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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나는 나의 세계'인 상태가 되어 있다. 곧 나라는 틀 안에서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 = 세계의 탄생이라는 것은, 사건(세계의 시작)이 일어난 후에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듯 '주체(나)는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세계의 경계'인 것이다. 세계를 형성하는 것은 나라는 영역이다. 세계 그 자체가 나이므로 나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곧 '무세계'라 할 수 있다.
나는 세계에서 사라지고 사건만 담담히 일어난다. 이를 비트겐슈타인은 '순수한 실재론'이라고 말했다.
세계는 경험 그 자체를 성립시키는 조건이다.
세계도 눈에 보이는 형태를 지닌다는 것은 '얼개'가 있다는 말이며, 그것이 바로 '논리'라는 것이다.
'경험'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머리의 작용 덕이다. 우리는 대뇌를 통해 공부한다. 그리고 그 머리(대뇌)의 작용은 세계 내부의 사건이므로 '얼개'인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셈이다.
이 머리(대뇌)의 작용은 세계 내부의 사건이므로 세계의 '얼개'인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셈이다.
세계 속 알맹이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바꿀 수는 있지만 '얼개'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얼개'를 바꾸면 더는 세계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성질을 전부 없애면 맨 마지막에는 '얼개'만 남는다. 그렇게 남은 것이 '논리'다. 그러므로 논리란 '경험'에 앞선다.
윤리란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며 상황이나 시대, 사람에 따라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 윤리다.
나 = 세계의 나...
이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가만히, 조용히 존재한다.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상관없이 그 틀로서 '절대' 변화하지 않는다.
나와 세계는 같으므로, 나의 죽음은 세계의 끝이다.
세계 자체의 틀이 사라져서 없어지는 것이므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다.
단적으로 무가 되어 버린다. 게다가 그 무를 확인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세계가 없으므로, 그렇게 되면 세계의 끝.
곧 나의 죽음을 경험하거나 확인하는 사람 혹은 존재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완전한 무인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논리 철학 논고>의 마지막에 쓴 말로, 기존 철학자를 향한 것이다.
'신'이나 '윤리' 등에 관한 다양한 말로 해온 전통적인 철학자들에 대해, 확실히 답이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의해도 전혀 의미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말해도 소용없는 일에 관해서는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다. 아무 말이나 뱉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는 말이다.
입으로 이러쿵저러쿵하기보다는 행위야말로 중요하다. '말하기' 보다는 '보여줘야' 한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인간의 구조상 타인의 감정을 내면에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행함'을 '행할' 뿐.
특히 그 '행함'을 시작하기 위한 무언가(행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크기가 없다).
행위 자체가 배후에는 아무것도 끌어들이지 않고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우리의 행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실제 말의 주고받음(언어 게임)에는 자기만의 딱정벌레는 절대 등장하지 않는다. 등장하는 것은 '딱정벌레'라는 같은 말뿐이다.
깨지 않는 꿈은 꿈이 아니다. 깨지 않는 꿈은 현실 그 자체다.
곧 착각이 '올바른 지각'을 배경으로 한 것처럼, 꿈도 '깨어 있는 상태'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의심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양의 '믿는다'는 행위가 필요하다. '믿는다'는 배경이 없다면 '의심한다'는 행위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의심한다'는 행위는 한 번뿐인데 그 한 번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믿는다'는 행위 (믿는다는 것도 의식하지 않을 정돌 받아들인다는 것)가 기반에 깔려 있어야만 한다. '의심한다'와 '믿는다'는 것은 무척 비대칭적인 관계(같은 장소에서 나란히 비교할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종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세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에게는 나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감각을 실천(=실전)에서 시험하려 한 것이다.
언어는 우리의 감정이나 심정과 관계가 없는데 관계가 있는 척을 하는 것이다.
[ 자평 ] 슬슬 비트겐슈타인에 발을 디밀기가 가능해질 것 같다는 기쁜 착각이 든다.
비트겐슈타인은 내게 모욕감을 준 첫번째 철학자였다.
20대 초반 그래도 꽤 책을 읽은 나에게
그의 얇은 책.....<논리철학논고>....
우습게 보았다고 한 페이지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1889년에 태어난 사람이 1917년, 즉 28세에 쓴 책을 1991년 즈음에 물론 20세 밖에 안되었다지만 한 페이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니.......
그 좌절감과 모욕감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이제 서서히 그 모욕감을 느꼈던 비트겐슈타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도구들이 생겼다..
밟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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