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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공안()을 이르는 말.
인생의 모든 생활 현상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서,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이다.

이게 어디서 온 화두인지 궁금했다....인터넷에 찾아 보니...
(지개야스님이 운영하는 '묵언마을'이라는 사이트에 아래 글이 나온다)

"'시심마(是什麽)'는 중국어 '무엇인가'를 임제종에서 처음 썼다.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이것이 무엇인고)시심마?"를 우리나라 처음 받은 곳은 경상도 경주인지 모르나 경상도 어딘가는 맞다.'이 뭣고' 경상도 사투리가 증명한다.
장성 백양사 돌탑에 '시심마(是什么)' 글귀가 있다. 만약 전라도가 처음이었다면 ‘머시다냐’. '머까아’로 되지 않았을까? 영어로는 why가 가까운 말이 아닐까?"

우선 지개야스님은 몇 권의 책을 내신 분인데 약력이 매우 독특하다.
(책에 의하면 시인 겸 심리상담사이자 승려. 고학으로 자연과학, 철학, 경영, 행정, 심리학 등을 공부해
축협상무에 이어 경상북도의원 임기를 마치고 2003년 17대 국회의원에 출마를 준비했다..)
(묵언마을은 안성시에 있는 사찰로, 자살예방운동을 주로 한다고 한다.)

(출처/유래)


남양주 선재사에 주지인 '청운 스님'이 아래와 같을 글을 연재한다.
('이 뭣고’, 반야지혜 살려 쓰는 大活口, 2018.02.08)

남악 회양선사가 육조 스님을 찾아갔을 때 육조 스님이 “시심마물임마래(是甚麽物恁麽來)”하고 물었다.
즉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고 물으니, 회양선사는 입이 딱 막혀 대답을 못하고, “이 물건이 무엇인고?” 즉 ‘이 뭣고’ 화두를 갖고 8년간 고행(苦行) 끝에 확철대오 하고 다시 찾아가 “설사일물즉부중(設似一物卽不中)”이라,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하니 육조 스님이 “도리어 수증할것이 있느냐?”하고 물었다.
회양선사가 “수증즉불무(修證卽不無) 오염즉불(汚染卽不)=닦고 증(證)하는 것이야 없지는 않습니다만 오염(汚染)될 수는 없습니다”고 했다.
즉 일여 평등의 진리를 차별심을 갖고 자타(自他), 고하(高下), 시비(是非)하는 것은 없습니다고 하여 인가(認可)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이 뭣고’ 화두가 유래된 것이다."라고 썼다..

남양회양과 육조혜능이 만난 일화는 어디에 나올까?
전등록(傳燈錄) 남악장(南岳章)에 아래와 같은 일화가 있다고 한다.
(이 일화가 전등록 남악장에 있다는 것은 청화스님의 '원통불법의 요체'에서 읽었다)


"회양이 조계산의 육조를 찾아갔다. 육조가 물었다.
그대는 어디에서 왔는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숭산을 떠나 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육조가 물었다.
"이렇게 온 것은 어떤 물건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물건이라고 빗대어 말해도 마땅치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회양이 다시 말했다.
자네가 지금 좌선을 익히고 있는 것인지 좌불을 익히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군. 혹시 좌선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면 선이란 결코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며 만약 좌불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면 부처는 정해진 모양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머무르지 않는 법을 놓고 취사선택을 해서는 안 되네. 그대가 혹 좌불을 흉내 내려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행위와 다름이 없네. 보잘 것 없는 앉음새에나 휘둘리게 되면 정작 깊은 이치에는 이를 수가 없는 법이라네.
회양의 가르침을 듣고 난 마조는 마치 제호를 마시고 난 듯한 환희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는 곧 회양에게 큰 절을 올리고 나서 다시 물었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하면 무상삼매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회양이 말했다.
자네가 지금 심지법문을 익히고 있는 것은 마치 스스로 씨를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그 법의 요지를 말해주는 것은 마치 하늘이 내려주는 단비와도 같은 것이다. 그대에게 이미 기연이 닿아 있으므로 꼭 도를 보게 될 걸세. 마조가 다시 물었다.
도는 원래 모양새가 없다는데 어떻게 제가 그것을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회양이 말했다.
심지의 법안으로 도를 보게 되는 것이지 무상삼매도 또한 마찬가지라네. 마조가 물었다.
거기에도 성주괴공이 있습니까? 회양이 말했다.
변화의 개념으로 도를 보려 한다면 도는 결코 보이지 않는 법이라네. "

(장웅영,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퇴옹 성철 스님, <이뭐꼬>
"자기를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결국 저 잘난 싸움 마당에서 춤추는 미친 사람이 되고 말아서
마음 닦는 길은 영영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아무 쓸 곳이 없는 대낙오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영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 버리고, 세상을 아주 등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버림받는 사람은, 어느 곳에서나 멸시당하는 사람,
살아가는 길이 마음을 닦는 길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결국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경쟁을 떠나는 것이다.
윗사람의 칭찬과 중용(重用)은 "앞으로 너를 적극적으로 이용해먹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놀아주되 놀아나지는 말자.

자본주의가 밉다면, 내 마음 속의 자본주의부터 죽어야 한다.
소비는 탐욕이다. 성장은 착취다. 질투심으론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박재현, 화두 나를 부르는 소리)


<이뭐꼬>
'이뭐꼬'를 즐겨 말한 성철 스님이 백일법문을 가끔 들어본다.

(회양)선사가 조계산으로 가서 육조(혜능)선사의 맥을 좇으려고 하였다.
육조가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회양이 대답했다.
"숭산을 떠나 화상에게 예를 갖추어 절을 올립니다."
육조가 다시 말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십마물이마래(什麽物伊麽來))
회양이 답했다.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 십마물이마래(什麽物伊麽來) : 어느 것이 본래인으로 이렇게 왔는가?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냐? 정도의 뜻이라고 한다.

널리 알려진 시심마(是甚麽) 화두의 최초 형태가 바로 이 공안이 아닐까 싶다.
이 한자어가 '이뭐꼬'로 표현된 것 같다.

'이뭐꼬'는 대상화되기 이전의 나를 묻는 것이다.
'이뭐꼬'는 한국 선문의 대표적인 화두다.

그런데 이 화두는 족보에도 없는 화두라는 지적도 있다.
선불교 역사상 중국, 일본 등에서 '이뭐꼬'라는 화두를 참구하여 간화선을 수행한 사례가 없으며
오로지 우리나라에만 있는 화두이고, 그것도 해방 이후에나 나타난 것이라 한다.

육조의 질문은 쉽게 풀면 "너는 누구냐"라는 뜻이다.
"회양이라고 부르기 전에 너는 누구인고?"라는 질문이다.

개념화는 이름 붙이기다.
이름을 붙이려면 먼저 대상화(objectification)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에 제가 저 자신을 이름 붙이는 경우는 없다.

사람은 저 스스로 자신을 대상화하여 개념화할 수 있는 희한한 존재다.

의미는 개념에 담겨있고, 개념을 통해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 전통적인 언어관이다.
말이나 글자를 기표(記標)라고 그리고 의미를 기의(記意)라고 그런다.

이러한 언어관을 그림으로 표현한 사람은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이다.
그의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이다. 그림 속에는 담배 피우는 파이프 하나만 달랑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이렇게 쓰여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파이프가 아니라면 뭐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라고 말하는' 혹은 '그렇게 쓰여 있는' 사건, 혹은 현상만 있는 것이다.

기회는 인간에게 벼락처럼 떨어진 축복인 동시에, 인간의 의식을 스스로 한정 짓는 족쇄이기도 하다.

안다는 것은 허위의 회위 됨을 알아 가는 과정이다.
선사들은 이를 두고, 천 길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일이라고 했다.
그 만큼 두려운 일이다.

(자평)


<이뭐꼬> <나는 누구인가>는 나의 개인인생과도 가장 인연이 깊은 화두(공안? 숙제? 질문?)이다.

화두라고 해야 할지 즈나니 수행법이라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여튼 이 질문에 대하여 가장 유명한 분은 현대 명상계의 대스타 라마나 마하르쉬(Ramana Maharshi) 일것이다.
--> 즈나나 요가( jnana yoga). 인간의 고뇌가 무지에서 비롯됨으로써 철학적 지식을 습득하고 철학적 사색을 행하는 수행을 통하여 바른 지식을 얻으려는 심신훈련법

나는 이호준씨가 번역하고 청하출판사에 나 온 책을 비롯하여 동일한 책을 모두 가지고 있고 모두 읽었다.
이 책은 나의 20대 초반을 규정한 인생의 책이며 그 인생을 좌우한 인물 중 한 분이 '마하리쉬'다.

오랫만에 책장에서 꺼내 보니 책이 바랬다. 1989년 1월 1일. 서울역에 있었던 서울문고에서 구매했다.


원래 마하르쉬가 말한 '나는 누구인가?'는 아주 짧은 글이고 나머지는 질문과 답변으로 되어 있다.

핵심적인 설명이 이렇다. 워낙 유명하고 짧은 글이라 인터넷에도 많이 나와 있다.

"나"는 누구인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내가 아니다.
말하고, 움직이고, 붙잡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다섯 가지 운동기관은 내가 아니다.
호흡등의 다섯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프라나(Prana)등의 다섯 가지 기(氣)는 내가 아니다.
생각하는 마음도 내가 아니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도 내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인가 ?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아니다"라고 부정하고 나면
그것들을 지켜보는 깨달음 그 자체(awareness)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나"다.

그것의 본질은 실재(Sat), 의식 (Chit), 지복(Ananda)이다.

현상계에 대한 모든 인식과 행위의 원인은 마음이다.
따라서 마음이 사라지면 현상계도 사라진다.

마음의 본질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마음은 "참된 나" 만 남고 사라져 버린다.
"참된 나"가 바로 아트만(Atman)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생각은 "나"라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 일어난 다음에 다른 생각들이 일어난다.
이는 마치 l인칭이 있고 난 연후에 2인칭과 3인칭이 있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도 마찬가지다.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놓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나에게"가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이렇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하면
마음은 점점 그 근원으로 향하게 되고 생각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오직 "참된 나"(眞我)만이 실재하며
현상계, 개인적인 나, 신등은 "참된 나"의 속에서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
이 셋은 동시에 나타났다가 동시에 사라진다.

"참된 나"는 "나"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바로 그곳이며 "침묵"이라고도 한다.
"참된 나" (眞我)가 곧 현상계이고
"참되 나"가 곧 개인적인 나이며
"참된 나"가 곧 신이다.
"참된 나"는 모든 것이다.

자아 탐구는 마음을 "참된 나"의 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명상은 자기 자신이 "신"(Brahaman), 즉 실재, 의식, 지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구속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탐구해 들어가서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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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안 사실 하나..
(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417882.html)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를 처음 번역해 세상에 내놓은 이호준씨는
1958년생으로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라즈니쉬 책을 통해 라마나 마하리쉬를 알게 됐고, 이 책 <나는 누구인가>를 번역한 뒤 속명 이호준을 버리고 송광사로 출가함. 법명은 지산 스님이다.
이 책을 읽고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삶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하며 이 책은 명상계의 스테디셀러이다.
2010년에 세수 53세로 입적함. (100일간 무문관 수행을 하고 나온 직후 심장마비로 열반하셨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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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이뭐꼬에 대해 가장 유명한 분은 성철스님이다.
법문 중에 '이뭐꼬'와 '자기를 바로 보자'는 말씀이 많은 가보다.

화두참구법, 수행법으로 '이뭣고'를 중시하시는 분은 '청운스님'이다.
이 분이시는 듯....

불교도가 아닌 나에게 참으로 우수운 것이 있다.
스님들의 약력을 보면... (특히 위에 청운스님도 그러한데).. 아래와 같은 것을 중요시한다.

진제 대선사의 책에 써진 약력은 아래와 같다. 약력이 한 30줄은 되는 것 같다.
(내가 쓴 것이 아나라 저자명이 '진제 대선사'이다.)
"경허-혜월-운봉-향곡 선사로 전해 내려온 정법맥을 이음. 석가여래부촉법 제79대 법손"

청운의 약력을 보자..
"경허(鏡虛) 대선사의 법제자(法弟子) 수월(水月1855?1928) 스님의 법손 도천1910?2011) 큰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으며, 현 조계종 원로이신 명선스님에게 수계를 받았다."

장휘옥교수/김사업교수님이 쓰신 '무문관 참구'에 보면
화두는 스승과 제자가 일대일로 만나 경지를 점검 받는 독참(獨參)이라는 전통적인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입실(室)이라고도 한다는데, 이때 스승과 제자의 선문답이 오고 간다고 한다.
학문은 독학이 가능하나 선은 독학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선이 법맥을 중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한다.
--> 세상이 좋아져, 네이버 지식이 다 알려 준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786646&cid=49221&categoryId=49221)

즉, 누구의 법맥으로 누구한테 배웠는가를 중요시 한다...
누구에게 인증을 받았는가가 중요한 모양이다...

나 같은 범인에게는 그 업계에서만 통하는 고질적인 지나친 아상(我相)이나 아집(我執)처럼 보인다.

물리학으로서 뉴턴의 몇 대 손, 아이슈타인의 몇 대손?
철학으로 칸트의 몇 대손? 헤겔은 몇 대 손?

이런 필요가 있나?

하여튼 나의 이런 정신적 깨달음 추구병, 깨달은 자에 대한 숭배증상, 집착증은 이 책을 읽고 많이 깨지고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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