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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들

개인이라는 기적 by 박성현

비즈붓다 2016. 12. 2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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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은 이유 ]

 

부제는 집단을 벗어나 참된 개인으로 비상하라.

 

1980년대 전국민주학생연합연맹의 전국 조직책이었고 , 한국일보 기자를 거쳐 벤처기업이 나우콤 대푱였다가 파산을 한 저자의 약력이 우선 내공이 깊어 보여서 골랐다.

 

또한 저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특이하게 번역한 번역자이기도 하다.

(제목은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이고 그렇게 번역한 이유가 있는데

나 100% 동의한다. 다만 들고 다니면서 읽기는 너무 불편하다.)

 

 

 

[ 배운 점 ]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하는 글들이 많다.

다시 읽어 보니 2016년 12월 27일,,,

대한민국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말과 글에는 업보가 있다. 사람의 정신과 감정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지금 사회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면 다음 세대는 '더 새로운 문제가 더 많아진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세대의 비밀이다. 하나의 세대는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앉히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은 '감히 세상 따위가 구원해 낼 수 있는' 싸구려 존재가 아니다."

 

 "훌륭한 자아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갈망이 없이 자유와 권리만 찾는다면 반쪽짜리 개인일 뿐이다.

 

 

[ 주요 내용 ]

 

전체주의자는 '사회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세상과 영원한 긴장 관계에 놓인 존재다'라고 믿는 사람이다.

 

전체주의자는 인간을 구원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을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개인주의자는 훌륭한 자아, 훌륭한 개인이 되는 것을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ㅇ 나는 하나의 전체주의 사상에서 또 하나의 전체주의 사상으로 옮겨가는 것이 참으로 쉬운 일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전체주의자 입장에서는 "어느 사회가 인간을 구원하는가?"라는 문제에 관한 선택일 뿐이기 때문이다.

 

말과 글에는 업보가 있다. 사람의 정신과 감정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ㅇ 개인의 권리, 자유, 웰빙에 관심을 가지는 태도......이기심은 세상을 작동시키는 매우 근본적인 에너지이다.

 

ㅇ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자유, 권리, 웰빙에 대한 욕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착각이 힘을 얻어 사회 전체의 풍조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가짜 개인주의'....'나'의 권리와 자유를 최대한 키워서 '내' 방식대로, '내' 맘대로, '내' 욕망대로 사는 것이 최고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풍조....그 목표는 물건으로 나타난다. 아파트 평수, 통장에 찍힌 돈, 입는 옷, 몰고 다니는 자동차.....인생이 아파트, 통장, 옷, 자동차로 환원될 수 있다도 믿는 '착각'인 것이다.

 

ㅇ 개인이라는 존재는 저절로,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개인은 예외였다. 사람은 오랫동안 떼로 살아왔다.....훌륭한 떼는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훌륭한 자아는 나 자신의 선택과 노력으로 만들어 진다.

 

훌륭한 자아란 무엇인가? 훌륭한 개인이란 무엇인가? 개인됨이란 무엇인가? - 개인주의자들에게는 이 화두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이다. 이 화두에서 참된 개인이 탄생한다. 개인은 탄생하기도, 번성하기도 어려운 종족이다. 개인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기적인 것이다.

 

ㅇ "지혜는 소박하다."

 

ㅇ 사상이나 종교는 다른 문맥에 놓이면 전혀 다른 역할을 한다. 카톨릭 신앙은 유럽에서는 개인을 질식시킨 종교로 전락했지만 조선에서는 개인을 일깨운 종교가 되었다.

 

공자는 지식인의 내면적 독립성과 긍지를 가르쳤지만, 조선 말기의 유교는 백성을 착취하는 관료의 곁치레를 가르쳤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으면 처량한 마음이 들 뿐이다.

 

ㅇ 권력, 거대 기구, 거대 조직은 본질적으로 개인에 대한 적대적이었다....루터교는 카톨릭에 대항해서 개인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막상 루터교가 제도권 국교 체계가 된 후에는 역시 개인을 탄압했다....태평천국은 '반외세'를 표방한 잔혹하고 광기에 찬 농민 반란이었다.

 

ㅇ 권력은 총구가 아니라 떼에서 나온다. 떼 자체가 권력이다. 또한 모든 제도화된 권력은 떼의 후광을 받아야 한다.

 

ㅇ 떼가 원하는 폭력, 떼가 보고 싶어 하는 짜릿한 이벤트를 집행한 것이기도 했다.  '떼의 근성' 안에 존재하는 폭력과 잔혹하에 대한 갈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짜릿한 이벤트로서는, 개인을 주장하는 이단자들을 말뚝에 묶어놓고 불태우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ㅇ 그 떼의 이름이 민중이든, 민초이든, 대중이든, 군중이든, 폭도이든, 다중이든, 국민이든, 민족이든, 네티즌이든, 진보든, 보수든! 이 모든 이름은 우리 유전자 속에 남아 있는 '떼의 근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과연 집단이 지성적일 수 있을까? 폭도(mob)가 스마트할 수 있을까? '집단 지성'과 'Smart mob'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례들 - 예를 들어, 위키피디아 - 은 집단이 아니라, '독립적 개인의 네트워크'이다.

 

ㅇ '떼 찬양'이야말로 가장 안전하고 이익이 많은 비즈니스이기 때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권력과 돈은 떼가 있는 곳에 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 권력은 골목대장 수준의 힘에 불과하고, 그 돈은 잔돈푼에 지나지 않는다.

 

ㅇ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비겁이 오여, 떼의 거대한 비겁으로 만들어진다.

 

신약성경 어디를 봐도 "떼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없다. "진실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기준은 떼에게 있느니라"라는 이야기도 없다.

 

ㅇ 지오르다노 부르노 (Giordano Bruno)는 합류하는 것에 거부했기 때문에 1600년에 로마의 한 광장에 세워진 말뚝에 묶여 불에 타서 죽었다...그는 "자신의 생각을 떼의 생각에 허겁지겁 일치시키려는 충동은 그 사람됨이 비열하고 천박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진실이냐 아니냐는 떼가 믿는가, 믿지 않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ㅇ 마라는 선동의 귀재였다. 그는 두려움을 자극하여 떼를 움직였다. 떼의 원동력은 두려움이고 개인의 원동력은 용기이다.

 

ㅇ 순수한 시민 운동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정치적인 행위이다. 공동체의 불의와 횡포에 대한 저항이 정치적이지 않다면 도대체 무엇이 정치적이란 말인가?

 

ㅇ 냉정한 관점을 동원해야 한다. 핵심세력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들의 정치적 의도와 정치적 이해관계는 무엇인지, 이슈에 관한 핵심 쟁점은 무엇인지, 사태의 전개에 의해 누가 정치적 이익을 얻고 누가 손해를 보는지 등을 냉철하게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순수하고 순진한 시민 운동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식의 주장이야말로 참으로 편리한 변명, 안이한 어거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자아)은 세상(사회)과 영혼 사이의 긴장이다. 인간에게는 사회성과 함께 초사회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극성 사이의 긴장이 바로 인간이다. 따라서, 필자는 인간에게 궁극적 충만감과 행복을 줄 수 있는 사회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지금 사회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면 다음 세대는 '더 새로운 문제가 더 많아진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세대의 비밀이다. 하나의 세대는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앉히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은 '감히 세상 따위가 구원해 낼 수 있는' 싸구려 존재가 아니다.

 

ㅇ 인간을 구원하는 훌륭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조지 루가치의 말처럼 주체성을 회복하는 지름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만, 위선, 횡포, 폭력으로 치닫는 지름길이 될 뿐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세상' 이라는 개념이 바로 전체주의 사상의 기둥이다.

 

ㅇ 공동체에 대한 저항을 잘못 수행하면 개인의 완성이 아니라 개인의 멸종으로 치닫는다. 당당한 시민, 당당한 주체가 되겠다고 시작한 일이 시민과 주체의 학살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지옥으로 가는 길은 좋은 뜻으로 포장되어 있다."라는 서양 속담이 나온 것이다.

 

ㅇ 공동체에서 불의와 횡포를 발견한다면 마땅히 치열하게 저항해야 한다. 단, 그것이 매우 맹렬한 정치 활동이라는 점을 염두해 두고 냉철한 검증과 평가의 칼날을 서슴없이 들이댈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정치적 열정을 자기 자신의 손으로 해부해야 하는 것이다. 이 엄격한 자기 검증이 바로 세 번째 유형의 자아-세상 긴장의 요구조건이다.

 

ㅇ  지식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지적 작업의 규칙과 프로토콜이 먼저 정립되어야 한다.

 

ㅇ 프로토콜: 소통의 위한 행동, 기호, 상징의 배열 절차. 문명이 고도화될수록 프로토콜의 중요성은 점 점 더 커진다. 프로토콜을 어길 경우 매우 치명적인 손해를 입게 되는 경우가 많다. 공자가 말하는 '예'를 영어로 번역하면 가장 적합한 단어가 '프로토콜'일 것이다.

 

ㅇ 오일러,,,,: 18세기 수학자. 그래프 이론을 개척. 그래프 이론은 Randering과 같은 분야에 쓰이는 수학. 즉, 복잡한 면, 입체, 망을 수학적으로 표현하고 구성하는 분야. CAD분야에 활용

 

ㅇ 각성의 시대를 시작한 데카르트의 '방법론'은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규칙을 순서대로 지켜야 한다고 했다.

 

1) 명확하게 사실이라고 확신하는 것 외에는 일체를 거부해야 한다. 편견과 성급한 결론을 피해야 하는 것이다.

 

2) 연구의 대상을 가장 작은 차원까지 잘게 나누어야 한다.

 

3) 처음에는 단순하고 쉬운 사물부터 시작하여 차차 보다 복잡한 것에 대한 지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고할 때는 사물에 일정한 순서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4)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까지, 가능한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관점까지 확대함으로써 아무것도 빠진 게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ㅇ 자신의 입장, 이해관계,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오히려, 참된 개인주의자라면 마땅히 자신의 입장, 이해관계, 관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보편적 이성의 명령을 이야기하는 칸트의 주장은 이성이란 개인을 말살시키는 끔찍한 소리로 변질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ㅇ 인간은 칸트의 불편부당하고 보편적인 이성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 이해관계, 입장에서 출발해야 한다.

 

ㅇ 자유와 권리를 누릴 때가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세상과 긴장을 빚을 때 개인, 즉 자아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참된 개인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자유와 권리'가 아니라 '진실된 자아'이다.

 

ㅇ "왜 인간은 진실을 원하는가? 왜 인간은 진실을 원해야 하는가?" - 개인주의 철학의 완성자인 니체는 바로 이 질문은 던졌다....니체는 인간에게 질문을 던지는 스핑크스에게 "그런데 너는 왜 만날 질문을 하고, 나는 왜 만날 대답해야 하지? 서로 역할을 바꾸면 안돼?"라고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을 아느뇨?"라고 거들먹거리지 말고, "인간이 왜 진실은 원하는가? 왜 진실을 원해야 하는가?"라는 근본 문제부터 생각해 보자는 이야기이다.

 

ㅇ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 기술, 제도, 문화, 사상, 지식을 자랑하는 대륙 전체에서 100년동안 키에르케고르와 니체, 단 두 명의 사상가만이 유럽인의 자아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ㅇ 키에르케고르는....1855년 42살의 나이로 숨졌다. 그의 사상은 자아, 진실, 신앙- 이 세 가지 화두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는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독창적이고 특이한 사상가로 현대의 실존주의, 개인주의 사상의 문을 열어젖힌 사람이다.

 

ㅇ 키에르케고르는 '떼는 거짓이다'에서...

 

-  '진실을 옹호하는 증인'은 진실에 대한 문제에 관하여 결코 떼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 매일 매일의 언론과 익명성은 이른바 '공중(대중)'의 참여가 있을 때마다 더 정신병적인 상태가 될 뿐입니다. 추상적 개념에 불과한 공중(대중)은 이제 '우리 대중이야말로 진실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최종 결정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공중의 집회'조차 한 번 열린 적 없습니다.

 

ㅇ 지금 세상에서는 참회를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괴물이 등장했습니다. 이 괴물은 바로 '익명의 인간'입니다. 이 '익명의 인간'은 허깨비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 역시 '익명의 인간', 즉 허깨비입니다. 이른바 공중, 그리고 '익명의 독자' 역시 허깨비, 허깨비일 뿐입니다.

 

진실을 전하는 주체는 항상 개인입니다. 진실이 전해질 때는 오로지 개인 단위에서만 전해집니다. 이렇게 보면, 개인만이 진실입니다....오직 개인 사이에서만 진실이 소통될 수 있습니다. 진실은 추상화된 것, 환상적인 것, 비개인적인 것과는 반대입니다. 떼는 비개인적입니다. 떼의 다른 이름인 '공중' 역시 비개인적일 뿐입니다.

 

ㅇ "신은 죽었다"라는 이야기는 공동체 차원에서 공유하는 윤리와 도덕이 증발했다는 진단이다.... 당시 유럽의 웬만한 지식인들은 모두 신이 죽었다는 것 - 전통적 윤리와 가치 체계가 붕괴했다는 것 - 을 알고 있었다. 니체가 위대한 것은 신이 죽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괴물, 즉 침략적 국가주의와 계급투쟁을 정확하게 식별했기 때문이다.

 

ㅇ 니체가 의미하는 국가는 19세기 말 유럽의 제국주의, 철학적 국가주의를 뜻한다. 니체는 무정부주의(아나키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상가이다.

 

ㅇ 전체주의 사상가의 예.

   

   - 마르크스 : '공산당 선언' 서문이나 '자본론' 1권은 빼어난 문학적 감수성을 보여줌. 만약 소설가였다면 스탕달, 발자크,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를 훌쩍 넘어서는 작품을 남겼을 것

 

  - 레닌: 만약 경제학자가 되었다면 마샬이나 케인즈를 발아래 두는 경제사상가가 되었을 것

 

  - 모택동:  칼럼니스트나 에세이스트가 되었다면 노신, 임어당을 합친 것보다 더 훌륭한 칼럼과 에세이를 썼을 것

 

  - 체 게바라: 여행하면서 인디오에 관한 책을 썻다면 중남미 자연보호와 빈민 생활 개선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을 것

 

ㅇ 윤리, 도덕기준,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은 개인의 영혼 밑바닥에서 부터 - 세상과 자아 사이의 긴장에서부터 - 나와야 한다. 이 긴장이 사라지면 세상이 원하는 것이 선이고, 세상이 미워하는 것이 악이 될 뿐이다....

 

전체주의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아의 죽음 - 세상과 자아 사이에 긴장이 증발하는 현상 - 이다. 자아의 죽음이 곧 전체주의를 만들어내는 자궁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말하는 선과 악을 의심하는 것 - 설사 '부도덕하다'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자기 자신의 가치 기준을 세우는 것- 이것이 바로 자아의 징표다.

 

ㅇ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의 윤리와 가치관을 만들고 바꾸고 발전시켜야 한다.....구속된 자아가 자유로워지는 것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자아가 공동체의 필연을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위대하다.

 

ㅇ 자아의 절대적인 자유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거나 철이 덜 든 사람이다. 윤리와 윤리, 가치와 가치가 충돌하고 경쟁을 벌이는 상태이기 때문에 누구도 결코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참된 개인은 자아의 절대적 자유를 주장하는 대신, 이 충돌과 경쟁을 당연한 것,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 잠열: 거대한 물체의 온도를 변화시켜려면 그만큼 더 큰 에너지와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ㅇ '민주화 운동가'라는 용어에는 아무런 법률적 의미가 없다. 필자는 '정치범'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ㅇ 임의동행: 영장이 제시되거나 혹은 현행범이 아닌 경우, 본인의 뜻에 반해 수사기관에 끌려갈 필요가 없다는 윈칙...

 

ㅇ 지금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성숙한 개인들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문제이다. 이는 곧 '진실에 대한 열망'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화 코드, 윤리 코드로 자리 잡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기도 하다....이러한 문화가 곧 공동체의 지배적인 코드가 되어 있는 사회는 아직 없다. 모든 사람이 개인화되어 자기 자신의 이익, 자유, 권리에 몰두해 있는 상태에서는, '진실'은 불편하고 생뚱맞은 것으로 취급되기 딱 좋기 때문이다.

 

ㅇ 창업자가 자신이 성취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당대의 졸부로 끝난다....반면에 자신의 성취에서 일정한 원리를 발견해 이를 지속적으로 밀어붙이면 커다란 그룹을 이룬다.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성취에 깃들어 있는 비밀과 원리를 발견해 이를 밀고 나가면 위대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ㅇ 역사를 부정하면 역사는 스스로 모습을 감춘다. 역사의 실종이 일어나는 것이다.

 

ㅇ '원죄 없음'. 우리의 과거에 업보가 없다는 점이 바로 한국인에게 주어진 최대의 행운이다.

 

ㅇ 우리 조상에게 중국은 그 존재 차체가 재앙이고 공포였던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문명의 젖줄이었다.

 

 

ㅇ 소박함, 들러내지 않음, 자연스러움, 절제가 깊게 배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정신은 "거대한 재앙 바로 옆에 살면서 '나'를 지킨다"라는 긴장, 그 자체였던 것이다. 무려 천년동안! '천년의 긴장'이 만들어 낸 '정신의 평등'에 대한 믿음, 인간의 내면적 독립성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가장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

 

ㅇ 이승만은 그 당시 독립운동가 중에 열강의 속성과 국제정치를 정확하게 뀌뚫고 있었던 거의 유일한 '세계인'이었다.

 

ㅇ 사람들이 센델의 책에 대해 공감하는 것은 딱 한가지 이유 때문이다. '무거운 단어'를 사용할 때는 좀 제대로 알고 쓰자! 라는 생각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의와 공정성이라는 매우 '무거운 단어'에 대해 여러 가지 논점을 쉽고 진지하고 신중하게 소개한 책이다.

 

ㅇ '무거운 단어'는 떼를 유혹하고 움직이는 사악한 언어로 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떼에 휩쓸리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참된 개인은, 떼를 모으기 위해 사용되는 '무거운 단어'들에 냉정하고 의심에 찬 눈길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ㅇ 개인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원하는 사람에게 "훌륭한 자아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파고 내려갈 것을 요구한다. 칸트는 "이성을 위한 자유"를 주장했다. 우리는 '자아의 성숙을 위한 자유'를 추구한다. "훌륭한 자아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갈망이 없이 자유와 권리만 찾는다면 반쪽짜리 개인일 뿐이다.

 

ㅇ 자유로운 존재라면 자네를 이끄는 핵심 사상에 대해 말해봐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자네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인지

    나, 짜라두짜는 전혀 관심이 없어.

    자네가 '무엇을 위해' 자유로워진 것인지 눈 똑바로 뜨고 말해봐.

 

ㅇ 센델의 문제의식은....훌륭함과 사악함에 대해 공동체 차원에서 공유하는 기준이 사라지고 오직 개인의 권리만 내세우고 절차적 정당성만 따지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ㅇ 분배는 까다롭고 예민한 문제이다......첫째, 시장경제에 있어서 분배는 도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분배는 결과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반면, 도덕은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관한 문제이다. 동기가 나쁘지 않았다면 결과가 좋지 않았더라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

 

ㅇ 동기가 아니라 결과를 따진다는 점에서, 분배 공정성의 문제는 도덕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수요-공급 원리에 따라 분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장경제에 있어서는, 분배 시스템 (예를 들어, 세금 시스템)을 바꿀 것을 주장할 수는 있어도,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ㅇ 참된 개인은 물질의 분배에 관해서가 아니라 자아와 진실에 관해 죄책감을 느낀다. 내가 나에 대해 짓는 죄, 내가 나의 영혼에 대해 짓는 죄, 내가 진실에 대해 짓는 죄 - 참된 개인에게는 이러한 죄들이 가장 심각한 것이다.

 

ㅇ 우선 세상이 가르치는 도덕과 윤리 전체를 의심한 후에야 '나'의 도덕과 윤리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윤리 코드가 제대로 된 것이고, 자아가 그 코드를 충실히 지키면서 살다보면 어느새 자아는 자신의 영혼과 삶과 생명 전체를 인정하고 사랑하게 된다. 이 과정을 길고 아름다운 서사시로 표현한 것이 바로 니체의 '짜라두짜'이다.

 

ㅇ 개인주의자는 공동체 차원의 논의를 믿지 않는다. 대신, "훌륭한 자아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각자 고민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공동체 차원에서 훌륭한 삶에 대한 공동의 기준을 도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훌륭한 개인, 훌륭한 자아에 대한 기준은 온전히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 차원의 윤리 코드이다. 참된 개인은 각자 이런 코드를 만들어 소중히 모시고 산다.

 

ㅇ 마음의 심지, 즉 정신의 독립성은 없어지고 처세술이 영혼 전체를 잡아먹게 된다....거대 관료주의 조직에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처신 요령은 모든 사람과 원만히 지내고, 모든 상관에게 잘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ㅇ '진실에 대한 열망'이 바로 참된 개인들 사이의 메타 윤리 코드, 메타 문화 코드이다. '너'의 진실에 비추어, '나'의 진실을 넘어 새로운 진실에 도달하는 것 - 이것이 바로 자아의 성장이다.

 

ㅇ '진실에 대한 열망' 이야말로 프로페셔널, 즉 전문 지식노동자의 직업윤리의 원천이다......프로페셔널이 부정직하고 불공정한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프로페셔널이 저지르는 불공정한 행위에는 참으로 '창의적이며' 교묘한 여러 가지 수법이 있다.

 

ㅇ 인터넷의 본질은 '똑똑한 단말'이다. 통신에 필요한 일체의 지능이 개체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이런 구조를 'Smart edge'라고 부른다. 이때 에지는 망의 가장자리, 즉 망에 참여하는 개별 단말을 뜻한다.

 

ㅇ 인터넷은 '프로토콜을 공유하는 개체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 다름 아니다.

 

ㅇ 인터넷은 인간 심리의 존재 지평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인간을 상징과 소통의 주체로 만든 것이다.

 

ㅇ 상징이 없으면 소통이 성립하지 않고, 소통이 없으면 상징은 한 치도 자랄 수 없다...상징-소통 환경이 변화하면 인간 그 자체가 변화한다.

 

ㅇ 아름다워서 소중한 게 아니라, 소중해서 아름다운 것이다. 부족한 듯 보이지만 내가 소중히 여기고 사랑을 기울이면, 어느새 훌쩍 큰 모습으로 성장한 상배방을 발견하게된다.

 

ㅇ 진실도 마찬가지이다. 완벽한 진실은 없다. 부족한 진실, 불완전한 진실을 소중히 여기고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려 노력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진실은 지식의 쪼가리가 아니라 과정인 것이다.

 

ㅇ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함부로 양심, 도덕, 정의, 진보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삶의 진실은 복합적이고 다면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된 개인은, 자기 자신의 관점과 이해관계를 파괴하는 경우에도 진실을 옹호하는 태도 - '머리의 정직성'을 사랑한다. 또한 진실을 무시한 채 양심과 도덕을 내세우는 태도 - '자기 정당성'을 증오한다.

 

ㅇ 전통적인 귀족이 누렸던 특권을 기업가에게 줄 생각이 아니라면, 기업가를 귀족이라 부르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위선 혹은 강압에 지나지 않는다. "돈 내놔!"란 소리를 좀 세련되게 하기 위해 그들을 귀족이라 부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업가는 귀족이 아니며, 자선은 의무가 아니다.

 

ㅇ 제발 '돈키호테'를 진지하게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한다. '돈키호테'는 기사도를 풍자한 소설이 아니라, 기사도가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는 유럽 사회를 풍자한 소설이다.

 

ㅇ 문화인류학의 아버지인 호이징어 역시 그의 대표작인 '중세의 쇠락'에서 기사도의 고귀함을 높게 평가하면서 , "그 근본 정신은 자긍심이다."라고 말했다.

 

'머리의 정직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불이익과 불편함을 무릎쓰고 진실을 옹호하는 사람, '자기 정당성'을 증오하기 때문에 떼가 퍼뜨리는 순응주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귀족이다. 이것이 바로 삶을 사랑하는 고귀한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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