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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내 생각은 이렇다. 뇌는 명사이고, 마음은 동사이다. "뇌의 기능적 발현이 마음이다." -마빈 민스키
신경심리학은 뇌의 구조를 비롯해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것과 어떤 연관을 갖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경과학 교수 사라 라자르(Sara Lazar)는 장기간 명상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 두꺼운 대뇌피질을 갖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챈털 빌레무어(Chantal Villemure)교수의 연구에서는 요가 수행자들이 더 큰 대뇌피질을 보일 뿐 아니라, 해마체(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의 크기도 커짐을 확인했다.
서양철학에서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아마도 최상의 대답은 생각으로 인간의 특성을 정의하는 것이다. 가장 간결한 표현은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명언일 듯 하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선불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이 없다면, 어떤 문제도 없다." (No Self, no problem.)
자아라는 개념이 단순히 마음의 구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강력한 증거를 찾아볼 것이다. 머릿속 어딘가에 위치하는 물질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생각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자아가 있어 그것이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생각의 흐름 자체가 자아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란 명사이기보다 동사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이 없다면, 실은 자아도 존재하지 않는다.
---> '나는 없다'란 주제로 책장에 책이 몇 권 있다. 대부분 명상 가리치는 직업을 가진 분들의 책 (무위해공, 니르말라 (Nirmala) 등) 이고 두 분다 라마나 마하리쉬와 연관이 있다.
---> 심리학, 철학쪽 책도 몇 권 있다. 철학자 신동완씨는 '‘나’라고 인식하는 자의식 자체는 뉴런의 연결로 이루어진 하나의 기능일 뿐이며, 우리가 ‘영혼’이라고 믿는 특별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라 했다. 이런 견해는 이미 샘 해리스 (Sam Harris) 같은 신경심리학자들, 신경과학자들이 많이 제언한 사항이다.
생각의 흐름, 생각의 전개됨 자체를 움직임으로 보지 않고 실재하는 어떤 사물처럼 보기를 너무 오랜 동안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는 것을 실재라고 보지 않고 단순히 '나'라는 개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누구나 다소 시간이 걸린다.
도교 철학자이자 작가인 위무위의 명언으로 핵심적인 개념을 소개하고 이를 대신하고자 한다. '어째서 행복하지 못한가? 생각과 행위의 99.9%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 헌데 정작 자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좌뇌는 일종의 해석장치 또는 이야기꾼이다...패턴의 인지, 언어, 지도 만들기, 분류 및 범주화는 모두 좌뇌의 기능이다.....실험적 증거에 따라면, 바로 이런 기능들이 합쳐져 자아라는 느낌을 만들어내며, 이 느낌이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강하게 믿게 이끈다.
의미 찾기, 상황의 큰 그림을 보고 이해하기, 창조성 발현하기, 감정 경험하기 공간 지각 및 처리 능력. 모두 우뇌에 의지하는 기능이다.
아인슈타인은 문제가 생긴 생각과 동일한 수준에서는 결코 해답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느낌은 좌뇌로부터 창조되었기에 좌뇌로 아무리 열심히 애써본들 그 실체를 밝힐 수 없다. 당신의 의식이 당신의 경험을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잘 안내해서, 좌뇌의 한계를 넘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게 나의 바람이다.
1. 우연히 발견된 해석 장치
"허파가 숨쉬듯, 뇌가 마음한다." - 휴스턴 스미스(Huston Smith)
r가자니가 박사는, 좌뇌가 주위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유와 설명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마디로 좌뇌는 현실에 대한 일종의 해석장치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따금 틀린 설명을 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언어 담당인 좌뇌는 주어진 주변 정보를 바탕으로 그럴싸하고 말이 되게끔 상황을 재구성하여 설명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비록 정보가 부족해서 그 설명이 완전히 틀린 것이라 할지라도.
좌뇌의 역할이 해석과 신념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이때 해석의 개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실제 상황과 들어맞지 않아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경우 좌뇌 해석장치를 의식하지 못한 채 살기에, 방금 떠오른 생각이 단지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려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건을 보고, 판단, 해석을 붙이고 그것이 정말로 사실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건이나 사실이 좌뇌가 접근할 수 없는 곳에서 발생했다면, 마음의 해석장치는 그냥 있는 정보만 가지고 상황을 정의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해석은 실제와 동떨어질 수 밖에 없다.
---> 100명의 허접한 선사보다 더 나은 제안이다. 되도 않는 말로 즉문즉답 같은, 깊이도 없는 법거량을 하는 쇼보다는 100배 나은 tip이다. 이제 감각만 가지고, 껍질 뿐인 선사들의 시대는 갔다. 이런 제대로 연구하고 고민한 선사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좌뇌의 작동......공간 안에 사물에 초점을 맞추고, 이름표를 붙이고, 분류한다.....거기서 어떤 의미를 뽑아내려 애쓴다. 지각 능력을 동원하고 분류하고, 패턴을 찾아내는 일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기가 어렵다.
머릿속에 생각이 일어날 때, 그것이 단지 흐름일 뿐임을 보지 못하고 거기서 붙잡을 수 있는 구체적인 - 사물같은 - 어떤 '것'을 찾아내서 거기다가 '나'라고 이름 붙이는 게 아닐까? 결국 '나'라는 느낌은 임의적인 움직임속에서 어떤 패턴을 봄이 아닐까? 그토록 개선시키려 애쓰는 '나'가, 생애를 통해 무수히 일어나는 사건과 행위와 경험을 설명하고 납득하기 위해 일관성 있게 지어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좌뇌가 사용하는 주된 도구는.....언어와 범주화(categorization)이다. 이것이 내면에 사용될 때 자아라는 느낌을 창조하는 핵심임을 알 수 있다.
---> 특히 언어와 자아의 형성은 <설지>라는 수행자가 쓴 책에서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 깊게 연구를 하시는 분과 수행하시는 분의 주장이 '언어'에 닿아 있다. (1장. '생각으로부터의 탈출' 중 사실은 언어를 통해 사건이 된다, 언어는 지각을 물든인다 등)
좌뇌가 언어에 있어 지배적임.....스스로에게도 말로 소통을 한다. 이를 생각이라 한다. 이 소위 내면의 대화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그것이 자아라는 신기루를 창조하는 핵심 역할을 담당한다.
언어란 지도 만들기의 한 종류이다. 지도가 그림이라는 상징을 이용하여 어떤 장소를 대변하듯, 언어는 단어라는 상징을 이용하여 다른 어떤 것을 대변한다.
이언 맥길크리스트(Iain McGilchrist)는 명저, <주인과 심부름꾼: 두뇌 속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배신과 정복의 스토리>에서 저자는 좌뇌가 현실에 대한 지도 제작 중심 역할을 하며, 이때 지도를 그리는 펜이 바로 언어라고 하였다.
---> 두툼한 책으로 번역이 되어 있다. 인류의 문명을 좌뇌와 우뇌의 대결로 서술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구매만 해 놓고 현재(2020년 11월)는 못 읽고 있다.
좌뇌는 언어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현실에 대한 지도를 현실 자체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선의 경구에도 이를 경계하는 얘기가 있다. "메뉴를 음식으로 착각하지 말라."
마틴 테이처(Martin Teicher)의 연구에 따르면 언어적 학대는 적어도 물리적 학대만큼 해로우며 우울증을 비롯한 심리장애의 강력한 위험인자라고 한다.
언어는 훌륭한 도구이지만 선불교에서 얘기하듯, "당신이 도구를 사용해야지 도구가 당신을 사용하면" 곤란하다.
단어를 그것이 가리키는 실제로 오인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언어를 기반으로 한 생각 덩어리인 허구적 자아를 진짜 나로 착각하는 것이다.
마케팅 전문가들은 포장에 '신선'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음으로써 음식에 대한 우리의 지각에 변화를 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좌뇌가 하는 모든 일은 범주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언어에서부터 공간 내 사물을 인식하는 것까지, 전부 실재를 쪼재고 판단해서 서로 다른 범주로 구분하는 일이 아닌가.....범주란.....단순히 실재에 대한 또 다른 지도이다. 그것은 '저 바깥'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정신적인 표상일 뿐이다. 아니 차라리 오직 인간의 마음에만 - 그것도 뇌의 왼편에만 콕 집어서 -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맞겠다.
범주는 좌뇌가 어떤 것들 사이의 차이를 분별하고 서로 반대라는 개념을 창조하는데 있어 기반이 된다. 본질적으로 나눌 수 없는 하나를 어떤 공통되는 특질 등으로 무리지어 각각을 다르다 여기는 것이다.
지도처럼 범주도 세부사항을 무시해야만 한다. 게다가 범주화는 자체로 서로간의 나눔, 분리를 하는 행위이다.
범주는 정신적인 표상에 불과하다.....오직 마음속에, 그것도 우리가 그것을 인지할 때만 활성화되고 존재한다. 문제는 이것이 실제인 어떤 '것'이라 믿을 때 발생한다.
내 몸, 내 뇌라는 물리적 실체는 여기 있다. 하지만 그것에 붙이는 '나'는 오직 개념으로만, 그것도 내가 떠올리는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나'는 언어로 표현되는 일종의 유용한 범주적 가상 인물이다. 하지만....그것을 온 마음을 다해 항구적인 실체로 믿는다. 그리고 그 결과 좌뇌 해석장치를 하인이 아닌 주인으로 모신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설정한 범주와 하나가 되어 스스로 고통받는 것이다.
범주화와 해석을 통한 이해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또한 그 한계가 그리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저명한 심리학자와 서구 철학자들을 포함하여, 이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생각에 기력을 전부 소진시키는 경우가 많다.
---> 어쩌면 이것이 깊은 생각과 (언어를 통한) 많은 지식 쌓기 만으로 진실에 가지 못하는 원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은 자체로 범주적 정보처리 방식이고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범주란 마치 모래사장에 임의의 선을 그어 원래 연속된 하나이던 것을 둘로 나누듯 창조된다....선을 어디쯤 그을 것인가 정할 때 소위 판단이 필요하다. 판단이 없다면 범주도 없다. 실은 해석장치의 가장 비슷한 말이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석한다 함은 곧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것이며 이는 필연적이다.
---> WoW. 신신명의 첫 구절이 왜 이런지, 이제야 (과학적으로) 알 것 같기도 하다.
칼로 자르듯 경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채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실용적 이득을 얻는다. 해석장치가 있고 그것이 판단을 통해 끝없이 범주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마음에 담고 있기만 해도, 이들 판단의 필연성에 묶이는 대신 자유를 얻는다. 쉽게 말해, 해석장치를 의식하고 있으면 그 해석을 택할지 말지 선택권을 갖게 되고 그럼 당신은 그것을 예전처럼 심각하게 보지 않는다.
당신의 판단이란 단순히 모래사장에 그어진 또 다른 선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는다.
좋아하는 또는 싫어하는 것, 옳은 또는 옳지 않은 것, 그리고 '응당 이러해야 마땅하다'는 당위성. 이들 믿음의 집합체를 신념체계라 한다.
머리 왼쪽에 자리 잡은 일단의 뇌세포와 신경화학 물질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낸 결과물, 그게 신념이다. 선에서는 말한다. "옳고 그름은 마음의 병이다."
개별적인 자아란 언어, 범주화, 판단을 사용하여 좌뇌가 만들어낸 믿음이라 하면, 너무 무리한 상상일까?
현재의 자아와 원하는 상상의 자아로 다시 나누어 범주화 하고는 자기계발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다.
바깥 세계를 분리시키고 범주화 하듯, 해석장치는 내면의 세계도 똑같은 작업을 한다. 서로 상충되는 두 개의 믿음, 즉 관리자(현재의 자아)와 관리되어야 할 다른 어떤 것(미래의 자아)으로 또 다시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둘 사이의 분쟁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좌뇌가 언어와 범주화 양쪽에 뛰어나다는 점은 그것이 패턴 인지에 능숙하다는 반증이다.
패턴을 보고 그것이 브래드 피트의 묘사라고 읽어 내는 과정은 오직 마음속에서만 일어난다.
---> 이런 것도 마찬가지 그 인물의 특성이라고 보고 우리는 이 그림을 보고 찰리 채플린, 처칠 수상을 떠 올린다.
심리학에서 뇌의 특정 부분이 패턴을 인식함을 최초로 알게 된 것은 헤르만 로르샤흐(Hermann Rorshach)박사의 업적이다.....1920년대에 그 유명한 얼룩무늬 검사를 고안해 냈다.......로르샤흐 박사가 진짜로 발견했던 것은, 패턴 인식장치는 아무리 무작위한 것이라도 거기서 언제나 의미 있는 뭔가를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해석장치가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있지도 않은 패턴을 찾아 헤맨다...
사람들의 자아를 위협하는 경우 패턴을 찾아내는 경향성이 증가함....
마음이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이야기하려"함은 그것이 계속 존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자아는 명사라기보다 동사에 가깝다. 그것이 존재한다 생각할 때만 존재하며, 이는 생각함이 곧 자아이기 때문이다.
자아가 수많은 믿음들로 구성된 가상의 복합체라면, 그것의 안전이 도전받았을 때 이를 채울 목적으로 위협받은 믿음 대신 갖고 있던 다른 믿음을 강화시킴으로써 자아 정체성을 보존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패턴을 보고, 사물을 범주화하고, 거기에 이들 패턴을 기술할 언어까지도 창조한다. 이 모든 걸 찰나에 해치우는 것이다.
이 역삼각형이 보이는 것과 당신의 개별적 자아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은 똑같은 현상이다. 같은 방법으로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추론(inference)이다.
자뇌가 자아라는 환영을 창조하는 건 이렇다. 당신과 남들이 범주적으로 다르다는 패턴을 감지한다. 그렇게 관찰해 낸 것을 기억, 선호도, 그리고 몸과 마음을 운전하는 '조종사'로서의 관점을 합쳐 자아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각자의 자아에 대한 정의는 각자가 타인과 어떤 차이점을 보이느냐에 의존한다. '내가 아닌 것' 없이 '나'는 있을 수 없다.
에고는 자체로 좌뇌가 만들어낸 구조물이다. 우뇌 의식으로 접속하는 많은 방법이 있지만,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하기에 설명이 힘들 수 밖에 없다.
선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의식을 실재로 되돌려 추상적 개념의 세계에서 헤매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우뇌는 "그냥 해(doing it)" 중추다. 우뇌와 좀 더 친해지는 방법이 있다. 일명 어떤 이유도 없이 그냥 하기. 돈을 벌기 위해서도, 자기계발을 위해서도 아닌, 단순히 그냥 행위 자체를 위한 행위. 이렇게 하면 좌뇌가 끼어들 틈이 없다.
거의 모든 인지 작업은 의미에 의존한다. 의미가 있어야 단기 또는 장기 기억에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의미는 인지의 토대라고 볼 수 있다.
"삶에서 의미를 찾아낸 사람은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은유가 어떤 것을 의미하려면, 선형적인 것에만 집중하면 보이지 않는 둘 사이의 연결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우뇌는 말에 의지하지 않는 의식의 한 형태일 뿐이다.
직감을 미신이나 멍청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전형적으로 좌뇌와 본인을 심하게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직감이 '무의식적(좌뇌 언어 반구에서 이용이 불가능하다는 의미) 의사결정이며, 어떤 면에서 자뇌의 지식적 앎보다 더 우월한 지능 형태이다.
관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시스템의 바깥으로부터 밖에는 없다. 그리고 그건 우뇌이다. 그러나 우뇌는 오직 감정으로만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 관조를 할 때면, 어떤 상황에서 무엇이 진실된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생각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불평이란 오직 사건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그것은 이야기일 뿐이며, 또한 일종의 부정적인 판단이다.
직감, 감정, 창조성의 영역에서, 우뇌 지능은 '언어를 넘어선 지혜'를 가져다 준다.
나는 '나의 의식'을 갖고 당신은 당신의 것을 갖으며, 이런 의미에서 해석적 마음은 본인이 마치 의식을 '소유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루퍼튼 셸드레이크(Rupert Sheldrake)....그는 의식이 두개골 밖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일종의 장(field)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 이것을 형태장(morphic field)이라고 불렀다.....과학에서 장(field)이라 함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 물질적 개체와는 다른 특성과 움직임을 보인다. 형태장은 물질적 개체를 감싸고 있거나 붙어 있는 거으로 생각된다.....장은 자체로 총제적(holistic)이어서 분리시킬 수 없다.
---> 루퍼트 셸드레이크 (Rupert Sheldrake)는 영국의 생물학자로 국내 번역본이 있다. 초능력, 텔레파시 등을 다룬다.
----> 과학의 망상, 과학자인 나는 왜 영성을 말하는가
20세기 중반, '기적적인 마이크 Miracle Mike)'라고 알려진 닭이 있다. 잡아먹기 위해 머리를 잘랐지만 살아남았다......살려 두기로 결정했고,....음식과 물을 직접 목으로 넣어주었다. 2년이나 더 살았다......마이크의 사례를 보면, 의식이 뇌에 있다는 주장은 불가능한 듯하다.
---> WoW.....
신경과학은 아직 뇌 안에 의식의 위치를 찾지 못했다. 그건 아마도 단순히, 거기 의식이 없기 때문일 수 있다. 만약 뇌가 - 의식을 품고 있는 게 아니고 - 단순히 의식에 연결되어 있는 것일 뿐이라면 어찌할 텐가?
매일 아침, 의식이 70억 개의 뇌로 주파수를 맞춰(tune-in)들어간다. 잠에서 깨는 순간, 의식은 각자 유일무이한 70억 개의 기억과 관점에 접속한다. 그리고 해석장치가 재부팅 된다.
[ 자평 ] 읽다. 또 읽다. 소장
한 권의 책이 좋으면 그 분이 쓴 책 전부를 읽을 때가 있다.
인지 신경심리학 교수인 크리스 나이바우어 (Chris Niebauer)가 그렇다.
(뭐 국내 번역본이 두 권 밖에 없다.)
국내에 있는 선수행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분들(선사, 명사가 등 등 뭐든) 이 더욱 분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뜬구름 잡는 식인 즉문즉답식 설법, '법거량', '무차대회', '템플 스테이' 등 하다가 서양 분에게도 뒤쳐지게 생겼음...
다음 책이 더욱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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