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와 반윤회 by 정세근
[ 밑줄/연결 ] 내가 보기에는, 신라의 혜초나 당의 현장이 본 것도 7세기 후반의 힌두교화된 불교였지, 우리가 상상하는 석존 중심의 불교가 아니었다. 석가는 그때부터 점차 힌두신 비슈누의 화신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인도인들에게, 정확하게 힌두교도들에게 불교는 천민의 종교로 느껴질 수도 있다. 힌두교도들에게 자이나교가 상인의 종교로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실체가 없다. 그것은 내 잘잘못의 결과일 뿐이지, 형태를 이루어 이미 주어졌거나 장차 주어질 사건이나 상황이 아니다. 고정된 자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선악도 미리 주어져 있지 않다고 보는 불교에서 업이 실체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A와 B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이지 A와 B라는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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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8. 20.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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