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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 금주에 읽은 책 중 김연경교수의 <살다, 읽다, 쓰다>와 오선민작가의 <자유를 향한 여섯번의 시도>가 좋았다.  김연경교수의 책은 80여 권의 문학 고전에 대한 3~4P의 감상문이며 오선민작가의 책은 온전히 카프카에 대한 책이다. 

 

왜 깊게 읽기가 필요한 지를 알게 해준 책이다. 오선민작가의 다음 책이 기다려 진다. 

 

(김연경교수의 <변신> - 일상의 당혹, 혹은 일상으로부터의 도피)

변신은 산업화와 관료제에 대한 풍자를 훌쩍 넘어선다.

 

변신은 장미빛 진보를 약속한 근대의 몽상에, 안일한 인간관과 세계관에 물음표를 찍고 진화 대신 퇴화(인간에서 동물, 심지어 벌레로!), 상승 대신 전락, 성공 대신 실패, 축조 대신 해체를 얘기한다. 죽음의 순간에 삶이 조망되듯 인간이 인간이길 멈출 때 비로소 그 본질이 밝혀진다. 

 

(김연경교수의 <소송> - '체포'와 '처형'사이, 지루한 '소송'같은 삶)

 

정녕 카프카는 "농담의 검은 밑바닥까지 내려가기를 "(밀란 쿤데라, <커튼>) 원했던 것 같다. 눅눅한 농담(희극)과 찝찝한 진담(비극), 즉 '체포'와 '처형', 그 사이에 위치한 '소송'은 물론, 부조리한 인간 실존의 은유이다. 덧붙여 존재와 존재함 자체가 죄이다.  신부와 대화를 나누던 중 터져 나오는 K의 절규는 그래서 더 절절하다.

"뭔가 잘못된 겁니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땅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인간입니다."

 

(김연경교수의 <성> - 새로운 패배를 향하여)

 

성을 신의 은총과 자비의 상징으로 보는 전통적인 독법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 폐허와 볼모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고 숭고한 것은 새로운 패배를 향한 K의 거듭되는 시도, 그 '집요함'이다.

 

영원한 이방인을 자처하고 문학의 언저리를 맴돌며 끊임없이 문학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에게 문학은 "광인에게 광기와 같은 것", "임산부에게 임신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성은 문학의 은유에 가깝다. 문학의 부름을 받았으되 그 안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 그것이 문학의 상황이다. 

 

(오신민작가의 <자유를 향한 여섯번의 시도: 카프카를 읽는 6개의 키워드)

카프카에 따르면, 다르게 산다는 것은 다른 존재가 세상을 만나는 방식을 흉내 내면서 내가 세상과 접속하는 방식을 이렇게 저렇게 교정해 보는 일이다. 

 

카프카의 말대로 우리는 자기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을 읽어야 한다.

 

"내가 이미 말했잖는가, '여기에서 떠나는 것', 그것이 나의 목적일세."

 

글쓰기는 그에게 매일 밤 자유를 실감케 해주는 수단이었다. 수없는 고쳐 쓰기, 카프카는 자신이 어떤 문장에도 갇힐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고 분명 기뻣을 것이다.

 

나는 카프카의 작품을 읽을 때 가장 소용없는 질문이 '왜 이렇게 썼을까?'임을 알게 되었다. 카프카는 처음부터 쓸 것을 정해 두지 않았다. 그의 장편이 미완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애초부터 그가 도착 지점을 정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자기 경험', '자기 생각'이라는 것이 없다.  아무도 자신의 행위를 뒤돌아보지 않는다.

 

자유란 자기 삶에 쉼 없이 딴지를 거는 일이며, 자기가 어떤 구석에 갇혀 있는지를 보면서 간다는 것을 '소송'과 '측량'이라는 <실종자>와 <성>의 두 주인공의 주 임무를 통해 살펴보았다.

 

1장. 유목: 어디에도 이르지 않지만 어느 곳에나 이르는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의 자유를 왜 타인에게, 제도에게 호소해야 하느냐는 점이었다. 허락과 승인이 필요한 자유라니? 왜 내 자존을 저 권위자에게, 저 제도에게 평가받아야 한단 말인가? 사람들이 호소한 대상은 '정부' 였다. 그것은 관료적 제도이다. 

 

'전체'라는 것이 또한 추상적이고 모호한 실체가 아닌가? 이렇게 무리에 의탁해서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면 결국 더 효율적인 방책을 가진 무리, 더 큰 크기와 세기를 가진 무리를 찾아 헤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어떤 거대한 전체의 굴레로 다시 기어들어 갈 수 밖에 없다. 

 

민족주의자건 자본가건 남을 억누르며 차별해야지만 자신의 자존을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다 똑같다. 

 

카프카는 자기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굴레가 무엇인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가족과 회사였다. 어째서 이 두 문턱이 카프카에게 문제가 되었을까? 

 

카프카는 글이란 아는 내용을 쓰는 것도 아니고, 자기 안의 무의식을 따라 쓰이는 것도 아님을 강조한다. 완벽하게 육체와 영혼을 열어 놓으면 자신을 통과하는 온갖 욕망들과 감정들, 상념들이 나의 펜 위에서 모습을 드러내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카프카가 '가족'을 문제삼은 것은 그 원초적 관계 안에 작동하는 권위적 작동방식 때문이다. 

 

아버지는 단지 이 세계에 먼저 도착했고 자신의 경험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

 

노예는 왜 복종할 수 밖에 없는가?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어날 온갖 사건을 자신의 힘으로 돌파할 수 없는 자들은 삶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설명해 주는 대상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바로 그 대상이 불안을 조장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권위란 자신에게 묻고 스스로 답하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자신보다 많이 알고, 더 많이 알기에 옳을 것이라고 간주하는 자에게 바치는 영예이다. 권위자는 권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무식한 노예가 있기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2장. 독신: 가족을 해치고 공동체를 만들고

 

<변신>은 가족 관계를 유지하는 운동 법칙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어떤 구심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같은 욕망을 가진 자들이 계속 그 관계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는 것이다......즉 돈줄을 마련하는 것이 가족을 유지라는 첫번째 요건이 되는 것이다.

두번째 운동 법칙은 원심력의 작용에 의해 배덕자를 색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온기'이지 '가족'이나 '민족'이라고 하는 타이틀이 아니다.

 

독신자는 정확히 자기 삶에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3장. 소송: 정의를 비틀고 법을 고장내다

 

주어진 세계의 자명성을 의심하면서 그 세계가 허락한 방식에 완벽하게 무심한 존재들의 여행기라보 보면, 모든 이야기가 희극이 된다......변신이란 무엇보다 '해야만 하는 일', '있어야만 하는 것', 약속된 모든 규범 즉 삶의 척도로부터 결별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카프카는 "모든 피조물의 가장 숭고하고 결코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시간"이 그저 임금 산출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함을 보았다. 

 

모든 문서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규정과 규정만을 매개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한사람 한 사람의 삶과 상처가 한 꾸러미의 서류뭉치로 전환되고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규정 자체, 정의 자체가 계속 구성되어 간다는 점이다. 신분제의 와해, 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세상에 예측 불가능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불안해진 군중은 더욱더 권위적인 사람, 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정의를 찾아 헤매게 되었다. 하지만 잠깐 멈춰 서 주변을 바라보면 오히려 그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관료주의적 시스템 내부에서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빈틈도 너무나 많음이 보인다. 

 

카프카가 보기에 이렇게 막막하게 복도를 서성이는 삶, 시간 맞춰 문을 열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삶, 바로 이것이 공포스러운 까닭은 자신이 지금, 왜 , 여기에 있는가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구체적인 삶으로부터의 소외가 그들을 불행에 빠뜨린다. 

 

카프카가 보기에 인간에게는 모순된 또 하나의 본성이 있다. 인간은 목표 없이는 살아갈 수 없지만 목표에 자신의 완전히 갇혀 버리는 것 또한 참지를 못하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를 묶게 된다면 그 인간은 자신도 찢어 버리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쉴 틈 없이 클람의 눈치를 보았지만 정작 그는 눈이 없어서 마을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 명령을 받는 이를 바라볼 수도 심지어 그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없는 자. 마을은 그런 빈 얼굴들의 지휘 아래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카프카는 자신이 기대고 있는 제도들, 학교나 회사, 정부와 같은 것들을 하나의 정의로, 믿고 의지해 마땅할 선한 기구로, 그렇게 간주할 때의 상황을 여기서도 미로로 묘사했다.

 

멈추지 않는 한, 길은 우리 발밑에서 계속 자라날 것이다. 길이란 주어진 것이 아니며, 인생의 답이란 정해져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보자. '저는 학교에 빠지지 않았습니다!'라고 주장하려면 무엇보다 '학교를 빠지는 일'을 죄라고 인정해야 하고, 더 나아가 '학교' 자체를 반드시 다녀야 하는 지당한 장소로 수용해야만 한다. 

 

주인이 주인인 이유는 재산 때문이 아니라 그 질문이 나오기 때문이다. 고용인은 기다린다. 주인은 그를 기다리게 내버려둔다......기다리기만 하는 자는 그 어떤 경우라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쾌적한 호사스러움을 누린다...

 

카프카에게 자유란 나의 옮음, 내가 지키고 있는 고정관념을 의심하는 길에서만 만날 수 있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만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4장. 측량: 욕망의 지도 그리기

 

이미 측량된 것들, 선과 악으로 나눠져 버린 것들, 그런 것들을 다시 측량하는 것. 그것이 K의 자유다. 

 

카프카는 다양한 배역과 이름의 배면에 초월적인 정신이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카프카가 생각한 연극 미학의 핵심은 일회성이다. 연기란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역할 놀이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해주는 장치이다.......누가나 그 자리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고집해야 할 주체성, 독아적 개성이란 있을 수 없다.

 

5장. 변신: 어떻게 인간을 넘어갈 것인가? 

 

자신이 밤에 글을 쓰는 이유는....밤에는 낮 시간 동안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내는 모든 소음들이 중지된다고. 

 

카프카에게 글 쓰기란 저 바깥 세상에 있는 비평가나 독자 대중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상황과 조건 욕망을 인식하고 이해하게 하는 신체 훈련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다.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이 신체의 문제이고, 신체가 복합체라는 점은 우리가 특정한 욕망을 위해서만 살 수는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 준다. 

 

카프카가 보기에 어떤 상식에도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삶은 이렇게 자기의 믿음을 의심하는 길에 있다. 이보다 더 멋진 삶은 없다.

 

시골의사처럼 오직 질문하는 자만이 변신한다.

 

카프카는 단식 광대를 통해 자기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하는 자는 한없이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나를 구성하는 것들에 대해 꾸준히 의심하면서 내가 다르게 구성할 수 있는 관계들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변신이며 다른 삶의 생산으로 가는 출발이 된다.

 

페터는 그저 지금 자신이 갇혀 있다고 생각되는 그 지점에서 자기를 가로막는 온갖 벽들을 더듬어 보다가 나갈 구멍을 발견했을 뿐이다.

 

카프카가 변신의 테마를 통해 돌파하려고 한 문제는 인간중심주의였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는 오만함, 동물을 포함한 자연 전체를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어리석음. 이것이 한 개인에게서는 자신이 소유한 것과 자신이 맺는 관계만을 절대시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6장. 문학: 발신하지만 도착하지 않는 편지

 

카프카에게 글쓰기란 끔찍한 앎의 문턱을 넘어 광활한 불복종의 땅으로 들어가는 통과의례이다. 자기가 알고 이해했던 것의 종식 즉 자기 앎의 죽음을 담보로 하는, 목숨을 건 도약이다. 끝없는 실패와 무한한 시도의 초원을 달리는 행위. 그것이 카프카의 글쓰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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