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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실존주의에서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그에 따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 결과 우리는 타인이나 사회의 관습, 종교의 교의, 도덕, 죄의식, 여러 가지 압제 세력에 의해 프로그램 된 로봇처럼 살아가는 대신 자신의 진정한 '본성'인 독자적인 자유를 행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실존주의는 자유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철학이며, 성실과 용기를 무기로 삼아 현실을 직시하고 사물을 철저하게 통찰하는 법을 이야기하는 철학이기도 하다. 

 

실존주의는 자기기만(bad faith)을 질색하고 혐오하며 가증스럽게 여긴다. 

 

실존주의는 자유에 대한 철학이다. 자유의 핵심에는 선택이 있으며, 선택의 핵심에는 행동이 있다. 그러므로 실존주의의 핵심 혹은 인간존재의 핵심에는 행동이 있다. 사르트르는 "존재하는 것은 행동하는 것(To be is to do)"라고 말한다.

 

실존주의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며 반허무주의적인 철학이다!

 

진정한 실존주의자는 지금 자신과 다른 존재가 되기를 '바라지'만은 않는다. 진정한 실존주의자는 지금과 다른 존재가 되려고 결심하고, 자신을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다. 

 

실존주의자는 허무주의자라고도 할 수 있다. 삶이 본질적으로 불합리할뿐더러, 두렵고 피할 수 없는 진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실존주의자는 삶에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여 자기 존재에 부여하는 의미다. 

 

부조리한 삶은- 아니 차라리 죽음은 - 결국 승리를 거두고 말 테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노력하고 극복하는 여정이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이들의 사상은 한곳으로 수렴되어 일관성 있는 체계를 형성한다. 그 사상 체계의 중심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금언이 빛나고 있다......본질적으로 관념론을 부정하는 실존주의의 관점이 분명하게 요약되었다. 즉 어떤 사물에 실재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이상적이고 내세적이고 천부적이고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이다. 

 

인간은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먼저 존재하기 때문에, 그 이후 자신에게 결여된 의미나 목적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풀이된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끊임없이 창조하는 본질 말고는 아무런 본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류 실존주의자는 반관념론적이고 반형이사항적이며 무신론적이다. 실존주의에서는 인간을 의미가 없는 나머지 부조리할 지경인 무심한 우주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본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 발견되는 의미는 어떤 것이든 개인의 실존 범위 안에서 개인에 의해 창조되어야 한다. 자신의 존재 의미가 정해졌다고 생각하거나, 신 혹은 신들에 의해 인간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 정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착각의 늪에 빠진,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비겁자일 뿐이다. 

 

실존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시간과 자유, 인간 관계, 자기기만, 진정성 등에 대한 주장은 모두 현상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이론으로 뒷받침된다...

 

의식은 물질로 구성된 사물이 아니라 관계다. 

 

욕구나 기대는 오히려 그 사람과 세계의 '관계'라는 성격을 띤다...욕구는 '무언가에 대한' 욕구 일 수밖에 없으며, 생각은 '무언가에 대한' 생각일 수 밖에 없으며, 기대는 '무언가에 대한' 기대일 수 밖에 없다.

 

의식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 의식이 지각하는 세계와 '관계'로서 존재한다는 의미가 있다. 

 

지향성 대상이란 의식이 지향하는 모든 대상, 즉 의식이 지각하고 상상하고 믿고 느끼는 모든 것을 말한다.

 

사르트르가 칸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의 세계는 저 '바깥에' 존재하는 것과 '저 바깥에' 존재하는 것에 작용하는 의식 활동의 '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이 세계는 우리가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단지 이 세상은 우리가 세상과 마주하는 방식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뜻이다.

 

의식은 항상 결핍을 찾아내려 한다. 결핍은 각 의식이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본질적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를 초월하여 미래로 나아가는 존재로서 의식이 세계에 나타나는 실재에 불과하다.

 

왜 항상 무언가 결핍되었다고 느끼는가? 우리는 그 답을 알 수 있다. 항상 무언가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미래다. 미래는 결코 우리를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없다. 

 

의식은 본질적으로 일시적인 존재라는 이론에서 우리가 도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결론은 의식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의식은 본질적으로 일시적이기 때문에 자유롭다. 

 

일시적인 존재만 자유로울 수 있다. 자유롭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 '미래에' 진정한 의미에서 대안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미래의 가능성이며,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은 미래를 향하여 자유롭다는 의미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대타존재 - 수치심이나 자부심 - 이자, 저 바깥에서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대타존재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대개 인간관계를 우위와 초월을 다투는 끝없는 권력 다툼으로 여기며, 모든 인관관계의 기반을 '투쟁'이라고 주장한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자유란 사람이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일이나 할 능력이 되는 일, 해도 되는 일 따위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자유란 각자 처한 상황에서 하는 일 혹은 하지 않는 일에 따른 '책임'에 대한 것이다.....책임을 떠난 자유는 자유가 아니며 자유는 선택해야 하는 것, 그러므로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실존주의에서 자유란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는 책임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의 역경이나 저항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이 상황에서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를 자신이 선택한 행동으로 결정하는 데 따르는 책임이다. 

 

진정한 실존주의자로 향하는 항해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자 빠지기 쉬운 함정은 '자기기만'이다. 실존주의자가 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기기만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 성철 선사의 말씀하고 크게 차이가 없지만 더욱 고급지고 논리적이다. 

자기기만이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될 수 없는 것은 자신에게 거짓말한다는 의미에서 자기기만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를 속일 수 없다. 

 

자기기만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기보다 '자기 분산' 혹은 '자기 회피'의 지속적인 기투에 좀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자기기만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징징대기만 하고 그 상황을 바꾸기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니체와 마찬가지로 진실을 아는 일, 사물의 존재 양식을 아는 일, 인생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일에 필요한 능력은 뛰어난 지적 능력이라기보다 오히려 현실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와 성실함이라고 생각한다.

 

비진정성의 가장 분명한 특징이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다.

 

진정성에 도달하고 싶다면 자기 행동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진정성이란 자유와 책임을 긍정하는 행동을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는 임무이며, 동시에 자유와 책임에서 도피하는 듯 보이는 행동을 선택하지 않아야 하는 임무다. 진정한 인간은 모든 인간 기투를 위협하는 자기기만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기기만에 저항해야 하는 책무를 짊어진다. 

 

니체는 삶에 대한 가장 높은 긍정은 영속적인 반복을 욕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자신의 자유를 진정으로 끌어안고 인생이 자유로 빚어낸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사소한 사건까지 빼놓지 않고 처음부터 무한 반복하여 살아가는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생을 다시 한 번 똑같이 살고 싶지 않다면 잘못 살고 있는 것이라는 니체의 생각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영원히 되풀이해서 살아가기를 바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살기를 열망하라. 이것이 니체의 '운명애(amor fati)'다. 

 

[ 자평 ] 실존주의를 허무주의로 오해했다. 뭐라도 제대로 모르는 것이 세상에 이렇게 많다.

 

10대 ~20대 삶의 문제가 궁금할 때 나는 '선사'들이나 동양 고전 철학책을 주로 있었다.

달마나 노자, 장자가 내 삶의 지향점이었고 횟불이었으며 북두칠성이었다.

인간으로서 도달한 가장 높은 경지에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 돌아서 내려와 근현대의 라마나 마하리쉬, 일제 시대의 선사들, 다석 유영모선생님 등이 나의 인생 영웅이었다. 

 

부끄럽게도 내가 서양 철학자의 책을 제대로 한 두 권씩 읽기 시작한 것은 40대가 넘어 서였다.

철학자의 책이란 니체에 대한 해설서가 아닌 니체가 쓴 책의 원서에 대한 번역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아직 플라톤이나 칸트를 제대로 도전해 보지 못했다. 

 

2022년 현재 나의 의식으로는 서양 철학에 족적을 남긴 분들의 수준이 자타가 공인하는 대오각성으로 인간의 삶과 우주의 진리를 꿰뚫어 오도송과 임종계를 토해 내는 얼치기 선사들 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생각의 높이나 넓이 삶의 폭, 인류에게 남긴 유산, 지적 결실 등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 나은 면들이 있지 않나 싶다. 

 

예를 들어 철학자, 평론가이자 작가인 샤르트르(1905년 ~ 1980년)와 청담스님(1902~1971)은 살아 오신 시기가 비슷하다. 내 20대 정신 수준으로는 청담스님은 도인이고 샤르트르는 그저 문자와 언어에 얽메어 있는 지식 중독자 또는 선사들의 어록이 많이 나오는 문자 중독자일 뿐이었다.

 

30/40/50대를 거쳐 오면서 세월을 버틴 만큼 이제 내가 읽고 있는 책은 청담의 책이 아니라 샤르트르의 책이다.

20대의 나는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 1900년)보다 경허(鏡虛, 1849년 ~ 1912년)선사가 몇 수 높은 인간이라고 봤다. 

 

이제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확철대오'에 내가 정신 중독되었거나 세뇌 당했었다고 본다. 얼치가 선사들의 삶을 볼 것이 아니라 마하리쉬나 마하라지의 죽기 전의 삶, 붓다의 전체 생을 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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