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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순진하게 속지 않으려면 의심해야 합니다. 엉터리 권위에 대해 끊임없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야 합니다.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라고 합니다. 신마저도 그 의심의 대상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정혜신 인터뷰)

파블로의 개 실험....지금은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는 게 단순화해서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많이 입증됐기 때문에, 지금은 그 이론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선호하고 좋아하는 것을 자꾸 더 보강하고 강화하려는 사람의 심리를 '보강효과'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페로소나, 곧 역할성격에 고착되면 ,특정 인물에 대해서 상당히 잘못된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유명인들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거나 미화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지나치게 폄하하는 문제가 생기지요. 이런 것들이 역할성격에 몰입돼서 사람을 판단했을 때 생기는 거지요..

 

인간을 거짓되게 하는 것의 핵심이 나르시즘이라는 것입니다. 나르시즘의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나 성공, 권력에 대해서 끝없이 추구해요. 그리고 자기 자신이 과도하게 찬양받기를 끊임없이 원해요. 또한 사람에 대한 공감력이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인데, 자기 자신에 대한 정서적인 공감도 없고 타인에 대한 정서적인 공감도 전혀 없어요..

나르시즘은 자신의 이미지를 완전하고 완벽하게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지키는 일이라면 어떤 것도 다 희생시키려는 성향입니다.

 

자기의 아주 고결한 의미지, 고고한 도덕성, 순결성 같은 자기가 믿고 있는 그러한 것들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준다고 생각하면 바로 상대를 공격합니다.....그들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자신의 불완전한 점을 지적하는 건데, 그러면 어떤 경우에도 타협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성숙한 인간이 갖는 시각이고, 스스로도 누구와의 관계에서나 그런 개별적인 관계로 환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동광 인터뷰)

결론적으로 스타 과학자에게 속아 넘어가기 쉬운 여러 가지 욕망과 갈망이 우리 사회에 존재했고, 다음에 그걸 이용하려는 유무형의 권력, 이른바 기득권층의 움직임들이 공동으로 작용하면서 집단적인 환각 중세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공학이 물론 중요한 연구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마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불치병을 다 치료해서 이른바 생로병사의 사슬을 다 끊어낼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게놈 프로젝트가 자신들이 하는 연구의 인지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유포시키는 이데올리기에 가까운 것이라는 게 과학사회쪽의 일반적인 분석입니다.

---> 내가 익숙한 산업분야에서 이런 유사한 흐름이 '4차 산업 혁명', 요즈음 'Digital Transformation(디지털 전환)'이라고 본다.

---> '모든 문제의 해법 = 4차 산업 혁명, 디지털 전환.. 또는 인류/사회의 다음 모습 = 4차 산업 혁명, 디지털 전환..... 또는 국가/사회/조직이 지향해야 할 지향점 = 4차 산업 혁명, 디지털 전환'

---> 이런 식으로 논의의 담론이 한 방향, 무비판, 저비판으로 흘러 갈 때는 위험하다..

정보기술에서 누가 표준을 장악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 되듯이, 생명공학 기술에 대한 표준을 선점하기 위한 게놈 프로젝트라고 보는 거죠. 그러한 과정에서 엄청나게 심각한 과대포장 내지는 과장이 양산되고 생명공학 기술이나 유전자에 대해서 과신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적인 해결방식(technological fix)에 대한 의존도가 강하다고 얘기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과학에 대한 기대라든가, 또는 과학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 좀 강한 편이죠.

 

유전자 연구를 통해서 마치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질병이라는 현상은 매우 복합적인 현상입니다.

 

보통 과학사회학에서 적정기술이라고 표현하듯이 반듯이 첨단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적절한 규모와 수준에서 인간에게 도움되는 기술이 무엇인가 하는 쪽으로 투자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박상우 시인의 시구 중에, '새로운 라면에 속지 않으려면 심오한 철학이 필요하다'라는 글이 있거든요. 거대 권력에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우리 개개인이 심오한 철학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쿤은 패러다임과 패러다음 우열을 둘 수 없다고도 얘기했습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과학도 그 나름대로의 설명체계라는 거죠. 그 시대에 아주 충실하게 작동하는 설명체계였기 때문에, 오늘날을 과학으로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사람들을 보고 미개하다고 얘기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이며, 곧 패러다임이 다르다는 거죠. 결국 문제가 다른 겁니다. 시대마다 주어지는 문제가 다르고, 시대마다 그걸 해결하려 한 시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걸 단순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홍구 인터뷰)

최근에는 현재의 영토와 그 영토 안에서 벌어진 역사를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경우가 그렇죠. 근대 국가라는 건 아주 최근에 생긴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진 진짜 진보성이라는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성찰하고 그럼으로써 어떻게 변화시켜 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운동을 못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뭐겠습니까? 독립운동가를 잡아 가두는 방법도 있지만, "우리는 절대 독립할 수가 없어. 엽전들이 뭐 어쩔 수 없지"하는 패배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었겠지요. 

 

(박노자 인터뷰)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어차피 불가능하며, 그나마 가장 객관적인 것은 민중의 시각으로 본 역사관일 거이라고요.

 

말을 하면서 생기는 거짓말도 있지만, 입을 닫아 버림으로써 생기는 거짓말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무섭지요

 

결국 역사라는 게 계급의 역사입니다. 그게 민중사관의 핵심인데, 일제 때 일본이 우리를 다스렸다고 쓰는 것보다 일본의 지배 계급이 당시 맹아기에 있던 한국의 부르주아 계급을 일종의 주니어 파트너로 삼아 키워가면서 조선 민중을 착취했다고 쓰면 조금 더 민중사관에 충실한 해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시의 주니어 파트너, 그게 바로 친일파죠.

 

(김두식 인터뷰)

법률가들이나 대법원의 판례는 '자기의 기억에 반하는 진술이 위증'이라고 얘기합니다. 사실과 다른 얘기라고 해서 모두 위증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즉 거짓말은 최소한 법률적으로 사실의 문제라기보다 기억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거짓이 많은 나라에 엉뚱하게 늘어나는 건 서류들뿐이에요

---> 나라 뿐 이겠나....회사나 조직도 그렇다. 

 

(김형덕 인터뷰)

자본주의 뉴스 매체들을 보면, 1등이나 최고만 선전하지요.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만 될 줄 알고 너도나도 시장으로 뛰어들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는 사람은 1%도 안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생리입니다.

 

남한은 경제력에 비해 자긍심과 주도적 세계관이 부족합니다. 항상 눈치 보며 살아와서, 이제 어느 정도 힘이 있는데요 맹몽적으로 큰 나라의 눈치를 보는 그런 경향이 지나치게 강합니다.

 

(정희진 인터뷰)

정의하는 것은 권력 행위지요.

 

모든 언어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언어는 말해지는 순간, 이미 번역됩니다. 화자와 청자가 말하는 의미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원래 원본, 기원, 순종, 본질 같은 건 없어요. 원본이 있는 게 아니라, 원본을 지향하는 욕망이 있을 뿐입니다. 

 

병역 기피라든가 원정 출산이라든가 성폭력은 그들 입장에서는 한 번도 걸리지 않고 당연히 누려온 권리예요.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조심할 리가 없고 문제 제기를 받아도 뭘 잘못했는지 모르죠.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거죠.

 

인권은 배려가 아니라 경합하는 가치예요. 각축하고 투쟁하는 가치입니다. 누가 누구를 배려합니까 흑인이 백인을 배려해야 돼요? 배려라는 말에는 이미 주체와 대상, 주체와 타자라는 구분이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배려'한다. 또는 '보호'한다는 것도 이상한 말이잖아요.

 

"정혜진 선생 말은 옳은데 비현실적이야"라고 해요. 그런데 저는 "왜 현실이 하나라고 생각하지? 그 현실을 누가 규정하는데? 현실은 경합하는 거야. 자본가의 현실이 있고, 민중의 현실이 있어. 지금 당신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현실이라고 차각하고 있어"라고 얘기하죠.

 

현실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무슨 감정을 느끼겠어요? 저는 '쿨한' 사람하고는 말을 안 섞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감정적으로 세려된 사람을 싫어 합니다.

 

루스 이리가레이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녀에게 "도대체 '남성적'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묻자, "당연히 모르겠죠. 세상에 그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 의미를 알겠어요"라고 재치 있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남성 중심일 때, 우리는 그것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다른 차이가 있을 때 그 말이 정의되기 시작합니다. 

저항은 소통과 협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진보적인 사상은 중산층에게서 생산되지요.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진보적이고 새로운 사유를 할 수 있는 물적 토대라든가 여유가 없고, 부자들은 부자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고.

 

[ 자평 ]

 

김동광의 인터뷰도 좋았다. 과학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 바가 많았다.

가장 좋았던 것은 정혜신와 정희진의 인터뷰였다. 한 분은 따뜻했고, 다른 한 분은 날카로웠다.

그 만큼 내가 이성이라는 시각에, 남성이라는 시각에 무의식적으로 길들여 졌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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