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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내가 보기에는, 신라의 혜초나 당의 현장이 본 것도 7세기 후반의 힌두교화된 불교였지, 우리가 상상하는 석존 중심의 불교가 아니었다. 석가는 그때부터 점차 힌두신 비슈누의 화신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인도인들에게, 정확하게 힌두교도들에게 불교는 천민의 종교로 느껴질 수도 있다. 힌두교도들에게 자이나교가 상인의 종교로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실체가 없다. 그것은 내 잘잘못의 결과일 뿐이지, 형태를 이루어 이미 주어졌거나 장차 주어질 사건이나 상황이 아니다. 고정된 자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선악도 미리 주어져 있지 않다고 보는 불교에서 업이 실체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A와 B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이지 A와 B라는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윤회나 업도 모두 실체 없이 운동만 있는 일종의 허상임을 불교는 주장한다.
붓다의 깨달음은 모든 것이 연기라는 제법의 실상을 본 것이었다.
연기설은 모든 고정불변하는 실체성을 부정한다.
윤회는 힌두교의 것이고, 연기는 불교의 것이다. 힌두교는 윤회하는 내가 있어야 하지만, 불교는 연기하기 때문에 나란 없다. 윤회는 고정된 나를 전제하고, 연기는 나의 실체를 부정한다.
불교의 핵심개념을 꼽으라면 무아, 연기, 무자성, 공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럼에도 모든 것의 이론적 바탕은 연기이다.
실체란 사물에 어떤 고정된 속성이 있고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옮겨지거나 바뀌지 않는 그 무엇을 말한다.
용수로 불리는 나가르주나의 중론은.....
용수의 중론은 불교의 실체논쟁에서 불후의 지위를 갖는다.
중론은 중관사상으로 철저하게 실체성을 부정한다. 유도 아니지만 무도 아니다. 따라서 공이다. 아무것도 실체화되지 않으므로 어떤 것도 절대화되지 않는다.
불교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 탈도그마의 정신이 바로 선종의 저변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계급이나 지위, 지식이 있고 없음, 경력의 길고 짦음과 상관없이 깨달을 수 있다는 선의 선언은 정말 매력적이다. 거기에 인간의 불평등은 없다. 오직 나의 의지 뿐이다. 진리를 얻겠다는 구도의 정신이 있고 없음에 따라, 그 치열함과 처절함에 따라, 깨달음은 얻어지거나 맴도는 것일 뿐이다. 내 속에 답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과 구도는 같은 차원에서 이해된다.
(한자경)
한자경의 <불교의 자아관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의 한계>라는 제목으로 기독교적인 접근으로는 불교의 자아관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시각에서 서술...
김종욱, 최인숙, 조경택은 모두 무아와 윤회는 양립가능하고 무모순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김진은 홀로 악전고투하고 있는 셈이다.
한자경이 제기한 세 가지 문제는..
첫째, 석가는 오히려 연기설로 무아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 불교깨가 윤회와 연기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무아론적 윤회설'을 '무아론적 연기론'으로 대치한다고 해서 문맥이 달라지지 않는다. 이 문구는 오히려 연기를 설명하고 있지 윤회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
둘째, 참된 자아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 그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일상의 자아가 무엇이고, 깨닫고 실현시켜야 할 불성이나 진여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자아가 있으냐 없느냐의 논의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석가는 업과 윤회를 말하고 해탈을 말하면서도 무아를 주장하였다. 아니 오히려 해탈 자체가 무아의 깨달음에서 비로서 시
참다운 자아란 곧 무상성을 깨달은 나라는 것이다. 만일 진아가 무아의 성질이 없이 불변의 실체성을 지닌다면 그것은 불교에서 정의하는 진아가 아니게 된다. 진아는 다름 아닌 무아의 각자이다.
셋째, 불교의 관점은 칸트의 기독교적 설명방식과 다르다. 불교에서 인간의 의식, 적어도 석가나 깨달은 자의 인식은 무한하며, 기독교처럼 신에게만 전지전능의 역할을 부여하지 않는다.
한자경은 알라야식만이, 이른바 일심만이 상속의 일관성을 좇게 해준다는 주장이다. 정승석은 오히려 좀 더 철저해서 알라야식이나 유식도 무아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언어적 구상'이나 '방편적 구상'일 뿐, 실체성을 띠지 않는다고 못 박는다. "얄라야식은 찰나적으로 상속하는 습기일 뿐이므로 불변하거나 불멸하는 본체가 아니다." 따라서 찰나적인 의식의 연속적 흐름을 가리키는 상속에 의한 윤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심의 상속을 명백하게 생각하고 있는 한자경과는 자못 구별되는 이해방식이다.
윤호진은 '소멸상태로서의 열반은 가장 잘 알려진 정의이며, 열반이라는 말 자체가 소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할 뿐만 아니라, 무아이론과 열반을 생각할 때에는 이 정의가 가장 합당한 것이다."라거나 "무이이론과 상속이론을 인정한다면 논리상으로 열반은 소멸과 같은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석존은 삶을 괴로움으로 보고 그것의 제거에 모든 것을 걸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죽음은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이고, 탈출 그 자체로 해방이다.
괴로움은 자기집착 곧 아집에서 온다.
철저한 무아론에 따르면, 존재로서의 열반이 없듯이 윤회의 존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신도 없고, 영혼도 없고, 자아도 없다. 따라서 윤회되 없다. 윤회는 '실재 하지 않은 허구와 가상'일 뿐이다.
서구의 윤리설이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정의론이었다면, 동양의 윤리설은 개인적 변혁에 주목하는 수행론 또는 공부론이었다. 불교는 이 둘을 만족시킨다. 개인의 소승적 변혁을 통해 사회의 대승적 책임을 이루고자 한다. 학습과 수행을 통한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은 곧이어 사회를 현실적으로 개선하거나 구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승석은 유식이 마음의 유아설로 오해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한자경은 그것이야 말로 무아론의 완성이라고 여긴다.
최인숙은 <무아-윤회 양립설에 대한 해석>에서....
조성택의 <불교의 이론과 실천 수행 - 초기 불교의 무아설을 중심으로> 글은.....초기 불교의 무아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거의 완전한 논문이다.
연기는 형이상학적 원리라면, 윤회는 그것의 구체적 형상화임을 드러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윤회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필요조건이지만, 연기는 불교가 성립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충분조건이다. 윤회를 몰라도 연기를 알면 불교를 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힌두교는 윤회의 종교이고 불교는 연기의 종교이다.
윤회와 연기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주체의 존재여부이고, 실체의 인정여부이다. 그러나 연기는 주체를 부정하고 실체가 없음을 확정한다. 양립불가능한 것은, 무아와 윤회만이 아니라, 연기와 윤회도 그러하다.
[ 자평 ] '6장' 무아와 윤회논쟁 만으로 책 값은 하는 듯...
'<공기톡> 공부하기 기찮은 사람들 위한 친절한 지식톡'이라는 팟 캐스트에서 시험: 수행의 정석 싯다르타 편을 들었다.
[공기톡] 공부하기 기찮은 사람들 위한 친절한 지식 톡 : 팟빵 (podbbang.com)
대학원생 즈음 되는 젊은 친구들이 일정한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주고 방식으로 꽤 재미있게 듣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좋았다.
다만 싯다르타의 깨달음에 대한 방송(??)에서
‘무아와 연기'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이리 저리 헤메고 있는 음성을 들었다.
무아와 윤회가 엮이면 헤메게 되는 설명은 붓다 생존 당시에도 있었던 문제라 이 젊은 친구들이 명확하게 설명하리라 기대하지는 않고 들었다.
이 젊은이들이 예전에 읽은 이 책을 다시 꺼내게 되는 계기를 주었다. 불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합의와 논란이 있으니 젊은 진행자들이 헤메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내가 이들의 방송(??) 진행에서 불편했던 것은 방송의 진행과 주제에 대한 예의 없음 이었다.
특하 거북했던 부분은 설명을 하는 친구에게 질문하는 질문자들의 태도다. 질문을 하는 어투에서 기독교나 서양철학을 공부한 틀로 무아/연기 (확대하면 이 들 말로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약간은 내려 깔아 보려는 조롱의 어투를 느꼈다.
질문은 자기가 모르는 것이나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을 묻고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자세에서 나와야 한다. 자신의 높은 지식과 폭넓은 경험을 내비추거나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내뱉는 것은 질문이 아니라 질문의 탈을 쓴 독설이다. 묻고자 하면 상대방을 인정하고 그냥 물어야지, 상대방을 물면 안된다.
젊은 친구들의 말대로 싯다르타라는 사람이 뭔가를 알아냈다고 하는 그 '알아낸 바'가 2022년을 살며서 칸트나 하이데거, 데리다 정도를 읽었다고 (내심 우쭐대는) 20 ~30대 젊은이들에게 비판적이고 놀림감처럼 질문될 정도로 허술해 보이는 걸까?
이 분야를 전공하거나 밥벌어 먹는 분야는 아니지만 내가 알기로도 이 젊은 친구들이 주장하는 '무아와 연기'의 비논리적인 측면은 길게는 용수의 중론에서, 1990년 대부터 ~ 2005년 즈음 철학자들이 논쟁한 <한국불교의 무아윤회 논쟁>에서도 꽤 많이 논의가 되었던 문제다.
보고 배운 것이 많아 진다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풍부한 지혜나 무르익는 인간의 태도가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많이 배웠다고 생각되어지는 사람 중에 오히려 하나의 관점에 외붙어 옹고집이 되는 사람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고 있는가.
보고 배운 것이 자신의 그릇이 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첫 번째 질문은...."나는 오만해 지는가? "이다.
내가 알게 되면서 웃습게 보여 지는 것들이 많아 진다면 나는 잘못 되고 있을 개연성이 크다.
앎으로 인해 당당해 지는 것과 앎으로 인해 오만해 지는 것은 다르다.
칸트나 하이데거를 읽었다 하여 싯다르타가 우습게 보인다면 "자신은 오만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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