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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우리의 경험은 주간적이며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각적 특징을 동반한다. 철학에서는 이를 '감각질'(qualia)이라 부르며, 20세기의 심-신 논쟁은 감각질의 개념과 감각질이 의식 경험의 물리적 과정이냐 아니냐를 두고 펼쳐졌다고 할 수 있다.

 

우리들 심적 경험의 현상적 속성들 또는 감각질은 신경세포의 발화로 일어나는 어떤 물리적인 것이나 뇌의 어떠한 계산적 상태로 환원될 수 없다. 결국은 심-신 문제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다.

 

'심-신 mind-body' 문제는 역설이다. 역설은 개개 명제에 대한 논증들은 명백하게 건전해도 명제들을 합치면 모순이 되는 한 무리의 명제들이다.

 

유물론(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적인 것이라는 논제), 물리주의(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리적인 것이라는 논제)

 

자연주의: 자연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고, 따라서 모든 발생은 자연적 발생이라는 견해

 

이 네 명제 중 어느 하나라도 부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런데 그것들을 함께 합치면 참이 일관되게 유지될 수 없다. 적어도 그것들 중 하나는 거짓임에 틀림없으며, 이 일이 일어나는 정확한 방식을 보여주려는 시도가 심-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개발하는 작업이다.....이 네 명제는 결코 동시에 일관되게 주장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네 명제 중 어떤 것을 부정할 것인가이다.

 

커피 한 모금에 대한 나의 심적 욕구는 어떻게 물리적인 나의 팔을 그 컵에 뻗게 했을까?.....어떻게 나의 심적 욕구는 물리적인 전기 신호들이 시동을 건 다음 나의 팔을 따라 내려가 근육을 움직이게끔 야기했을까? ....나의 심적 욕구는 그것과 연관된 감각질들을 동반하면서 어떻게 나의 물리적인 신경세포들의 발화를 야기했는가? 

 

현재 과학 이론의 틀에서 '빨강'은 심리학적 용어이지 물리적 용어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몸과 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마음이 비물리적이라면, 어떻게 몸과 연결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요점이다.

 

실체 이원론은 마음과 몸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또는 그것들이 실체라는 의미에서 별개라는 견해이다....속성 이원론자는 오직 하나의 실체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것과 비물리적인, 두 종류의 속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속성 이원론의 한 버전 - 물리주의적 버전 - 에서 마음은 물리적이다. 그것은 뇌의 인과적 상호작용과 관련된 부분이다. 그리나 마음은 두 종류의 속성을 지닌다.....속성 이원론자는 마음과 몸이 별개라는 것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마음은 물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것과 비물리적인 것은 상호작용할 수 없다. 몸은 비물리적인 에너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마음은 물리적인 에너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물리적인 것의 인과적 폐쇄성 때문이다. 

 

부수현상론은 심적 사건들과 마음은 '부수현상'이라고 주장한다....부수현상은 기본 현상에 추가로 나타나는 것이다....부수현상론자들은 심적 사건들을 존재하지만, 물리적 사건들과 달리 인과적 힘이 없다고 주장한다.

 

창발론은 물리적인 것이 우세하고 심적인 것은 일종의 부산물이라는 의미에서, 부수현상론과 거의 같은 종류의 심-신 관계에 대한 견해이다.....창발론자들에 의하면, 마음은 몸에 수반한다.

 

물리주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물리적이라는 견해이다. 따라서 만약 마음이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물리적인 것이다. 마음은 비물리적인 것이라는 명제 (1)이 거짓이라면, 그래서 모든 것이 물리적이라면 심-신 문제를 해결된다.

 

모든 심적 사건은 신경계 안의 생리적 사건이다. 따라서 마음이 뇌라는 이론은 때때로 '중추-상태' 유물론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마음을 중추 신경계로 만드는 유물론으로, 행동주의자들의 '말초-상태'유물론과 구별된다.

 

2006년 출판된 그의 훌륭한 저서 <심리철학>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물리주의 한계'는 감각질이라고 말한다.

---> 물리학계에서 한국계 미국인인 '이휘소' 박사는 유명하다. 아래와 같은 말을 어느 유명한 분이 했다고 한다. 냉정하게 보면 과장이다. 아인슈타인이 더 뛰어나다. 이유는? 더 뛰어난 논문을 썼서 물리학계에 기여를 했으니까...

---> 사람의 잠재된 역량이 뛰어나서 더 뛰어 나다고 하면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결과론이 아닌 잠재론으로 쓴다면.....말이 안되는 헛된 자긍심이다. 이휘소박사도 뛰어 났지만 결과적으로 아인슈타인이 더 뛰어났다고 해도 이휘소박사가 위축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 아마 김진명씨가 쓴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책 덕분인 것 같다. 

---> 이휘소박사의 잠재력은 뛰어 났던 것 같다. 하지만 심리철학 분야에서 한국계 미국인인 김재권박사는 그 업적 자체가 뛰어나다. 왜 이런 분이 국내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지고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한 분야에서 선두를 이끌고, 그를 그 업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분 중 한 분인데...

감각질은 정말로 물리주의에 하나의 문제라는 사실, 더 심하게는, 감각질의 존재가 마음을 포함한 모든 것이 물리적이라는 물리주의의 주장에 대한 반증이라는 사실을 보고한다.

 

관념론에 대한 더 깊은 나의 질문은 마음도 몸도 모두 물리적이 아닌 경우, 어떻게 마음과 몸이 상호작용하는가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자아의 '부분들'이 있고, 어떤 생각은 자아 없이 계속된다. 의식에서 '자아'의 역할은 어쨌든 불분명하다.

 

버나드 바스(Bernad Baars)는 1980년대 초에 의식에 대한 '전역 작업공간 이론 global workplace theory'를 처음 제안했다.....시각적 의식, 청각적 의식 등을 다루는 영역들 같이 모두 어느 정도 국지화되어 있는 뇌의 분리된 영역의 세포들은 전역 작업공간에 신호를 보내고, 이런 신호들이 분산된 네트워크에 의해 선택되고 방송되면, 우리는 발송된 정보에 대한 의식을 가진다고 바스는 주장한다.

 

그는 사실상 의식이 전역 작업공간에서 출현하는 일종의 창발론을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역 작업공간 이론에 다르면, 의식이 하는 것은 각기 다른 수많은 신경망을 연결하면서 정보를 통합하고 선택하며, 통합된 정보를 의사결정, 행동, 심사숙고, 상상력, 등등을 위해 사용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토노니의 통합정보 이론)

정보를 통합하는 뇌과정들이 의식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통합정보 자체가 의식인지, 아니면 그것이 무엇이든 오직 통합정보만 의식에 상응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마이클 그라지아노와 주의 도식 attention schema)

단지 신경세포들의 행동에만 호소하지 않고 사회적, 지각적, 진화생물학적, 정보처리적 고찰에 호소했다.

 

우리는 의식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의식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들에 대해서도 그렇고 우리들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또는 그에게는) 의식이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의식에 대해 그 이상으로는 아무 것도 표현할 수 없다. 

 

길버르 라일의 1994년 저서 <마음의 개념>의 주제....

라일은 우리가 개념을 "그것이 속하지 않는 논리적 유형"에 넣을 때 '범주의 오류 category mistake'를 범한다고 지적한다. 

심-신 문제에서, 범주의 오류는 비물리적, 비공간적인 것들을 물리적이며 공간적인 것들과 함께 인과 연쇄에 배치하는 오류이며, 또한 물리적이며 공간적인 것들을 비물리적, 비공간적인 것들과 함께 인과 연쇄에 배치하는 오류이다.

 

 

 

[ 자평 ]  얇은 책이지만 50%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을 만하고 소장할 만 하다. 

 

'MIT 지식 스펙트럼 시리즈'라고 하여 200페이지 정도로 8권이 나와 있다. <특이점과 초지능>을 가장 먼저 읽고 너무 좋아서 나머지 책들을 샀다. 얇다고 얕봤다가 큰 코 다치는 책이라는 것을 읽으면서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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