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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작품인 <고도를 기다리며>에 애하여 서평가인 이한우씨가 잡지에 게재한 서평이 있길래 꼼꼼히 읽어 보았다. <독서평설>이란 청소년 대상의 잡지에 올리신 글이라 하는데, 2009년 이기 하지만 요즘 청소년들이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것을 읽은 지? 매우 의아했다.
전체적으로 읽으면서 아직 미출간이지만( (2022년 7월 17일 현재) 이탈로 칼비노가 "“2000년에도 보존되어야 할 몇 가지 문학적 가치”를 주제로 강의 예정이었던 자료를 묶어 낸 <문학 강의>란 책이 있다고 한다. 그 첫 번째 주제가 왜 <가벼움>이다. 왜 <가벼움>일까?
책 소개를 잠시 읽어 보니, "내 작업의 대부분은 무거움을 제거하는 것이었다."라며 하면서 <가벼움>을 첫 번재 주제로 한 것은 그가 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순서대로 배치했다고 한다.
"내 작업의 대부분은 무거움을 제거하는 것이었다고, 나는 때로는 인간의 모습에서, 때로는 천체에서, 때로는 도시에서 무게를 제거하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구조와 언어에서 무게를 제거하고 싶었다."
인간의 실존적 조건은 삶의 무게를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기본값이라면 삶의 무게에 대한 반등으로서의 가벼움에 대한 탐색은 문학의 본령에도 기본값으로 입력될 것이다. "
이런 측면에서 나는 고도의 기다리며를 부조리, 불합리라는 측면에서도 볼 수 있지만 '가벼움'이라는 측면에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도를 기다리며' 다시 읽기 (aladin.co.kr)
이번달 '고교독서평설'에 실은 갑론을박 꼭지를 옮겨놓는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루고 있고, 연재의 마지막 회였다(역시나 분량상 생각만큼 자세하게 다루진 못했다). 지난 1일까지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된 <고도를 기다리며>를 여러 여건상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기다리다 보면 또 기회가 오겠지...
고교 독서평설(09년 11월호) 고독한 인간의 끝없는 기다림
인간 존재의 본질에 질문을 던지는 부조리극
블라디미르 : 자, 갈까?
에스트라공 : 그래, 가자.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일랜드계 프랑스 작가 새뮤얼 베케트(1906~1989)의 대표작이자 가장 유명한 희곡인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렇게 끝난다. 고도에 대한 두 주인공의 막연한 기다림으로만 채워진 이 연극은 고도라는 이름과 작가 베케트를 ‘20세기의 문학적 신화’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정작 ‘고도’가 누구이며 그들의 ‘기다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그렇다고 작가에게 의지할 수도 없다. ‘고도가 누구인가?’란 질문에 대해 베케트가 “내가 그걸 알았다면 작품에 직접 써넣었을 것”이라고 답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분명 기이하면서도 한편으론 매력적인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번 시간에는 극의 구성과 성격 묘사가 불합리하고 낯설다는 의미에서 대표적인 ‘부조리극’으로 분류되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으며, 작품이 품고 있는 수수께끼와 모호함을 풀어 보도록 하자.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작품인 만큼,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조금 깊어질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자, 그럼 고도를 만나러 가 볼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
먼저 ‘2막의 희비극’이란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의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한다. 1막에서는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등장하여 황량한 시골길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아래서 고도를 기다린다. 둘은 고도를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 동안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도둑 이야기, 갈보(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여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 집에 간 영국인 이야기 등을 하며, 다투기도 하고 이내 화해하기도 한다. 또한 나무에 목을 매달고 자살하자는 말까지 주고받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
그런 그들 앞에 끈에 목이 묶인 채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는 ‘럭키’와 채찍을 들고 그의 주인 행세를 하는 ‘포조’가 나타난다. 에스트라공은 럭키를 불쌍하게 여겨 손수건을 건네주려고 하나 오히려 발로 걷어차인다. 포조는 대화 상대가 되어 준 대가로 두 사람에게 럭키의 춤을 보여 주고 그가 생각을 말하게 한다. 그러나 럭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을 뿐이다. 포조와 럭키가 무대에서 퇴장하고, 한 소년이 나타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고도가 오늘 오지 않고 내일 올 거라는 소식을 전한다.
2막은 다음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로 설정돼 있다. 나무에 잎이 조금 돋은 게 달라졌을 뿐이다. 블라디미르는 활기차게 등장하여 기이한 노래를 부르고, 에스트라공은 풀이 죽은 상태로 등장한다. 블라디미르가 그를 위로하면서 어제의 일을 화제 삼아 보지만, 에스트라공은 포조와 럭키를 기억도 하지 못한다. 1막에서 떨어진 럭키의 모자를 블라디미르가 발견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모자와 럭키의 모자를 빠르게 바꿔 쓰는 놀이를 한다.
그들 앞에 다시 포조와 럭키가 등장한다. 포조가 럭키를 잡아끄는 끈의 길이가 더 짧아졌다. 그 사이 포조는 장님이 되었고, 럭키는 벙어리가 되어 있다. 포조와 럭키는 넘어지고, 포조는 살려 달라고 소리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그를 도와준다. 블라디미르는 포조를 일으켜 세운 뒤 어제 일을 물어보는데, 포조 역시 전날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언제부터 장님이 되었느냐’란 질문에는 버럭 화까지 낸다. 포조와 럭키가 퇴장하자 소년이 다시 등장한다. 소년 또한 블라디미르에게 어제의 일을 모른다고 하면서 1막에서와 똑같이 고도는 오늘 오지 않고 내일 올 거라는 소식을 전한다.
구원에 대한 기대와 절망
이렇듯 2막은 1막의 상황을 대동소이하게 반복하며 두 사람의 기다림이 지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베케트는 앞에서 나온 부제를 통해 이 반복적인 기다림, 또는 기다림의 반복을 ‘희비극’으로 연출할 것을 요구했다. 이 작품의 비극성이 주로 기다림의 부조리한 본질과 말의 한계 그리고 삶의 유한성 등과 같은 무거운 주제와 연관된다면, 희극성은 부랑자, 광대 같은 인물들의 모양새 및 그들의 서커스적인 행동과 관련이 있다. 무거운 주제와 가벼운 표현 기법 사이의 이질적인 결합이 이 연극의 주된 정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더불어 이 희비극성은 ‘기다림’ 자체가 갖는 정조이기도 하다. 기다림은 시간의 흐름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하도록 요구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을 무의미한 것으로 체감하게 한다. 만남이란 사건이 지속적으로 유예된다면 기다림이 갖는 무의미함도 그만큼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 무의미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일까?
<고도를 기다리며>를 단순히 ‘부조리한 기다림’의 드라마로만 간주하는 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숱한 기독교적 상징을 간과하는 것이다. 아일랜드의 개신교 가문에서 태어난 베케트는 자신이 기독교 문화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기독교적 모티프를 많이 활용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이 작품에서 ‘구원’이라는 전통적인 주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은 무시하기 어렵다.
사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구원에 대한 기대와 절망의 ‘베케트식 형상화’로도 읽을 수 있다. 그는 블라디미르의 입을 빌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도둑의 이야기를 작품에 직접 도입하고 있기도 하다. 베케트는 이 작품의 주제를 묻는 질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 문장을 자주 인용했다. “절망하지 마라. 도둑놈 중 한 명은 구원받았다. 기대하지 마라. 도둑놈 중 한 명은 저주받았느니라.” 관념들을 믿지는 않지만 관념의 형상화에는 늘 매료된다고 하면서, 베케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말에 관념이 놀랄 만큼 잘 형상화되어 있다'고 평했다.
1막 서두에서부터 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인물로 소개되는 블라디미르는 두 도둑놈 가운데 하나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두고 “확률치고는 괜찮지.”라고 말한다. 구원받을 가능성이 반반이니까 나쁜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확실한’ 확률이 아니라는 데 있다.
블라디미르 :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어. 복음서를 쓴 네 사도 가운데 단 하나만이 그때의 상황을 그런 식으로 전하게 됐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네 사람이 다 그 자리에 있거나 어쨌든 그 근처에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그중 한 사람만 구원받은 도둑놈 얘기를 써놓았거든. (사이) 이봐, 고고, 가끔은 맞장구를 쳐 줘야 할 것 아냐?
에스트라공 : 그래. 아주 아주 흥미롭네.
블라디미르 : 넷 중에 한 사람만 말이야. 나머지 셋 중에서 둘은 숫제 언급도 없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 두 도둑놈이 욕설을 퍼부었다는 거야.
여기서 ‘네 사도’란 4대 복음서의 저자를 말한다. 그런데 ‘둘은 언급조차 없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 도둑놈이 욕설을 퍼부었다고 했다.’는 블라디미르의 말과는 달리, 실제로 <요한복음>에서는 추가적인 언급 없이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못 박혔다고 기술되었으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두 도둑이 모두 예수를 비웃고 모욕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도둑 한 명이 예수를 모욕하는 다른 한 명을 꾸짖으면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예수에게 간청하자, 예수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답한다. 그의 영혼을 구원하리라 약속한 것이다. 이 약속은 물론 ‘복음(福音)’이라는 말뜻 그대로 ‘좋은 소식’이다.
다시 말해, 블라디미르의 의문은 ‘네 명의 사도 가운데 한 사람만 구원받은 도둑 얘기를 하고 있는데도, 왜 나머지 세 사람의 얘기는 제쳐 놓고 그 사람의 말만 믿느냐’는 것이다. 에스트라공은 사람들이 다 바보라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산술적으로 네 명의 사도 가운데 한 사람만 반반의 구원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확률은 절반이 아니라 8분의 1, 곧 12.5%가 된다. 그리고 물론 이는 ‘썩 괜찮은 확률’이 아니다. 이것이 블라디미르의 근심이자 고통이며, <고도를 기다리며>를 이끌고 가는 작가의 문제의식이다.
고고와 디디,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자
절반의 구원 가능성이 보통의 사람들, 곧 바보들이 갖는 희망이고 기대치라면,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 ‘광대’의 구원은 훨씬 낮은 기대치를 갖는다. 따라서 그에 대한 기다림 또한 헛된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그 기다림을 지속한다면, 그것은 합리적인 계산이 아니라 ‘부조리’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간에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도둑처럼 모두 지옥에 떨어진다면 삶은 의미를 갖기 어렵다. 게다가 영구한 시간에 비하면 삶의 유한함은 ‘순간’에 불과하지 않은가.
포조의 말을 빌리면,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운명이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거리가 ‘순간’에 불과하다면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게 된다.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 거지. 해가 잠깐 비추다간 곧 다시 밤이 오는 거요.”라는 포조의 대사는 이러한 세계관을 집약하고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볼 때 구원이 없다면 삶의 지속은 무의미하다. 만남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기다림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더는 버틸 수가 없다며 자꾸만 자살을 꿈꾸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2막의 후반부에서 두 사람의 대사는 이 문제를 간결하게 정리해 준다.
에스트라공 : 이 지랄은 이제 더 못하겠다.
블라디미르 :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 :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이야.
에스트라공 :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 그럼 구원받는 거지.
이 대목에서 고도가 갖는 상징적 의미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고도’가 누구인지는 확정할 수 없더라도 ‘삶의 구원을 가능하게 해 주는 그 무엇’이라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이 없는 삶, 곧 고도와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삶은 차라리 목을 매다는 것이 더 나은 삶이다. 물론 더 좋은 것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적어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생각은 그렇다. 다만 그들을 붙들어 매는 것은 희박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다.
애초에 막이 오르면 에스트라공이 낮은 돌무덤에 앉아 구두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포기하면서 내뱉는 첫 대사는 “되는 일이 없어(Nothing to be done.).”다. 이 대사는 “더는 못 하겠어”란 뜻도 갖는다. 반면에 블라디미르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평생 그런 생각을 멀리하려고 애써 왔지. 블라디미르, 잘 따져 봐, 아직 다해 본 건 아니잖아, 라고 말하면서 말이야.”
여기서 “되는 일이 없어.”라는 체념, 혹은 “더는 못 하겠어”라는 포기 그리고 “아직 다해 본 건 아니잖아.”라는 분발의 촉구는 삶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대표한다. 더불어 무대 위의 두 주인공은 블라디미르의 말대로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마치 아벨과 카인 그리고 예수 곁의 두 도둑이 인간의 대표자인 것과 마찬가지다. 덧붙이자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블라디미르는 러시아식 이름이고, 에스트라공은 프랑스식 이름이며, 포조와 럭키는 각각 이탈리아와 영어식 이름이다. 이름에서부터 이들은 ‘인류’라는 대표성을 갖는다.
‘8분의 1’의 기대와 ‘8분의 7’의 절망
그런데 삶에 대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각기 다른 태도는 과연 구원에 대한 판정을 가능하게 할 만큼 ‘의미 있는 차이’일까? 서로를 ‘디디’와 ‘고고’라 부르는 이 단짝은 여러모로 다르긴 하다. 블라디미르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이며, 에스트라공은 자신이 ‘시인’이었다고 떠들어 댄다. 블라디미르는 끈기가 있는 반면에 에스트라공은 비약을 잘하고, 블라디미르는 과거의 사건들을 잘 기억하지만 에스트라공은 모두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블라디미르는 입에서, 에스트라공은 발에서 냄새가 나는 것처럼 사소한 차이로 수렴된다. 1막과 2막 끝에서 두 사람이 모두 “가자.”라고 얘기하면서도 가만히 있음으로써 ‘간다’와 ‘가지 않는다’라는 행동의 차이를 무화(無化)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1막에서 ‘주인과 하인’으로 등장한 포조와 럭키조차도 2막에서는 ‘장님과 벙어리’가 되어 등장하면서 신분적 차이가 흐릿해지며 그들을 연결해주는 끈의 길이도 짧아진다. 성취되지 않는 기다림 속에서 모든 차이는 그 의미를 잃게 된다.
이 연극에서 가장 긴장되는 대목은 2막에서 누군가 오는 것을 보고 고도로 착각한 블라디미르가 환호하며 흥분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구원받았다!”라 만세를 부르는 블라디미르와 대조적으로 에스트라공은 “난 지옥에 떨어졌군!”이라며 낙담한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오지 않으며 두 사람은 다시 화해하며 서로 껴안는다.
결국 두 사람의 운명은 아무런 차이도 갖지 않는다. 이렇듯 그들의 차이를 지우고, 그들의 탄원을 공허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산술적으로 답하자면, 그것은 구원에 대한 ‘8분의 1’의 기대와 ‘8분의 7’의 절망이다. 이 부조리한 배합 비율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현대인의 희비극적인 자화상으로 만든다.
09. 11. 07.
P.S. 베케트의 드라마와 관련하여 가장 요긴한 참고문헌은 그의 연출노트이다. 파버앤파버 출판사에서 내는 <새뮤얼 베케트의 연출 노트(The Theatrical Notebooks of Samuel Beckett)> 시리즈는 네 권으로 구성돼 있는데, 제1권이 <고도를 기다리며>(1993)이다. 1부에서는 본문과 자세한 주석, 그리고 2부에서는 1975년에 베케트가 직접 연출한 베를린 실러-극장 공연의 연출노트를 사진판으로 수록하고 있다. 오래전 영풍문고 양서부에서 보았던 책인데, 이번에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어볼 수 있었다...
이번달 '고교독서평설'에 실은 갑론을박 꼭지를 옮겨놓는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루고 있고, 연재의 마지막 회였다(역시나 분량상 생각만큼 자세하게 다루진 못했다). 지난 1일까지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된 <고도를 기다리며>를 여러 여건상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기다리다 보면 또 기회가 오겠지...
고교 독서평설(09년 11월호) 고독한 인간의 끝없는 기다림
인간 존재의 본질에 질문을 던지는 부조리극
블라디미르 : 자, 갈까?
에스트라공 : 그래, 가자.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일랜드계 프랑스 작가 새뮤얼 베케트(1906~1989)의 대표작이자 가장 유명한 희곡인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렇게 끝난다. 고도에 대한 두 주인공의 막연한 기다림으로만 채워진 이 연극은 고도라는 이름과 작가 베케트를 ‘20세기의 문학적 신화’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정작 ‘고도’가 누구이며 그들의 ‘기다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그렇다고 작가에게 의지할 수도 없다. ‘고도가 누구인가?’란 질문에 대해 베케트가 “내가 그걸 알았다면 작품에 직접 써넣었을 것”이라고 답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분명 기이하면서도 한편으론 매력적인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번 시간에는 극의 구성과 성격 묘사가 불합리하고 낯설다는 의미에서 대표적인 ‘부조리극’으로 분류되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으며, 작품이 품고 있는 수수께끼와 모호함을 풀어 보도록 하자.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작품인 만큼,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조금 깊어질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자, 그럼 고도를 만나러 가 볼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
먼저 ‘2막의 희비극’이란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의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한다. 1막에서는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등장하여 황량한 시골길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아래서 고도를 기다린다. 둘은 고도를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 동안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도둑 이야기, 갈보(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여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 집에 간 영국인 이야기 등을 하며, 다투기도 하고 이내 화해하기도 한다. 또한 나무에 목을 매달고 자살하자는 말까지 주고받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
그런 그들 앞에 끈에 목이 묶인 채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는 ‘럭키’와 채찍을 들고 그의 주인 행세를 하는 ‘포조’가 나타난다. 에스트라공은 럭키를 불쌍하게 여겨 손수건을 건네주려고 하나 오히려 발로 걷어차인다. 포조는 대화 상대가 되어 준 대가로 두 사람에게 럭키의 춤을 보여 주고 그가 생각을 말하게 한다. 그러나 럭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을 뿐이다. 포조와 럭키가 무대에서 퇴장하고, 한 소년이 나타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고도가 오늘 오지 않고 내일 올 거라는 소식을 전한다.
2막은 다음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로 설정돼 있다. 나무에 잎이 조금 돋은 게 달라졌을 뿐이다. 블라디미르는 활기차게 등장하여 기이한 노래를 부르고, 에스트라공은 풀이 죽은 상태로 등장한다. 블라디미르가 그를 위로하면서 어제의 일을 화제 삼아 보지만, 에스트라공은 포조와 럭키를 기억도 하지 못한다. 1막에서 떨어진 럭키의 모자를 블라디미르가 발견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모자와 럭키의 모자를 빠르게 바꿔 쓰는 놀이를 한다.
그들 앞에 다시 포조와 럭키가 등장한다. 포조가 럭키를 잡아끄는 끈의 길이가 더 짧아졌다. 그 사이 포조는 장님이 되었고, 럭키는 벙어리가 되어 있다. 포조와 럭키는 넘어지고, 포조는 살려 달라고 소리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그를 도와준다. 블라디미르는 포조를 일으켜 세운 뒤 어제 일을 물어보는데, 포조 역시 전날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언제부터 장님이 되었느냐’란 질문에는 버럭 화까지 낸다. 포조와 럭키가 퇴장하자 소년이 다시 등장한다. 소년 또한 블라디미르에게 어제의 일을 모른다고 하면서 1막에서와 똑같이 고도는 오늘 오지 않고 내일 올 거라는 소식을 전한다.
구원에 대한 기대와 절망
이렇듯 2막은 1막의 상황을 대동소이하게 반복하며 두 사람의 기다림이 지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베케트는 앞에서 나온 부제를 통해 이 반복적인 기다림, 또는 기다림의 반복을 ‘희비극’으로 연출할 것을 요구했다. 이 작품의 비극성이 주로 기다림의 부조리한 본질과 말의 한계 그리고 삶의 유한성 등과 같은 무거운 주제와 연관된다면, 희극성은 부랑자, 광대 같은 인물들의 모양새 및 그들의 서커스적인 행동과 관련이 있다. 무거운 주제와 가벼운 표현 기법 사이의 이질적인 결합이 이 연극의 주된 정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더불어 이 희비극성은 ‘기다림’ 자체가 갖는 정조이기도 하다. 기다림은 시간의 흐름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하도록 요구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을 무의미한 것으로 체감하게 한다. 만남이란 사건이 지속적으로 유예된다면 기다림이 갖는 무의미함도 그만큼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 무의미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일까?
<고도를 기다리며>를 단순히 ‘부조리한 기다림’의 드라마로만 간주하는 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숱한 기독교적 상징을 간과하는 것이다. 아일랜드의 개신교 가문에서 태어난 베케트는 자신이 기독교 문화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기독교적 모티프를 많이 활용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이 작품에서 ‘구원’이라는 전통적인 주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은 무시하기 어렵다.
사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구원에 대한 기대와 절망의 ‘베케트식 형상화’로도 읽을 수 있다. 그는 블라디미르의 입을 빌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도둑의 이야기를 작품에 직접 도입하고 있기도 하다. 베케트는 이 작품의 주제를 묻는 질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 문장을 자주 인용했다. “절망하지 마라. 도둑놈 중 한 명은 구원받았다. 기대하지 마라. 도둑놈 중 한 명은 저주받았느니라.” 관념들을 믿지는 않지만 관념의 형상화에는 늘 매료된다고 하면서, 베케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말에 관념이 놀랄 만큼 잘 형상화되어 있다'고 평했다.
1막 서두에서부터 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인물로 소개되는 블라디미르는 두 도둑놈 가운데 하나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두고 “확률치고는 괜찮지.”라고 말한다. 구원받을 가능성이 반반이니까 나쁜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확실한’ 확률이 아니라는 데 있다.
블라디미르 :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어. 복음서를 쓴 네 사도 가운데 단 하나만이 그때의 상황을 그런 식으로 전하게 됐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네 사람이 다 그 자리에 있거나 어쨌든 그 근처에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그중 한 사람만 구원받은 도둑놈 얘기를 써놓았거든. (사이) 이봐, 고고, 가끔은 맞장구를 쳐 줘야 할 것 아냐?
에스트라공 : 그래. 아주 아주 흥미롭네.
블라디미르 : 넷 중에 한 사람만 말이야. 나머지 셋 중에서 둘은 숫제 언급도 없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 두 도둑놈이 욕설을 퍼부었다는 거야.
여기서 ‘네 사도’란 4대 복음서의 저자를 말한다. 그런데 ‘둘은 언급조차 없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 도둑놈이 욕설을 퍼부었다고 했다.’는 블라디미르의 말과는 달리, 실제로 <요한복음>에서는 추가적인 언급 없이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못 박혔다고 기술되었으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두 도둑이 모두 예수를 비웃고 모욕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도둑 한 명이 예수를 모욕하는 다른 한 명을 꾸짖으면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예수에게 간청하자, 예수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답한다. 그의 영혼을 구원하리라 약속한 것이다. 이 약속은 물론 ‘복음(福音)’이라는 말뜻 그대로 ‘좋은 소식’이다.
다시 말해, 블라디미르의 의문은 ‘네 명의 사도 가운데 한 사람만 구원받은 도둑 얘기를 하고 있는데도, 왜 나머지 세 사람의 얘기는 제쳐 놓고 그 사람의 말만 믿느냐’는 것이다. 에스트라공은 사람들이 다 바보라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산술적으로 네 명의 사도 가운데 한 사람만 반반의 구원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확률은 절반이 아니라 8분의 1, 곧 12.5%가 된다. 그리고 물론 이는 ‘썩 괜찮은 확률’이 아니다. 이것이 블라디미르의 근심이자 고통이며, <고도를 기다리며>를 이끌고 가는 작가의 문제의식이다.
고고와 디디,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자
절반의 구원 가능성이 보통의 사람들, 곧 바보들이 갖는 희망이고 기대치라면,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 ‘광대’의 구원은 훨씬 낮은 기대치를 갖는다. 따라서 그에 대한 기다림 또한 헛된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그 기다림을 지속한다면, 그것은 합리적인 계산이 아니라 ‘부조리’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간에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도둑처럼 모두 지옥에 떨어진다면 삶은 의미를 갖기 어렵다. 게다가 영구한 시간에 비하면 삶의 유한함은 ‘순간’에 불과하지 않은가.
포조의 말을 빌리면,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운명이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거리가 ‘순간’에 불과하다면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게 된다.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 거지. 해가 잠깐 비추다간 곧 다시 밤이 오는 거요.”라는 포조의 대사는 이러한 세계관을 집약하고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볼 때 구원이 없다면 삶의 지속은 무의미하다. 만남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기다림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더는 버틸 수가 없다며 자꾸만 자살을 꿈꾸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2막의 후반부에서 두 사람의 대사는 이 문제를 간결하게 정리해 준다.
에스트라공 : 이 지랄은 이제 더 못하겠다.
블라디미르 :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 :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이야.
에스트라공 :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 그럼 구원받는 거지.
이 대목에서 고도가 갖는 상징적 의미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고도’가 누구인지는 확정할 수 없더라도 ‘삶의 구원을 가능하게 해 주는 그 무엇’이라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이 없는 삶, 곧 고도와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삶은 차라리 목을 매다는 것이 더 나은 삶이다. 물론 더 좋은 것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적어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생각은 그렇다. 다만 그들을 붙들어 매는 것은 희박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다.
애초에 막이 오르면 에스트라공이 낮은 돌무덤에 앉아 구두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포기하면서 내뱉는 첫 대사는 “되는 일이 없어(Nothing to be done.).”다. 이 대사는 “더는 못 하겠어”란 뜻도 갖는다. 반면에 블라디미르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평생 그런 생각을 멀리하려고 애써 왔지. 블라디미르, 잘 따져 봐, 아직 다해 본 건 아니잖아, 라고 말하면서 말이야.”
여기서 “되는 일이 없어.”라는 체념, 혹은 “더는 못 하겠어”라는 포기 그리고 “아직 다해 본 건 아니잖아.”라는 분발의 촉구는 삶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대표한다. 더불어 무대 위의 두 주인공은 블라디미르의 말대로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마치 아벨과 카인 그리고 예수 곁의 두 도둑이 인간의 대표자인 것과 마찬가지다. 덧붙이자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블라디미르는 러시아식 이름이고, 에스트라공은 프랑스식 이름이며, 포조와 럭키는 각각 이탈리아와 영어식 이름이다. 이름에서부터 이들은 ‘인류’라는 대표성을 갖는다.
‘8분의 1’의 기대와 ‘8분의 7’의 절망
그런데 삶에 대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각기 다른 태도는 과연 구원에 대한 판정을 가능하게 할 만큼 ‘의미 있는 차이’일까? 서로를 ‘디디’와 ‘고고’라 부르는 이 단짝은 여러모로 다르긴 하다. 블라디미르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이며, 에스트라공은 자신이 ‘시인’이었다고 떠들어 댄다. 블라디미르는 끈기가 있는 반면에 에스트라공은 비약을 잘하고, 블라디미르는 과거의 사건들을 잘 기억하지만 에스트라공은 모두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블라디미르는 입에서, 에스트라공은 발에서 냄새가 나는 것처럼 사소한 차이로 수렴된다. 1막과 2막 끝에서 두 사람이 모두 “가자.”라고 얘기하면서도 가만히 있음으로써 ‘간다’와 ‘가지 않는다’라는 행동의 차이를 무화(無化)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1막에서 ‘주인과 하인’으로 등장한 포조와 럭키조차도 2막에서는 ‘장님과 벙어리’가 되어 등장하면서 신분적 차이가 흐릿해지며 그들을 연결해주는 끈의 길이도 짧아진다. 성취되지 않는 기다림 속에서 모든 차이는 그 의미를 잃게 된다.
이 연극에서 가장 긴장되는 대목은 2막에서 누군가 오는 것을 보고 고도로 착각한 블라디미르가 환호하며 흥분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구원받았다!”라 만세를 부르는 블라디미르와 대조적으로 에스트라공은 “난 지옥에 떨어졌군!”이라며 낙담한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오지 않으며 두 사람은 다시 화해하며 서로 껴안는다.
결국 두 사람의 운명은 아무런 차이도 갖지 않는다. 이렇듯 그들의 차이를 지우고, 그들의 탄원을 공허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산술적으로 답하자면, 그것은 구원에 대한 ‘8분의 1’의 기대와 ‘8분의 7’의 절망이다. 이 부조리한 배합 비율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현대인의 희비극적인 자화상으로 만든다.
09. 11. 07.
P.S. 베케트의 드라마와 관련하여 가장 요긴한 참고문헌은 그의 연출노트이다. 파버앤파버 출판사에서 내는 <새뮤얼 베케트의 연출 노트(The Theatrical Notebooks of Samuel Beckett)> 시리즈는 네 권으로 구성돼 있는데, 제1권이 <고도를 기다리며>(1993)이다. 1부에서는 본문과 자세한 주석, 그리고 2부에서는 1975년에 베케트가 직접 연출한 베를린 실러-극장 공연의 연출노트를 사진판으로 수록하고 있다. 오래전 영풍문고 양서부에서 보았던 책인데, 이번에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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