제 관계와 맞물린 각종 분쟁, 난민 양상, 기후 변화 등의 전 지구적 문제에 정치가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은 휴머니즘으로 막아낼 수 없는 임박한 파국의 징후처럼 여겨진다......
브라이도티는 이 파국적 국면을 타개하는 실마리를 포스트휴면에서 찾는다. 포스트휴먼이 고전적 도덕과는 다른 새로운 윤리적 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휴머니즘이 실은 '로고스- 남근- 서구 - 인간중심주의'에 불과함을 폭로하고......
포스트휴먼은 인간의 생명을 넘어서 생성력으로서의 생명을 강조하고 정신과 신체, 자연과 문화, 주체와 객체를 나누는 이분법을 넘어선 시각, 즉 신유물론과 결합한 탈인간중심주의부터 구축되어야 한다.
인간의 정체성은 삶의 여정에서 생겨난 경험과 체험이 만든 자취의 지도다. 이는 후험적으로 구성되며 단일하고 통일적인 정체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볼프강 에른스트(Wolfgang Ernst): 디지털 미디어는 어떻게 인간의 시간성과 기억 방식을 바꾸는가?)
에른스트는 급진적 미디어 결정론의 시각에서 미디어가 기록의 실제 행위자라는 주장을 펼친다......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기록하는 주체가 인간이지만, 기술적 차원에서는 디지털 미디어들이다.......물리적 실체가 있는 기록은 오래되어 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거시적 시간성(macro-temporality)을 따르지만, 물리적 실체가 없는 디지털 기록은 사용자의 요구에 의해 문자나 이미지의 형태로 변환돼 일시적 의미를 전달할 뿐이다
시간 결정적 미디어는 고유한 방식으로 시간을 나누고 기록하고 조작하며 각자의 시간성을 생산한다.....일례로 기계적 저장 미디어인 사진, 축음기, 영화는 간헐적/순간적/반복적이라는 불연속적이고 단절적인 시간성을 문명에 선사한다. 반면에 전자 미디어인 라디오, 텔레비전, 비디오 등은 기계적 저장 미디어보다 더 짧은 시간 간격으로 신호를 처리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지각 범위를 초월한다. 이는 인간 문명에게 '실시간'이라는 새롭고도 비인간적인 시간성을 선사했다. 나아가 가장 짧은 시간 간격으로 작동하는 디지털 미디어는 미디어 역사에 혁신적인 단절, 즉 간격 기반의 시간에서 계산 기반의 시간으로 대전환을 이뤄 냈다. 디지털은 사용자 중심의 실시간 양방향 소통이라는 시간성을 제시함으로써 현실과 가상 공간 사이의 공유와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
각 미디어의 고유한 정보 처리 방식이 문명이 기억 문화에 드러나는 특징을 결정한다....미디어가 고유한 신호체계로 정보를 저장하고 전송하는 과정 자체가 역사를 이끈다...
21세기는 디지털 미디어의 미시적 시간성이 낳은 시대다. 과거의 물질적 기록은 안정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문화적 기억인 데 반해, 디지털 미디어로 기록하고 저장하는 텍스트와 영상은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기억 방식이다.
디지털 자료는.....언제나 똑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코드에서 기호로 늘 새롭게 생성되며, 단순한 열람을 넘어서 사용자의 참여로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된다.....종이 문서와 달리 끊임없이 움직이고, 업데이트되고, 연결되고, 재구성된다.....
미디어는 기회(signs)가 아닌 신호(signals)를 처리하며 인간은 이를 지각할 수 없다는 고유의 미디어 중심적 태제를 강조한다.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 인간과 비안간을 객체로 일원화할 수 있는가?)
정보 통신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이와 결합된 생산 및 소비의 변화가 어떤 형태로든 일어나리라는 점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와 같은 변화에는 수만은 비인간 존재가 새로운 관계망을 형성하고 인간이 거주하는 세계 안으로 들어온다는 특징이 있다.
인간이 수많은 사물들과 존재론적으로 뒤얽힌다는 점에서 '유사 객체' 또는 '유사 주체'가 된 것이다.
하먼은 사회를 주체와 연결하고 자연을 객체와 연결하는 관점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인간이라는 주체, 인간이 구성한 사회와 문화 등은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객체들과 다르지 않다. 인간만이 주체는 아니며 모든 것은 객체다. 자율 주행 자동차의 센서가 인간을 바라보고 있다면, 자동차의 인공 지능은 주체처럼 행동하는 객체이며 인간은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된다.
객체를 실재 객체와 감각 객체로 구분한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졌다면 이 사태는 실재 객체다. 누군가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거나 기록했다면 그것은 감각 객체다. 유령이나 귀신은 실재 객체가 아니지만 사회적 실체로서 문화에 존재하고 고유의 행동력도 있다는 점에서 감각 객체다.
객체는 실재 속성과 감각 속성 두 가지 속성이 있다. 실재 속성은 객체에 내재된 속성이고, 감각 속성은 외부에서 측정하고 감지할 수 있는 속성이다. 블랙홀은 물리적으로 실재한다는 점에서 실재객체다. 블랙홀은 외부로 정보를 발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재 속성이 있지만 현재 과학 지식으로는 블랙홀에 감각 속성이 있다고 볼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산타클로스나 염력 등의 초상 현상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볼 수 없기에 실재 속성 없이 감각 속성만 있는 객체다.
네 겹의 객체(quadruple objects): 감각 객체의 감각 속성, 실재 객체의 감각 속성, 감각 객체의 실재 속성, 실제 객체의 실재 속성...
- 감각 객체의 감각 속성인 '시간'은 의미의 획득 과정을 뜻함. 우리가 감각 객체를 경험하며 현상학적으로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매 순간 감각 속성이 변하는데 이 과정이 곧 시간이다.
- 실재 객체의 감각 속성: 해당 객체의 부분이과 동시에 분리되어 있음.
- 감각 객체의 실재 속성: '에이도스'. 변화하는 감각 속성외에 감각 객체에 내재하는 불변의 속성의 의미
- 실재 객체의 실재 속성: '본질'에는 직접 접근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양자 세계에서 특정 입자의 운동량을 알 때의 위치는 (또는 특정 입자의 위치를 알 때의 운동량)처럼 이는 본질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 생명은 어떻게 사고하는가?)
근대 세계에서 사고는 인간의 전유물이었다. 이와 같은 시각은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언어는 고도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재현하거나 상상적으로 재구성하게 한다.
언어학자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가 기호로서 결합시키는 것은 사물과 그에 대응하는 명칭이 아니라 개념(기의)과 청각 영상(기표)이다. 이것은 언어 기호가 사물들과의 자연적 관계에 기반하지 않으며 외부 세계와 자기 자신을 이해하도록 해 주는 언어 관습 자체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요컨대 언어는 일종의 정신적 실체로서 외부 세계와 분리됨으로써 능력을 발휘한다.
기호란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무언가를 나타내는데, 그러려면 기호를 해석하고 표상하는 해석자가 있어야 한다. 기호를 연쇄적으로 창출하는 끝없는 추론 과정에 참여하는 해석자가 있을 때, 기호가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콘은 기호의 해석자가 인간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아마존의 다양한 생명체가 저마다 '자기(self)'로서 기호를 해석한다고 보고, 이들이 어떻게 기호의 연쇄 과정으로서 '자기들의 생태계(ecology of selves)'을 엮어나가는지 세밀하게 묘사한다.
기호를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 등 세 부류로 나누고, 관습에 의해 형성된 인간의 언어는 그 중 상징에 불과하다고 논한다. 반면 비인간은 주로 도상과 지표를 사용한다. 이를테면 아마존의 대벌레는 주변 식물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보호색을 띤다. 콘은 도상의 닮음이 기호이듯이 대벌레의 보호색 또한 일종의 도상이라고 주장한다....양털원숭이는 나무의 흔들림을 곧이어 일어날 위험의 신호로 해석한다....나무 흔들림은 원숭이에게 위험을 가리키는 지표로 표상된다.... 대벌레, 진드기, 양털원숭이 등은 모두 기호의 해석자이며, 이들의 생명 활동은 단순한 생리 작용으로 환원되지않는다. 자기들의 생태계는 기호의 연쇄 과정 그 자체이며 이 과정에 참여하지 않으면 생명활동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호는 인간의 언어에 한정되지 않으며 모든 생명체의 생명 활동으로 확장된다. 생명이 기호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인간의 변증법적 이성이 세계 속에서 세계에 의해 자기를 구성해 나간다." - 장 폴 사르트르
"변증법적 이성이 자아와 타자, 유럽과 비유럽을 대립시키는 유럽중심주의로 나아가 인간과 세계를 대립시키는 인간중심주의로 귀결된다."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
"구조주의가 유럽어로 구사되는 한 구조주의에 잠재된 유럽중심주의의 망령을 쫒아내거나 인간 주체를 완전히 해체할 수 없다." - 데리다
퍼스에 따르면, 기호가 없다면 인간은 사고할 수 없다. 자아란 사고의 주체로서 기호의 연쇄 과정 그 자체이고, 사고는 종결 없는 추론을 통해 기호를 연쇄적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에 참여하는 행위다.
퍼스는 비인간 생명체의 기호 과정을 논한 적이 없다. 콘은 바로 이 지점에서 퍼스의 기호학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를 아마존의 숲으로 확장해 비인간 생명체의 기호 과정 또한 사고임을 명시화한다.
---> 기발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국내 모철학자가 말한 생각의 높이 (미안하게도 스스로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생각의 넓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콘은 특히 숲이 사고를 그 자체로 놓아둔다는 점에 주목한다.....사고의 주체가 먼저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에 의한 사고가 이를 뒤따르지도 않는다. 숲에서는 사고가 그 자체로 있고, 이 사고의 흐름 안에서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때마침 그곳에 존재할 뿐이다. 이렇듯 콘은 인간이 숲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넘어서 숲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음으로써 숲의 가르침과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한다.
---> WoW. 정말 감탄 스럽다....심지어 이 친구는 1968년 생이다.. 정말....
(웬디 희경 전(Wendy Hui Kyong Chun) : 컴퓨터 네트워크에서 통제와 자유는 어떻게 공존하는가?)
페이스북과 구글은 사용자 권한과 정보 검색을 대가로 네트워크에서 사용자의 행위를 추적할 수 있는 데이터를 수집한다.....데이터 수집은 사용자의 취향과 성향을 바꾸기보다는 이를 강화한다. 사용자가 능동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추천 페이지, 추천 영상, 광고 사이트 등이 알고리즘에 따라 자동으로 제시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 온라인이 편향을 더욱 가중 시킨다는 이런 주장에 대한 책은 굉장히 많다.
---> 이를 넘어 데이터가 객관적인가? 데이터가 많은 면 많을수록 공정한가?의 이슈도 생각해 볼 문제다
빅 데이터는 언뜻 무관해 보이는 상관관계를 찾음으로써 기존의 불평등을 심화하고 인종주의적/차별적 실천을 유도한다.
인터넷이 다양한 기술적/정치적/문화적 통제를 수반함에도 왜 신문, 방송 등 기존의 매스 미디어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의 도구로 도입되고 확산되었는가? 그 이유는 네트워크가 통제와 자유를 불가분의 짝패로 마련하기 때문이다. 즉 사이버 공간의 사용자가 누리는 항해와 검색의 자유는 컴퓨터 모니터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일련의 통제에 은밀히 순응한 대가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인터넷을 이용하며 누리는 자유는 주체에게 Privacy의 약화를 포함한 새로운 유형의 취약함을 수반하고 편집증적 불안을 야기한다.
진은 SW는 물리적 실체 없이 수많은 컴퓨터와 사용자 환경에서 널리 작동한다는 비물질의 선입견에 도전한다....인간은 프로그래밍 언어를 통해 SW를 알 수 있지만 이를 구동하는 컴퓨터의 프로세싱은 인간의 지각을 넘어서기 때문에 미지의 상태로 남는다. SW를 구성하는 코드는 언어적으로 행동을 실행하지만, 전능한 프로그래머가 이 코드를 조직하고 개발한다는 신화는 코드의 기계적 자동성을 마법적으로 은폐한다.
GUI는 HW이면에서 작동하는 전산 과정을 비가시적 상태로 은폐한다. GUI의 상호 작용성은 개인적 행위와 선택의 자유를 경제적 발전의 원천으로 상정하면서 불안정한 세계에 계속 적응하기를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을 체현한다... 사용자를 생산하고 HW와 상상적 관계를 맺도록 해 준다는 점에서 GUI를 '이데올로기의 유사물'로 규정한다.
--> 일상에서 철학을 하자는 주장을 하며 그런 내용을 쓴 철학자들이 더러 있다. 좋은 책들도 있고 허접한 책들도 있다... 프로그램과 GUI를 이런 관점/시각에서 볼 수 있다는 정말 감탄 스럽다...
정보는 영구적 기억을 구성하기 위해 사라지고 갱신되는데, 전은 이 같은 정보의 역설을 '오래가는 덧없음(enduring ephemeral)'이라고 일컫는다...... 진에게 습관이란 과거를 반복함으로써 미래를 대비한다는 점에서 '창조적 기대'다. 습관이 이 역설적 특징은 오늘날 활발히 서비스되는 소셜 미디어에 고스란히 나타난다.....자신의 존재가 항상적임을 입증하도록 끊임없이 상태 업데이트를 권유받는다.
업데이트를 습관과 위기의 합(habit + crisis)으로 정식화한다. 소셜 미디어와의 습관적 연결은 업데이트를 촉진하면서 신자유주의의 동력인 불안정성과 변화의 논리를 뒷받침한다. 또한 빅 데이터를 비롯한 계량화된 데이터의 수집을 촉진하고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전통적 구별을 와해한다.
진은 소셜 미디어에서 사적이고 개별적인 중독으로 치부되는 습관을 타자와 공유해 공통의 경험으로 재구성하고, 사용자의 행위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저장하고 관리하는 빅 데이터의 정치에 저항해 '잊힐 권리'와 '지워질 권리'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네트워크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은 뉴미디어가 정치,경제,군사,문화 전반을 작동시키는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기술임을 깨달으려면 컴퓨터 스크린 너머의 기술적/이데올리기적 작용을 파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반면 디지털 인문학에서 주장하듯 모든 인문학자가 코딩을 배워야 한다는 식의 입장에는 비판적이다. 컴퓨터 HW가 인간의 지각을 넘어 작동하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코딩 지식만으로 이를 지배할 수 있다는 거짓 환상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디지털 인문학은....과학과 인문학이 결합된 비판적 사유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 내가 ICT업계에 있지만 1,000% 동의하는 바이다. 잡스의 아래 PT가 있은 후 '인문학을 해야 한다', '인문학이 창조성의 핵심이다', '기업 성장의 방법'이다 등 등을 떠벌이는 잡스칭송자자가 많았다. 이런 흐름에 합류한 인문/사회학자들을 보면서 나는 저들이 인문/사회학을 하면서 뭘 배웠나? 싶었던 적이 있었다....
[ 자평 ]
이 책은 아마 문화일보에 연재되었던 글들을 모은 책인 것 같다.
(http://www.munhwa.com/news/series.html?secode=2209)
대체적으로 사회학자, 인문학자들의 생각이라 나에는 친숙한 분야는 아니었다.
수줍높은 생각에 대한 진수성찬이 있다면 이런 것이라...
내가 친숙한 분야든, 아니든 내는 평소에 책을 읽으면서 지식이란 것에 대해 이런 고정관념이 있다.
'현재의 문제는 과거의 해법으로 풀 수 없다', 이 것이 지식을 대하는 평소에 내 생각이다.
그런 이유로 내 기억으로 40대 중반부터는 오히려 동양고전을 읽지 않는 것 같다. 거의 쳐다보지도 않는다.
동양고전의 이런 인식이 나는 영 엉터리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정약용선생이 쓴 경세유표 서문에 보면..."옛 성왕은 예로 나라를 다스리고 예로 백성을 인도했다. 그런데 예가 쇠퇴해지자 법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법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백성을 인도하는 것도 아니다."
"고대의 성왕은 예로 법을 삼았고, 후대의 제왕은 법으로 법을 삼았으니 이것의 고대와 후대가 같지 않은 것이다"
대충 이런 고지식한 성리학자들이 표본(표준, Best Practice, 이상, 모델, 이상향 등)으로 삼는 나라는 BC 1,000~ 700년 즈음의 상나라, 주나라, 은나라 시대의 요임금이나 주문왕 등의 시절이다. 역사적으로 청동기시절이다.
청동기 시절에 얼마나 예와 도덕이 탁월했겠는가? 탁월했다고 해도 그 나라란 것이 얼마나 규모가 커겠는가?
요임금이나 주문왕이 지금 중국을 통치한다면 시진핑주석보다 덕과 도덕으로 잘 다스릴까? 나는 '택'도 없는 일이라고 본다.
세종대왕이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더 잘될까? 이순신장군이 연평해전에 있었다면 더 나아졌을까?
과거에 인물이 가진 생각의 폭과 넓이, 그리고 삶의 속도는 현재의 문제의 폭과 넓이, 속도를 따라 갈 수 없다.
이리하여 책장에 있던 동양고전들은 대부분 쓰레기통으로 진작 가 버렸다.
다 가벼린 것은 아니고, 요순/주문왕, 옛 성인 타령을 하는 것들은 다 가벼렸다.
노자, 장자, 육조단경, 사기 등은 아직도 쌩쌩이 살아 있기는 하다.
책장을 훑어보니 위대한 생각들을 모아 놓은 비슷한 목적으로 아래 책들이 보인다.
지금도 나는 아직도 이 책들을 가끔 뒤적인다....누가 언제, 어떤 배경으로 말했든 다시 읽어도 생각할 꺼리가 있다..
내가 조금은 더 친숙한 경제/경영분야에도 이런 책들이 있다.
과거의 생각들을 끄집어 내서 현재에 문제를 다뤄 보고자 하는 도전들...
경제/경영분야에서는 그냥 죽은 분들은 죽은채로 놓아 두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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