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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마음챙김 교사들이 개인의 스트레스에는 사회적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집단적 고통과 그 고통을 없앨 수 있는 제도적 변화를 다루지 않는 것은, 마음챙김의 진정한 혁명적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이고, 마음챙김을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하는 진부한 것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 물론 개인 정신적 수양에 집중하는 명상이 사회적 원인과 대책까지 마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명상계에 있는 자들이 오만하여 명상이 마치 개인의 정신적 안정에 집중하는 효과와 목적을 넘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을 넘어 삶의 근본적 이치와 원리를 습득하는 방법으로 확대하려 한다는 것이다. 

 

위기는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경제에 주의하지 못하고 회복력을 갖지 못한 개인의 탓이 된다. 

 

긍정심리학과 더 광범위하게 퍼진 행복 산업처럼, 마음챙김은 스트레스를 탈정치화하고 개인화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 구조와 경제 체계에 내재하는 고통의 원인을 비판하는 내용은 배제한다. 

 

"고통을 일으키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불평등에 도전하기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두려움과 불안의 감정을 진정시키려는 '타협적인' 태도에 쉽게 편입되고 또 제한된다."

 

한병철이 말하는 '심리-정치'에 해당하는 것으로, 심리-정치란 현대 자본주의가 마음을 일종의 생산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마음챙김 수련은 스트레스를 없애고, 생산력고 집중력을 향상하며, 주 80시간 근무 후에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수단으로 경영진에게 판매되고 있다.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보다 자기 몰두가 우선하는 것이다. 한병철의 말처럼 이것은 청교도적 직업윤리를 다시 끌어 들인다. "끊임없는 자기계발 노력은 그 자체로 주체화와 지배의 기술인 프로테스탄트적 자기 성찰, 자기검열과 닮아 있다. 이제 우리는 죄를 수색하는 대신 부정적인 생각을 추적한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신자유주의를 '순수한 시장 논리를 저해할 소지가 있는 집단적 구조들을 파괴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말한다. 

 

자율적인(그리고 자유로운) 개인은 사회의 중심점이므로, 사회의 변화는 정치적 시위, 조직화, 집단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유시장과 개인의 개별화된 행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개인의 내면에 모든 지혜가 짓들어 있다는 신비주의적 관념에 찬성하느라 자본주의 제도의 거대하고 견고한 권력을 못 본체하는 것이 포함된다.

 

오히려 "판단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기"를 수련하면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마음챙김의 명령은 현 상황을 유지하는 사회적 마취제로 작용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인정하고 내려놓되 결코 사로잡혀서는 안 되는 무언가로 여길 때 감정들은 의미를 잃는다. 이런 논리는 분노, 슬픔, 실망 같은 감정들은 개인의 병리적 증상으로 치부함으로써, 정치적 측면에서 감정이 일어날 가능성을 거세하는 효과를 낳는다. 

 

문제는 무엇이 감추어지느냐다. 마음챙김 수련은 사회 문제를 개인화함으로써 현재 상황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을 불리하게 만든다. 

 

불교가 전통적으로 강조해온 탐욕의 근절을 편리하게 생략된다. 뿐만 아니라 각자의 몸, 감정, 건강을 스스로 관리하도록 개인에게 무거운 책임을 지운다. 세계의 변화는 곧 자신의 변화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현대 마음챙김 이데올로기의 숨은 의미다.

 

에리히 프롬은 고통의 사회적 원인이 간과된다면 우리의 괴로움과 불안은 결코 충분히 이해될 수도, 경감될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 나는 김태영씨의 책에서 이런 관점의 꽤 날카롭고 시사성 있는 지적들을 꽤 접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서사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세계가 이야기되는 방식,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권력과 특정한 이해관계, 사회적/정치적 환경, 그리고 현대의 마음챙김을 새로운 형태의 대중용 마취제로 따뜻하게 감싸는 경제 구조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마음을 뇌로 축소시킨다. 그러한 가정의 증거가 부족한데도 말이다. 게다가 인지신경심리학자 페르난도 비달(Fernando Vidal)이 지적하듯, "마음이 뇌의 작용이라고 말하는 이상, 뇌 활동이 뇌 활동을 변화시킨다고 떠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체 사실(alternative facts).. 스티븐 콜베어가 말한 '진실스러움'처럼.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실이냐가 아니라 상황이 어떻게 진실처럼 느껴지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챙김은 상당히 '과학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10대 스트레스 요인은 잘못된 관리 방식과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기업 문화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인은 건강보험 혜택 부족,  끊임없는 해고 위협, 의사결정의 재량권과 자율성 부족, 긴 근무 시간, 공정성이 떨어지는 조직, 비현실적인 요구 등이다. 불안정한 일자리는 건강 악화가 50% 증가하게 된 원인이며, 긴 근무 시간은 20%의 사망률 상승과 관련이 있었다. 

---> 직원들의 스트레스는 나쁜 경영, 나쁜 목표 추구, 나쁜 전략, 가짜 일, 나쁜 보스 등이 대부분 원인이라고 본다. 

현대 경영 이론은 기껏해야 어느 부족 국가의 의술을 신뢰하는 정도로밖에 신뢰할 수 없다. 어쨌든 주술사도 종종 병을 낫게 하니까 말이다. 운이든 직관이든 시행착오에 의해서든.

 

'젖소의 사회학'...만족한 소들이 더 많은 젖을 생산하는 경향에 빗대어 '행복한' 직원들이 더 생산적임을 암시한다. 노동자를 조정하려는 이런 시도들- 착취하는 환경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갈등을 억제하고 부인하기, 권력과 이익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들기 등- 은 기업의 마음챙김에도 똑같이 반복된다. 

 

조지 리치의 사회 이론, '맥도날드화'를 추구한다.

상품화의 첫 번째 지표는 대량 생산과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효율성이다.

두 번째 지표는 제공하는 내용을 수량화하고 결과를 측정하는 계산 가능성이다. 

 

기업의 도덕적 결함은 그 원인을 외부로 돌려 개인의 문제가 된다. 스트레스를 다스리지 못하면, 잘못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제도가 아니라 근로자 개인에게 있는 것이다.

 

기업의 마음챙김 프로그램은 개인에게 스트레스와 불행 혹은 안녕과 행복 가운데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신화를 영구히 존속시킨다. 이런 새로운 형태의 사고 통제가 은밀한 세뇌와 다른 이유는 자유의지론에서 이야기하는 '자유'의 유혹적인 매력 때문이다.

 

매리앤 윌리엄슨은 "영성의 모조품을 만들어서, 우리 안에 만연한 불필요한 인간적 고통을 해결하도록 허가를 내주는 짓은 현대 미국에서나 하는 행태"라고 말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마틴 루터 킹의 말을 인용했다. "중요한 문제에 관해 침묵하게 되는 날, 우리 삶은 종말에 접어들기 시작합니다."

 

모순적이게도 미래의 구원에 관한 카밧진의 견해는 현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 정치 참여 -으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킨다. 

 

로렌 벨레트는 "낙관주의는 잔인하다. 사람 혹은 사람들이 발전적인 변화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지만, 가능성에 대한 인식에 불을 붙이는 대상이 사실상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때.:라고 말한다. 순간에 주의를 고정하고, '행동'을 놓아버리며, 행위에 대해 지나치게 숙고함으로써 반대 의견은 종종 억압된다. 

 

궁극의 행복에 도취되어 부당함을 받아들인다면, 약물 중독자가 되어 좀비처럼 나른하게 망각에 빠지는 것과 뭑 다른가? 

 

진정으로 혁명적인 마음챙김은 사회를, 그리고 시민을 해방시킨다. 그 해방은 판단하지 않는 초연함이 아니라 비판적인 사고에 달려 있다.

 

[ 자평 ] 이런 책이 좋다. 보지 못한 것들을 보게 하는 놀라움.

 

한때 명상이나 선불교에 빠졌던 내게는 정말 신선한 시각을 주는 책이었다. 그런 빠짐에 문제는 얼핏 알고 있어지만 이렇게 정확하게 어떤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는지는 볼 수 없었다. 역시 고수의 눈은 다르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논쟁에서도 이런 문제가 있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도법스님이 말씀하시는 '선'의 과잉문제는 정말 내부에서 내지르는 용기있는 철침이라고 본다.

---> 스님은 “위로를 통해 치유하고 희망을 찾겠다는 것은 에어컨 처방과 비슷해서 순간적으로 편하고 좋을 수 있으나 결국 삶을 왜곡해서 바라보게 하고, 삶을 더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착각과 환상에 중독되는 삶”을 낳는다고 하며 고통의 실상을 사실대로 보는 연습을 권한다....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다반사의 사건들에 언제나 새로운 각도로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오랜 신념조차도 부정하는 용기”이다.

이런 과잉이 발생하는 흐름의 핵심은 무아와 연기의 깨달음 뿐임을 너무 확대하여 인간만사를 깨달은 체하는 그 자와 그렇 것이라고 깨달음을 숭배하는 대중의 어리석음이라고고 본다. 

깨달음이 One Punch로 만사를 해결한다면 왜 붓다는 깨달음 후 죽을 때까지 8정도를 가르치고 명상하고 다녔겠는가.

이런 측면에서 선의 과잉현상이 빗어난 현상의 대표적인 분들이 온갖 인간 문제에 대한 즉문즉답(즉문즉설) 방식을 싫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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