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 밑줄/연결 ]

 

철학이란 주어진 프레임워크의 반대편을 꿰뚫어보는 신체적 행위다.

 

문제가 주어지더라도 답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 것이 철학의 증거..

 

'프레임워크의 반대편을 꿰뚫어본다'는 것에는 '지성'의 지배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기대가 담겨 있다.

 

철학을 하는 데는 반드시 신체가 필요하다. 철학한다는 것은 헛된 논의가 아니라 '행위'다.

 

시점을 바꾸는 것은 굉장히 쉬운 일이다. 자신이 이동하면 되기 때문이다.

 

철학하는 일은 인간에게 주어진 신체적 행위이다. 타자에 대한 온기와 배려, 그리고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희망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해석되어야 한다'는 슬라보예 지젝의 해설은 단순 명쾌하다. 우리는 '자신의 의도로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권력과 비슷한 것에 의해 '보도록' 유도된다. 그리고 우연한 타이밍에 진실이 보였을 때 지금까지 본 것은 무의미해진다. 

 

관점이란 '어떤 시점을 통해 관찰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와 세상은 항상 동시에 맞닿아 있다.

 

직감은 그때그때 반응하는 것이며 점과 점이 단절되어 있다. 반면 직관은 점과 점이 선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신체의 기억된 체험이다. 그때그때 포인트처럼 따라 나오는 직감과 달리 직관은 지속된다. 직관에서는 흐름에 대한 의식을 빼놓을 수 없다.

 

'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일'이다.

 

미디어는 '편견'의 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나의 신체'가 실존하는 것이다. 신체 없이 세상에서 '나'로 인정 받을 수는 없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나'가 대답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로부터 제기된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라고 단정하지 않고  '니는 무엇을 아는가?'라고 의문형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

 

세상의 시점이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시각이며, 유형의 시점은 '이러이러하길 바란다'는 시각이다. 

이에 반해 몽테뉴가 전수하는 시점은 '정말로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가?'다.

 

'단언', '반복', '감염'은 르봉이 군중에게 사상을 주입하는 방법으로 꼽는 세 가지 수단..

 

군중이 요구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환상'인 것이다.

 

르봉의 핵심은 감염자인 군중이 그 상황에 대해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은 의욕적으로 그러려는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완고하며, 무의식적으로 마음에 휘들리고, 무의식적으로 충동의 노예가 된다. 

 

'따분함'은 20세기의 새로운 병이었다. 

 

조지 오웰의 작품은 독재 사회를 묘사하고 있으며 푸코의 감시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에도 존재한다.

 

'항상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철학의 목적이다....

자신의 여러 개념을 창조하지 못했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는 철학자에게 대체 어떤 가치가 있는가" 

- 들뢰즈 -

 

레비나스....자신에게 중요한 모든 것이 없어져도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계속 존재한다. 이 냉엄한 사실을 홀로코스트에서 통감했던 것이다. 

 

철학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누구일까. 다섯 명으로 좁혀보자.

고대는 소크라테스, 근세는 데카르트, 근대는 칸트와 헤겔, 그리고 니체 정도가 될 것이다. 젊은 철학자를 떠올리자면 사르트르도 더하고 싶다. 

 

'세상의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는' 사고가 반항의 시점이 된다.

 

사고려이나 지력은 시대의 '에피스테메(episteme)'에 지배되고 있다고 꿰뚫어본 사람이 푸코였다.

'에피스테메'란 시대가 규정하는 지식의 틀을 가리킨다.

 

'우리는 항상 상황에 말려들어 있다'는 의미다. 실존철학에서는 '항상 이미 말려들어 있다'가 문제 해결에 가장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자유'라는 것은 '운동'을 통해 우리 자신을 죽을 때까지 계속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짜 철학은 세계를 보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일이다.'

'철학이란 자기 자신의 단서가 항상 갱신되어가는 경험이다.'  < 지각의 현상학 >

 

'나는 누구인가?'는 관조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현장에서 타자에 의해 개시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을 주장하는 사르트르를 <야생의 사고>에서 철저하게 비판했다. 자유로운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 따위는 없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받아들인 사회의 시스템에 의해 선택된다. 그 시스템은 '구조'라고 불리며 구조는 육안으로 볼 수 없다. 그래서 구조에 포함되지 않은 선택지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수동적이고 우연적인 사실을 능동적이고 필연적인 행동으로 전환할 때 우리는 본래 의미로 자유로울 수 있다. 

교체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시장가치다.

 

"나는 유행에 뒤처지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유행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 장켈레비치 -

이런 그를 사람들은 '현대의 소크라테스'라고 부른다. 

 

"사유하는 인간처럼 행동하고, 행동하는 인간처럼 사유하라."   <덕에 관하여 > / 장켈레비치

 

우리는 세계를 보면서 세계에 보여지고 있다. 

 

투기(project)는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져 넣는 일이다. 

 

'자유'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라는 인간'을 알고 싶다면 과거를 봐서는 안 된다. 과거의 영광 같은 것은 인간을 물건으로 만드는 함정일 뿐이다. '하나의 미래를 도래' 시킴으로써 드디어 나중에 그것을 알 수 있다.   - 사르트르 -

 

지각은 '이마주'에의 작용이며 이 행동의 중심에는 '신체'가 있다.  - 베르그송

 

"조작 가능하게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사라져라. "    <포스트모던의 조건> /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놀이가 자유로운 까닭은 유용성과 생산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AI가 아니라 인간'이란 힌트가 있다.

 

철학을 기능성과 유용성 측면에서 바라보지 않고, 철학의 시장가치를 벗어나 있는지의 여부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 자평  ]  새로운 사람, 새로운 생각을 조금 접할 수 있었다. 훑어 읽을 만 하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