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 밑줄/연결 ]

 

말과 글에는 업보가 따른다. 사람의 정신과 감성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 1000% 동의한다. 무섭게 받아 들여야 할 문장이다. 

---> 하여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자기계발서 내라고 부측이는 자기개발족, 그에 부화뇌동하여 쓰레기 같은 책을 내는 사람들은 그로 인해 희생된 나무들의 업보가 붙을 것이다....

 

가짜 개인주의.....'나'의 권리와 자유를 최대한 키워서 '내' 방식대로, '내' 맘대로, '내' 욕망대로 사는 것이 최고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풍조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물건으로 나타난다......인생의 아파트, 통장, 옷, 자동차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는 '착각'인 것이다.

---> 2020년 ~ 2021년 내 주변에 보면 '동학개미' 운동으로 보아 이 시대에는 대부분 '돈'으로 가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개인은 예외였다. 사람은 오랫동안 떼로 살아왔다.....훌륭한 떼는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훌륭한 자아는 나 자신의 선택과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지혜는 소박하다!" ("Sancta Simplicitas!"...오 성스러운 단순함이여!...)"

(니체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지배적 가치, 믿음, 제도에 대해 의문을 던지거나 반발하지 못하는 상태, 즉 순응주의가 만연한 상태야말로 가장 무서운 것이다. 그런 상태는 개인의 영혼을 조용하고 부드럽게 질식시켜 죽인다.

----> 이런 주제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과 문장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권력은 총구가 아니라 떼에서 나온다. 떼 자체가 권력이다. 또한 모든 제도화된 권력은 떼의 후광을 받아야 한다.....

그 떼의 이름이 민중이든, 민초이든, 대중이든, 군중이든, 폭도이든, 다중이든, 국민이든, 민족이든, 네티즌이든, 진보든, 보수든! 이 모든 이름은 우리 유전자 속에 남아 있는 '떼의 근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권력과 돈은 떼가 있는 곳에 있을 확률이 높다.

 

신약성경의 어디를 봐도 "떼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없다. "진실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기준은 떼에게 있느니라"라는 이야기도 없다. (키에르케고르, <떼는 거짓이다>에 나오는 문장이라고 한다.)

 

지오르다노 부르노(Giordano Bruno)는 떼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1600년에 로마의 한 광장에 세워진 말뚝에 묶여 불에 타서 죽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생각을 떼의 생각에 허겁지겁 일치시키려는 충동은 그 사람됨이 비열하고 천박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진실이냐 아니냐는 떼가 믿는가, 믿지 않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 서양 근대철학의 실마리를 제공한 르네상스 철학자이자 태양 중심설을 제기한 브루노....1600년 카톨릭에 의해 이단자로 몰려 7년의 종교재판 끝에 화형을 당한다...

마라는 선동의 귀재였다. 그는 두려움을 자극하여 떼를 움직였다. 떼의 원동력은 두려움이고 개인의 원동력은 용기이다.

 

 

인간(자아)은 세상(사회)와 영혼 사이의 긴장이다. 인간에게는 사회성과 함께 초사회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극성(Polarity)사이의 긴장이 바로 인간이다. 따라서, 필자는 인간에게 궁극적 충만감과 행복을 줄 수 있는 사회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지금 사회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면 다음 세대는 '더 새로운 문제가 더 많아진 세상'에서 살 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세대의 비밀이다. 하나의 세대는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앉히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은 '감히 세상 따위가 구원해 낼 수 있는' 싸구려 존재가 아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훌륭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루가치의 말처럼 주체성을 회복하는 지름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만, 위선, 횡포, 폭력으로 치닫는 지름길이 될 뿐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세상'이라는 개념이 바로 전체주의 사상의 기둥이다. 

---> 1000% 동의하고 멋지면서 힘이 있는 문장이다.

 

지식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지적 작업의 규칙과 프로토콜이 먼저 정립되어야 한다......문명이 고도화될수록 프로토콜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진다. 프로토콜을 어길 경우 매우 치명적인 손해를 입게 되는 경우가 많다. 공자가 말하는 '예'를 영어로 번역한다면 가장 적합한 단어가 '프로토콜'일 것이다.

---> 이런 이해와 관점으로 2020년 즈음에 서서히 쓰이는 용어가 '프로토콜' 경제이다. 

---> 다만 이는 블록체인 중심의 P2P 거래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사업자들이 기존 중앙 집중식인 플랫폼 사업자를 겨냥하는 경쟁적 가치 제안을 설명하는 근거로 제시될 뿐이다.

---> 플랫폼 사업자가 뜯어 가는 높은 수수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정도로 그칠 뿐이지 경제/사회적 문제와 해결의 해법으로 제시되는 측면이 조금 약한 것 같다.....

필자가 어는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입장, 이해관계,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오히려, 참된 개인주의라면 마땋히 자신의 입장, 이해관계, 관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보편적 이성의 명령을 이야기하는 칸트의 주장은 이성이란 이름으로 개인을 말살시키는 끔찍한 소리로 변질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 동의한다. 

---> "객관적으로 보면.." , "좀 떨어져서 보면..",  "개인적 의견으로는.."......이런 말들은 크게 의미가 없어 필요 없는 첨언이다. 우리는 객관적일 수 없고, 좀 더 떨어질 수 없으면, 모든 의견은 개인 의견일 뿐이다. 

 

키에르케고르와 니체....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독창적이고 특이한 사상가로 현대의 실존주의, 개인주의 사상을 문을 열어젖힌 사람....

 

진실이 전해질 때는 오로지 개인 단위에서만 전해집니다.

 

"신은 죽었다"라는 이야기는 공동체 차원에서 공유하는 윤리와 도덕이 증발했다는 진단이다.

 

구속된 자아가 자유로워지는 것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자아가 공동체의 필연을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위대하다.

 

거대한 사회는 거대한 관성, 거대한 잠열, 거대한 시차(time lag)을 뜻한다. 하루아침에 옛 걸을 뿌리 채 뽑아버렸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최래된다.

----> 맞는 말이다.

----> 마찬 가지로 대기업도 관성이 있기 때문에 대기업을 변화시키고 혁신하는 것은 스타트업 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

 

우리 조상들의 '정신적 긴장'은 중국과의 긴장에 다름 아니었다. 중국 바로 옆에 붙어살면서 중국을 문명의 젖줄로 받아들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 - 그것이 바로 우리 조상들의 운명이었다. 

 

소박함(朴), 드러내지 않음(隱), 자연스러움(然), 절제(節)가 깊게 배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정신은 "거대한 재앙 바로 옆에 살면서 '나'를 지킨다"라는 긴장, 그 자체였던 것이다. 무려 천년 동안! '천년의 긴장'이 만들어 낸 '정신의 평등'에 대한 믿음, 인간의 내면적 독립성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가장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 

 

개인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원하는 사람에게 "훌륭한 자아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파고 내려갈 것을 요구한다. 칸트는 '이성을 위한 자유'를 주장했다. 우리는 '자아의 성숙을 위한 자유'를 추구한다. "훌륭한 자아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갈망이 없이 자유와 권리만 찾는다면 반족짜리 개인일 뿐이다.

 

참된 개인은 물질의 분배에 관해서가 아니라 자아와 진실에 관해 죄책감을 느낀다. 내가 나에 대해 짓는 죄, 내가 나의 영혼에 대해 짓는 죄, 내가 진실에 대해 짓는 죄 - 참된 개인에게는 이러한 죄들이 가장 심각한 죄이다.

 

자아가 '자신의 윤리 코드'를 충실히 지키면서 살다보면 어느새 자아는 자신의 영혼과 삶과 생명 전체를 인정하고 사랑하게 된다. 이 과정을 갈고 아름다운 서사시로 표현한 것이 바로 니체의 <짜라두짜>이다.

---> '행동하는 양심이 부처'라는 삼성선사의 말씀과 어찌 이리 일맥상통하는지...

---> 또한 저자는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번역을 했다. 운문체로 맛갈나게...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의 사랑과 관심에 의해,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된다. 아름다워서 소중한 게 아니라, 소중해서 아름다운 것이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함부로 양심, 도덕, 정의, 진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삶의 진실은 복합적이고 다면적이기 때문이다. 

----> 비슷한 느낌인지 모르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앎'에 대해 좌절하게 된다. 지식이란 것에 대해 '무기력'하게 된다. 지식에 대한 '갈망'을 아주 낮은 단계이고, '겸손'이라는 것으로 '지식'을 대하는 것은 그 보다는 높지만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단계이다....

---  그 단계를 넘으면 지식에 대한 '갈애'를 넘어....지식에 대해 좌절하고 무기력하게 된다.....'앎이란 것이 무엇인지?', '내가 제대로 아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 나아가 '내가 이것을 알아야 하는 것인지?'

---> 예전에 나는 '두려워서 읽는 수준'이었다. 지금 나는 '심심하고 권태로워서 그저 읽는 단계'인 것 같다.

 

제발  <돈키호테>를 진지하게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한다. <돈키호테>는 기사도를 풍자한 소설이 아니라, 기사도가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는 유럽 사회를 풍자한 소설이다.

---> 50년을 살면서 나는 내 주변에 <돈키호테>를 다 읽어 본 사람을 보지는 못했다.

---> 안영옥교수가 2014년에 번역한 판으로 나는 읽었지만, 2005년에도 민용태교수가 2권으로 번역한 적이 있다. 

 

'머리의 정식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불이익과 불편함을 무릎쓰고 진실을 옹호하는 사람, '자기 정당성'을 증오하기 때문에 떼가 퍼뜨리는 순응주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귀족이다. 이것이 바로 삶을 사랑하는 고귀한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 자평 ]

 

2011년에 나온 책이다.

10년 전에도 그렇게 2021년 다시 읽어 봐도 그렇고 정말 많은 것을 배운 책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을 하신 분들의 글을 읽어 보면 대개 명쾌하고 논리적이다.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하고 연구했었을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분의 이력 중 내가 친숙한 것은 (주)나우콤대표이사였다는 정도 뿐이다. 

민주화 운동을 한 후 기업 경영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이분하고 늘 헷갈리는 분이 시민운동을 하시는 이건범님.. (이건범님은 83학번이고 박성현님은 약간 더 빠른 것 같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