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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작가의 말)

파괴와 거짓 희망, 모멸의 시대

 

아직 젊었던 시절 칠십년대와 반목했던 것과 같이 나는 지금 세계와도 사이가 안 좋다.

 

젊은 시절에 인간의 진짜 척추라고 믿고 애써 간지하려고 했던 귀한 가치들, 그리고 개개인의 마음속 소유인 아름다운 정신을 부양 가족 거느린 가장이 되며 밖으로 던져버리는 일은 흔했다.

 

강압 통치자들이 무슨 짓을 하든 가만히만 있으면 자신과 가족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순응과 무저항을 안전한 생활 방식으로 터득한 사람들에게 고문이나 투옥은 밤잠을 빼앗아갈 정도의 공포가 아니었다.

 

그때 제일 참을 수 없었던 '악'이 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이었다.

악이 자선이 되고 희망이 되고 진실이 되고, 또 정의가 되었다.

 

사람들은 내 문장이 보기 드물게 짧고, 형식도 새롭고, 슬프고, 그러면서 아름답다고 했다.

 

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재삼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경험한 그대로, 우리 땅에서도 구체제의 작은 후퇴, 그리고 조그만한 개선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우리는 그것의 목격자이다.

 

(뫼비우스의 띠)

"완전한 사람은 얼마 없어. 그는 완전한 사람이야. 죽을 힘을 다해 일하고 그 무서운 대가로 먹고 살아."

 

차차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의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칼날)

그 집에 없는 것은 정신 하나뿐이다. 그 밖의 것은 언제나 풍성했다.

 

어느 편이 좋은 편이고, 어느 편이 나쁜 편인가? 도대체 이 세상에 좋은 편이 있기는 한가? 

 

사나이는 한 마리의 벌레를 다루듯 난장이를 다루었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우주 여행)

"너 도도새에 대해 들어본 적 있니? 그 새는 날개를 사용하지 않았다구. 그래서 퇴화했어.

나중에 날을 수가 없게 되어 멸종당했어. 나는 그 도도새야. 불쌍하지만 너도 그래. 

우린 중요한 것만 골라 배반하는 쓰레기들 속에서 살고 있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옳았다.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엣 날마다 지기만 했다.

 

서울특별시 낙원구 행복동  46번지의 1839 김불이 귀하

 

"그들 옆엔 법이 있다."

 

"아버지는 악당도 못 돼. 악당은 돈이나 많지."

 

우리는 무슨 일이 있든 공부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하지 않고는 우리 구역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공부를 한 자와 못 한 자로 너무나 엄격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끔찍할 정도로 미개한 사회였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사장은 종종 불황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와 그의 참모들은 우리에게 쓰는 여러 형태의 억압을 감추기 위해 불황이라는 말을 이용하고는 했다. 그렇지 않을 때는 힘껏 일한 다음  노-사가 공평히 나누어 갖게 될 부에 대해 이야기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폭력이다.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이 없는 나라는 재난의 나라이다.

---> 2022년 12월 이 사건이 자꾸 겹쳐 생각난다.

거기서는 눈물 냄새가 났다. 나는 눈물 냄새를 가슴으로 맡았다.

 

"진실을 말하고 묻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너희들이 그 꼴이 되었구나."

 

"정이란 게 이렇게 더러운 게라우."

 

나는 햇살 속에서 꿈을 꾸었다. 영희가 펜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넣고 있었다.

 

죄인들은 아직 잠자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 구할 자비는 없었다.

 

 난장이와 난장이의 부인, 난장이의 두 아들, 그리고 난장이의  딸이 살아간 흔적은 거기에 없었다. 넓은 공터만 있었다.

 

(육교 위에서)

정말 무서운 것은 두 사람이 인정하든 안 하든 하나의 큰 덩어리에 묻혀 굴러간다는 사실이었다.

 

너는 아무리 좋은 사회가 이뤄진다고 해도 다음 대를 위해 비판과 저항은 잃지 말아야 한다고 썼었지.

 

(궤도 회전)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의 요구에 따라 일한 적이 이제까지 없었어.

 

지금은 분배할 때가 아니고 축적할 때라고 씌어져 있었어. 그리고, 너의 할아버지는 돌아갔어.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나누어주지? 

 

(기계 도시)

난장이네 동네에서는 아주 이상한 냄새가 났었다.

---->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생각이 난다.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그래도 전 알아요. 우리는 이 맨 밑야요. 우리에겐 잡아먹을 게 없어요.

그런데, 우리 위에는 우리를 잡으려는 무엇이 세 층이나 있어요."

 

콘베어를 이용한 연속 작업이 나를 몰아붙였다. 기계가 작업 속도를 결정했다.

 

지부장은 회사 사람이었다. 그는 노동자를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은강에서의 생존비를 생각했다. 생활비가 아니라 살아 남기 위한 생존비였다.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아버지의 몸이 작았다고 생명의 양까지 작았을 리는 없다. 아버지는 몸보다 컸던 고통을 죽어서 벗었다.

 

"세상을 끄는 것은 미친 말들야."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은강에서는 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클라인씨의 병)

"희망도 없구. 벌레야. 마지막으로 꿈틀대 돈을 모아야지."

"나는 벌레야."

 

"어떤 일이든, 무지가 도움을 준 적은 없어."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할아버지가  평생을 두고 되뇌인 말은 '희생'이었는데, 그의 이 말은 그의 생애와 하나도 상관이 없었다.

 

"그분은, 인간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끔찍한 건 이 세계라구요. 몇몇 나라들이 그들의 사회 제도로부터 이탈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미 약물을 투여하기 시작했어요."

 

사랑으로 얻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에필로그)

우리는 너무나 바빴다. 그 동안 바빴던 것은 과연 우리의 가치를 위해서였을까?

 

"오늘 죽어살면서 내일 생각은 왜 했을까?"

 

"개똥벌레는 씨가 졌다구"

"왜?"

"이 세상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개똥벌레를 잡아죽였지."

"다 죽이진 못했군."

 

(해설

대립적 세계관과 미학

김병익)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형식을 얻고 있다.

 

우리가 보고 겪고 부닥치는 것들은 사실 세계에서의 대립이며, 그것의 전면적 진실 또는 하나로의 통합은 추상의 세계에서만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세계는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조세희는 '이 죽은 땅'에서 사실주의적인 갈등의 세계를 본 것이 아니라 낭만주의적인 꿈과 현실의 대립을 보고 있다.

 

전체가 구조적으로 타락했을 때 한 개인의 개량주의적 노력이란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신판 해설

대립이 초극미, 그 카오스모스의 시학

우찬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연작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75년 12월이었다.

 

1978년 초판을 발행한 이 연작소설집이 최인훈의 <광장>과 더불어 100쇄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여전히 난장이의 문제성은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 <난장이...>는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후 이 땅에서 거의 최초로 자유와 더불어 평등의 이념형을 본격적으로 문학화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난장이는 칩실년대 한국 사회와 경제의 생산과 소비 및 분배 구조에서 억압받고 소외받는 계층을 표상하는 전형저인 인물에 값한다.

---> 이 '표상'이라는 측면에서 나는 또 다른 이 전의 난장인인 귄터 그라스 (Gu"nter Grass)가 쓴 <양철북/1959년>의 오스카를 떠 올렸다.

"그는 세 살이 되는 생일에 스스로 계단에서 떨어져 추락하면서 성장을 멈춘다. 어른이 되길, 즉 소시민이 되길, 미친 시대에 똑같이 미친 방식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되길 온몸으로 거부했던 셈이다."

난장이는 현존을 혁파할 만한 구체적인 분노의 정서를 통해서, 거인은 정의로운 분배를 위한 사랑의 정서를 통해서 희망의 길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이 작가의 소신이다.

 

 

[ 자평 ]  내공이 깊은 사람들이 쓰는 문장에서는 그 내공으로 밀어 쓴 힘을 느낄 수 있다. 김수영시인의 시가 그렇고 조세희 소설가의 소설이 그런 같같다. 언어나 기법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바닥과 넓이를 본 사람만의 단어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1989년에 학력고사를 본 나는 조세희 선생을 한 동안은 모르는 세대다.

이 분의 소설을 대학교 때 읽기에는 너무 너무나 어렸고, 또한 우리 다음 세대처럼 수능에 이 분의 소설이 나와서 이 분을 접할 기회가 있는 세대도 아니었다.

나는 2000년대 들어서 이 분의 소설을 사서 그것도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만 읽었다.  

2022년 12월 25일. 

별세 소식을 듣고 코로나 확진이 걸려 격리된 겸, 하여 이 분의 소설을 완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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