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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들

속죄 by 이언 매큐언

비즈붓다 2023. 1. 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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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제1부)

 

글쓰기는 자기만의 비밀이 생겼다는 짜릿함뿐만 아니라

세상을 축소하여 손 안에 넣는 즐거움까지 맛보게 해주었다.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에 추함은 끝도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그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 실수를 만회할 어떤 기회나 가능성도 주지 않는 것.

이것이 그에게 내려진 벌이었다.

 

이런 세상에는 사실 어느 누구도 특별할 수 없었다.

모두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무도 특별하지 않았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

 

인생에는 실내 아니면 실외밖에 갈 데가 없는 것일까? 

어디 또 다른 데가 있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적어도 한 가지씩은 좋은 면을 가지고 있다는 레온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그것이 모든 인간이 존재한다는 경이로운 사실의 이유라도 되는 것 같았다.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그녀는 슬픔을 느꼈다'라고  쓰는 것은 식은 죽 먹기고 슬픔에 젖은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슬픔 그 자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그 문장을 읽는 즉시 그 슬픔이 와닿게 할 수 있을까? 

 

어느 누가 곤충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세상 모든 것에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데도 그것을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세상사를 그리치는 일이며 쓸데 없는 짓일 뿐 아니라 화를 부를 수도 있다. 어떤 일들은 정말로 그렇다.

 

인생이라는 이야기는 얼마나 빨리 끝나버리는가.

압도되지도 않고 허무하지도 않았다. 

다만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이 잔인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브리오니는 로비를 보면서 

악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특성이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난 도망가지 않아. 기다릴께. 돌아와."

 

"너는 항상 내 생각 속에 있어. 사랑해. 기다릴께. 돌아와."

 

 

(제2부)

 

진짜 위험은 군중 자체와 나름대로 정당해 보이는 군중심리에 있었다.

그것이 주는 쾌락 또한 부인할 수 없을 터이다. 

 

등장인물은 19세기 소설에나 나오는 낡은 장치였다.

등장인물이 라는 개념은 현대 심리학이 밝혀낸 인간의 실수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물질적 존재라는 것.

쉽게 파괴되지만 쉽게 회복되지는 않는 존재.....

 

(제3부)

 

그녀의 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치기 싫었던 것은 소설에도 빠져 있었다.

진정한 소설이 되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알고 있었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가 새로운 원고, 속죄를 써야 했다.

그리고 이미 그녀는 시작할 준비다 되어 있었다. 

 

(1999년 런던)

 

그러나 아제 나는 독자들에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로비 터너가 1940년 6월 1일 브레이 듄스에서 폐혈증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혹은 세실리아가 같은 해 9월 밸엄 지하철역 폭격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해에 내가 그들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연인들은 살아남아 행복하게 산다.

내 마지막 원고만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나의 즉흥적이고 운 좋은 언니와 그녀의 의사 왕자님은 살아남아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이다. 

 

지난 오십 구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겐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역자 후기)

 

 

 

[ 자평 ] 남의 인생을 들여다 보는 것. 그런 심리를 들여다 보는 것. 이런 것이 정말 소설이다는 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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