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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趙州從諗, 778~897) 선사의 유명한 화두이다.
조주선사는 무문관에 많이 등장한다.
제1칙. 조주구자(조주의 '무')
제7칙. 조주세발(조주의 '발우나 씻게나')
제11칙 . 주감암주(조주와 두 암주의 주먹)
제31칙. 조주감파(조주의 '오대사의 노파를 완전히 감파했다')
제37칙. 정전백수(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
 
판치생모(板齒生毛)
판치(板齒)란 판때기 모양으로 생긴 앞니란 말이다.
앞니 두 개는 대개 넓은 판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판치라 했으니, ‘판치생모’란 앞니에 털이 났다는 말이다.
 
조주 선사는 120살까지 장수하면서 가장 불편했던 것이 치아부실이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이 이 화두 구성에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조주록 )

307. '앞이빨에 털 났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또는 “어떤 것이 조사(달마)께서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앞이빨에 털 났다(板齒生毛, 판치생모)." 

 
(무문관 제 37칙. 정전백수(庭前柏樹))

 

(한글 번역은 장휘옥/김사업의 '무문관 참구')
 
한 승이 조주에게 묻는다.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조주가 말한다.
"정전백수자, 뜰 앞의 잣나무."
 

(장웅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앞니에 털이 돋았다."
 
달마에겐 앞니가 하나 없었다고 한다. 박해의 흔적이다. 그래서 주야장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는 풍문이다. 
판생생모는 사실 인내에 대한 이야기다. 
전설 속의 선승은 앞니에 털이 나도록, 입 안이 썩어 문드러지도록 앙다물고 시련을 견뎠다. 
불립문자 "진리는 말로 전할 수 없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수행은 단지 내려 놓음이 아니라
내려 놓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강신주,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수 있는가?)

유식불교는 인간의 가장 심층에 있는 의식을 바로 ‘알라야 의식(ālaya-vijñāna)’이라고 부릅니다.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는 '알라야 의식'을 한자음으로 표기해서 '아뢰야식'이라고 부릅니다. 어쨌든
우리 마음의 가장 심층부에는 과거 자신이 경험했던 모든 것이 일종의 
무의식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겁니다....
 
유식학파에서 알라야 의식을 중시하는 이유는 바로 이 심층 의식이 '나라는 집착',
그러니까 아집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유식학파는 일라야 의식을 끊어야 해탈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제자는 잣나무를 자신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뜰 앞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사물로 이해하고 있지만,
스승에게 잣나무는 자신의 마음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조주 스님에게 잣나무는 후설의 용어를 빌리자면 마음과는 무관한 '사물 자체'가 아니라
마음이 향하고 있는 노에마(Noema)였던 것입니다.
사실 잣나무가 마음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마음의 활발한 작용, 
그러니까 노에시스(noesis)가 작동한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지요.
 
제자는 자신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사물들이 자기 마음과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던 겁니다.
반면 조주 스님은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네 마음에 주목해라!' '네 마음이 없었다면, 사물도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습니다.
지금 '뜰 앞의 잣나무!'라고 거듭 말하면서 조주 스님은 살아 있는 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노에마를 지목한다는 것 자체가 노에시스를 암시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 무슨 소리인가? 네이버 용어 사전을 찾아 보니...노에시스적 계기 혹은 노에시스는 의식의 작용적 측면을, 그리고 노에마적 계기 혹은 노에마는 그 작용의 대상적 측면을 나타낸다고 한다.
 
더 숙고 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뜰 앞에 펼쳐져 있는 잣나무들이 우리의 눈에 들어 온다는 점입니다.
조주 스님의 마음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깨달은 마음, 즉 자유로운 마음 아닌가요.
불행히도 제자의 눈에는 여전히 잣나무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저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의문만이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스님이 되기 전, 아니면 스님이 된 후 책이나 스승으로부터 배웠던 달마 이야기가 어느 사이엔가 
그의 내면에 지울 수 없는 기억, 즉 알라야 의식이 되어 버린 겁니다.
 
알라야 의식을 끊어야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의 마음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살아 있는 마음일 수 있을테니까요.
싯다르타의 이야기가 아무리 훌륭해도, 혹은 달마 대사의 가르침이 아무리 절실하더라도,
그것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의 자유로운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제2의 싯다르타나 제2의 달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마음이 지금 바로 여기에 살아 있을 때, 그래서 '뜰 앞의 잣나무'가 확연히 드러날 때, 
우리 자신이 이미 석가나 미륵처럼 깨달은 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카르페 디엄 carpe dime!" 
"현재를 잡아라!"
 

(한형조,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이 말은 '대체 선이 전하고자 하는 궁극의 비밀은 무엇이냐?'는 물음과 같다.
 
<조주록>에는 후반부가 소개되어 있다.
"스님, 저는 특정한 대상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조주의 대답이 이랬다.
"나도 특정한 대상을 일러 준 것이 아니네"
이 말에 질문자는 고개를 갸웃함 다시 물어 보았다.
"대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의 대답은 여전했다.
"뜰 앞에 잣나무."
 
뜰 앞에 잣나무는 일정한 대상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대상을 대하는 자세 자체를 환기시키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늘 잣나무를 지나치면서도 한번도 그것을 바로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언제나 그 대상을 미끄러져 그 너머로 건너간다. 
우리는 늘 대상과 만나면서도 대상을 <만나지> 못하는 역설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대상 너머로 건너뛰지 말고 대상에 사무쳐 하나가 되는 연습을 해 볼 것을.....
무명의 뿌리는 깊다. 
다 태우지 못한 과거의 업보가 발목을 잡고 있고, 미래에 대한 바람과 염려가 목을 짓누르고 있다. 
 

 

(김영욱, '화두를 만나다')

하찮고 흔해빠진 잣나무로 대답했다는 불만, 불법의 심오한 의미에 대한 기대, 
달마의 위대한 뜻에 대한 막연한 흠모 등 등의 망상을 솜씨 좋게 베어 없앤다.
 
조주의 의도는 이것으로 제자가 안으로든 밖으로도 그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오로지 '뜰 앞의 잣나무' 앞에 얼어 붙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보편적 진리로 귀결시키는 성향을 가진 이들은 "모든 것이 진리의 드러남이다. 잣나무인들 다르랴!"라고
생각하고 조주의 뜻을 알아차린 양한다. 
그러나 잣나무는 다른 그 무엇의 드러남이나 상징물이 아니다. 
 
뜰 앞의 잣나무는 더 이상 세공이 필요 없는 일종의 완성된 조각품과 같은 언어다.
그것은 그 안에 할 말을 다 쏟아부은 것이어서 군소리와 분별을 허용하지 않는다. 

(박재현, '화두, 나를 부르는 소리')

한 승려가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다."
"화상께서는 경계를 가지고 사람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나는 경계를 가지고 보이지 않았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조주가 대답한 잣나무는 덫이다.
잣나무가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에 대한 대답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미 덫에 걸린 것이다.
또 있다.
조사가 무슨 심오한 뜻을 전해주기 위해 서쪽에서 왔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런 것들이 죄다 말의 덫에 걸리는 경우들이다. 
 
뜰 앞의 잣나무라는 대답 아닌 대답이다.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질문의 허를 찌르는 대답이기 때문이다. 
뜰 앞의 잣나무는 질문자에게 자신이 던진 질문이 과연 올바른 질문인지 돌이켜 보도록 한다.
그렇게 돌이켜 보다가, 질문이 잘못된 지점을 스스로 찾아내는 순간이 바로 깨침이다.
 
선은 말을 하거나 듣는 자 모두에게, 말의 이면에 있는 힘의 정체, 그 폭력성을 돌이켜 보라고 요구한다.
말의 이면에 있는 힘의 정체를 드러내는 일 역시 말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말은 사악하면서도 늘 가엾다. 
 
말이 힘에 휘둘리는 세상이지만, 끝내는, 
말이 세상을 일으켜 세우고, 세상은 말 속에서 비로소 일어날 것이다. 

 

(장휘옥/김사업, '무문관 참구')

한 승이 조주에게 묻는다.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조주가 말한다. 
"뜰 앞의 잣나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란 무엇을 말할까? 
일차적으로는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에 건너온 진의, 그 의도를 뜻한다.
그러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이 말은 '불법이나 선의 요체'를 뜻하는 선문답의 정형구로 사용된다.
 
이 질문은 불법과 선의 핵심을 단적으로 보여달라는 열망에
눈 밝은 선지식들은 각양각색으로 자신들의 선적 경지를 보여왔다.
 
문외하의 눈에는 일관성도 없고 뜬 구름 잡는 동문서답으로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적인 눈이 깊어지면 그 속에서 빛나는 살아 있는 진리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는 때가 온다.
 
도대체 뜰 앞의 잣나무가 어째서 불법의 진수가 된다는 말인가? 
잣나무는 '나'와 상관없이 마당 저쪽에 있는 나무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것이 분별심으로 제약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주소다. 
 
전 우주가 자기라면 일체는 자기 아닌 것이 없다.
전 우주가 잣나무라면 일체는 잣나무 아닌 것이 없다.
어디에 잣나무와 자기의 구별이 있을까? 어디에 잣나무라 붙여야 할 이름이 있을까?
 
김사업교수와 미야모토 다이호오 방장의 입실
방장: 백수자의 뿌리는 어디까지 닿아 있느냐? 
 

 
(자평)

 
나는 옛 선사들 중에서는 조주와 임제가 제일 좋다.
조주선사에게는 할아버지 같은 사람 냄새가 난다. 
아마 붓다도 저렇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냄새...
 
임제선사에게는 서슬퍼런 칼날의 냄새가 난다.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치열함의 냄새..
 
판치생모나 정전백수 화두 해설을 보면서..재미있는 것은
 
한형조교수와 박재현교수가 이 화두를 설명하면서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를 언급한다는 것이다. 

 
먼저 한형조 교수는 이렇게 감상평을 했다.
"이 화두를 차용한 영화가 장안의 화제가 되고 또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기고 했다.
거의 혼자 찍다시피한 그 고집스런 영화는 내게 아찔한 탐미적인 영상으로 남아 있다.
연이은 진수성찬의 코스에 질리듯 후반부에는 깜빡 조는 결례를 범하기도 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영상을 통해 삶의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이었을까,
아니면 영화의 형이상학을 도모한 것이었을까."
 
박재현 교수는 이렇게 평한다. 
"감독, 제작, 각본, 촬영, 편집, 미술, 조명 등을 모두 배용균이라는 한 사람이 맡아 이루어낸 걸작이다.
선불교를 소재로 한 한 최고의 영화라고 칭송할만하다.
정전백수에 대한 허접스러운 설명을 듣는 것보다는 좀 긴 분량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게 낫다."
 
같은 영화를 보셨는데 평이 다르다.
평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각 자의 경험과 지식, 감정이 다르므로....
하지만 우리가 이미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국제 영화제 상을 탔다고 하여
좋은 영화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본 다면 어떻게 될까? 
 
대상자와 주체 중 둘 다, 혹은 하나라도 고정되면 무서운 해설이 혹은 무서운 고정관념이 된다. 
 
내가 선사들의 어록, 선사들의 해설집을 떠난 이유가 그것이다...
선사들의 말이나 행동, 그 자체가 붓다의 깨달음을 말하고 행동했다는 관념을 놓고 시작한다.
그것이 이미 정답이라고 놓고 시작한다...
의심없이 무언가를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만큼 강한것도 없지만.....그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이리하여 나는 2000년 중순 즈음 출판된 김영욱연구원의 책을 마지막으로 선어록, 선사의 세계를 떠난 것 같다. 
 
근래에 나는 칸트에 관심이 좀 생겼다.
그래서 칸트에 대한 아주 초보적인 책들을 사서 읽는 중이다.
김상환교수의 '왜 칸트인가' 와 백종현굣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책이다.

두 책 모두 칸트를 연구한 분들이 책이다.
 
자 여기 세권의 책이 있다.
위에 두 권의 해설서와 칸트가 쓴 원전이다. 

 
어느 누구도 칸트가 쓴 책이 절대적 진리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칸트 자신도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두 교수 모두 자기가 쓴 칸트의 책이 칸트에 대한 절대적인 진리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또한 칸트의 원전만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이것이 상식적이지 않은가? 
 
자 여기 세권의 책이 있다.
한 권은 무문선사가 쓴 '무문관' 원전이고 두 권은 이에 대한 해설서이다.

두 권의 해설서 모두 자기의 해설이 무문관에 대한 절대적인 해설서라고 하지 않는다. 
무문선사도 그 안에 붓다의 정법의 넣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두 해설자는 무문관의 경지가 붓다의 절대적인 깨달음과 같다고 전제하고 해설한다..
 
이것이 내가 선어록을 떠난 이유이다.....
 
붓다는 세상에 고정되는 것은 없다고 했다..
 
선어록이나 선사를 너무 진리화하는 것......
 
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존경과 숭배는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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