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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들

개념의 숲 by 고은

비즈붓다 2020. 10. 20.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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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 ]

 

시는 17세부터 나의 북극성이다. 시는 나에게 길을 걸어가는 자이게 한다.

 

우애(友愛)

사캬(석가)는 제자들을 벗이라 불렀다. 나는 이제야 겨우 친구 몇 명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60세 이후에야.

 

절대

다행히도, 대지에 절대가 없는 것처럼 인간에게 절대가 없다.

절대는 무(無)다. 있는 것은 오직 상대를 벗어나려는 바닥 모를 욕망일 뿐이다.

 

자기 소외

소외는 필요하다. 인간에게 자기 소외가 없다면 사회의 무자각적인 분자(分子)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

종교의 장식물이었다.

지금은 상업의 장식물이다.

그러나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예술 없이 인간은 없다.

 

무신론

유신론 때문에 무신론이 있다. 무신론은 인간의 자기 승화를 반영한다.

 

타자(他者)

나의 욕망이 증가할수록 타자는 증가한다.

아니다. 세계에 나는 없다. 있는 것은 타자들뿐이다. 타자로서의 공(空)

 

사랑

소유에의 장님. 헌신에의 장님. 이 두 장님만이 사랑을 완성한다.

 

행복

행복은 철학의 지옥이다. 시의 무덤이다.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의 본능과 욕망의 소산(所産)이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타락이다. 인간의 욕망을 스스로 제어하는 정신이 특히 미국 사회에 생장해야 한다.

아시아의 몇 지역에 만연하는 천민자본주의여, 가라!

 

중심(中心)

우주 어디에도

지역 어디에도 중심의 없다.

 

상업

인간의 약탈 행위를 변화시킨 것.

싸게 사고 

비싸게 파는 행위.

 

공동체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지만 공동체의 꿈 없이는 현세는 절망이다.그러나 수많은 공동체의 이론들을 경계하라. 또한 그 이론들이 잠드는 것도 경계하라.

 

커뮤니케이션

이것과 저것사이언제나 오고 가는 나그네가 있다.

 

불가능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는 낭설이다.불가능이 세계의 가능성이다.

 

개인

근대 인간은 개인을 발견했다.근대 이후의 개인은 개인의 한계를 발견했다.

 

자유

자유를 위해서 싸운 적이 없는 인간에게는 일생이 없다.

 

문학

인간과 사회의 총화(總和)로서의 형상물.그것  없이 살 수 있었다.그것 없이 살 수 없었다.그것 없이 살 수 있다.이것의 문학사다.문학은 문학사의 울안에 있지 않다.

 

기계

기계 및 기계적인 것을 부정하는 문화는 미숙하다.기계의 무심(無心)기계의 정직기계의 적확함.아니, 인간의 신체 자체가 최고의 기계이다.우주라는 큰 기계 속의 기계들이기 때문이다.

 

오늘 인간은 너무 많이 악을 모방하고 있다.

 

기억

아 기억이 비로소 인간을 인간적이게 한다.기억의 딸이 상상이다.상상의 어머니가 기억이다.

기억은 이 세상 이전까지 닿아 있다.

가 버린 세계를 현재에 머물게 하는 유일한 시간의 우정이다. 기억은.

그러나 기억은 거의 틀린 기억이다.

 

인식

인식은 실천의 시작이다.

 

신앙

신앙은 신앙하는 대상을 과장한다.

신앙은 신앙하는 자신을 확대한다.

이윽고

신앙은 탐욕이다. 이 역설로부터 출발하라.

 

범죄

사람은 두가지다. 거지이거나 도둑이거나.

사람의 마을에는 반드시 감옥이 있고 저만치 묘지가 있다.

 

욕망

욕망이란 무덤이 아니고는 어디에도 파묻을 곳이 없다.

 

인간은 인간 이외의 것에 의존한다. 그것이 인간 자신의 연장인 줄을 모른다.

가만히 말한다. 신이 인간을 만들지 않았다. 신은 그 무엇도 만든 적이 없다.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 신의 무능인 전능(全能)!

 

전제주의(專制主義)

현대의 자본과 매체, 인터넷이 이미 전제주의를 표방한다. 이것들은 모두 군대를 닮아 있다.

 

세계

산스크리트어 lokadhhaui, '부서질 장소'를 뜻한다...

세계의 세는 시간, 계는 공간이다....

 

동양

오늘을 동양에는 서양보다 더 비동양적인 현상들이 많다.

환경 생태의 사상, 생명의 사상, 우주의 사상은 원산지 동양에서보다 서구에서 더 구현되고 있다.

동양은 서구보다 더 이원론의 소음에 시달린다.

요컨대 동양은 너무 시끌시끌하다.

동양의 서구화, 서구의 동양화.

이것이 지구상의 과도기적 이상理想인지 모른다.

 

정열

정열은 지혜보다 상위에 있어야 한다......

정열만이 창조의 힘이고 변혁의 수레바퀴다.

 

사고思考

나는 최고이다, 사고에 의해서.

나는 최하이다, 사고의 방기放棄에 의해서

 

인격

인격은 진행된다.

 

평등

혼자에게만 평등이 실현된다. 평등, 영원한 절망이다.

 

엘리트

창조적 소수의 확대를 막는 것이 엘리트인가?

엘리트는 고난을 모른다.

엘리트는 밭을 모른다.

엘레트는 침묵을 모른다.

엘리트는 시장市場과 전선戰線을 모른다.

엘리트는 피뢰침이다. 두뇌이다. 심장이 아니다.

 

과거

과거는 문화다.

 

종결

완결은 없다. 다만 미완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영구미제永久未濟다.

아니, 시작도 없고 종결도 없다? 

 

의 방이다. 질은 양이 함께 있을 때에만 질이다.

 

현실

모순과 갈등의 구조물. 

이 구조물 이외에는 내가 살 곳이 없다.

 

고독

고독은 인간에게 남겨진 유일한 육친이다.

 

에너지

진정한 예술은 꿈의 예술이기보다 힘의 예술이다.

진정한 정치는 힘의 정치기보다 꿈의 정치다.

과 무가 형제화되는 나라가 힘의 나라다.

 

명예

생애를 통해서 하나의 명예가 기록되어야 한다.

자기 부정으로서의 명예말이다.

 

전통

나는 조상의 딸이 아니라 미래의 어머니다.

나는 전통의 적자보다 창조의 고아가 되고 싶다.

 

생명의 존엄은 반드시 생명의 길이와 별개이다.

 

문풍지 부르르르 우짖는 겨울밤 온돌 아랫목이 간직하고 있던 그 온기야말로 어머니의 자궁에서 멀지 않은 것이다.

 

 

[ 자평 ] 버린다.

 

단어의 개념을 용어 사전 처럼 정확하게 정의한 것이 아니고 자기 만의 시각으로 새롭게 재정의하는 방식의 책은 몇 권 읽어 본 적이 있다. 고은 시인의 책은 이런 의도가 있는 책 중 역시 가장 수준이 높은 것 아니가 싶다. 

(문장의 깔끔함. 단순함. 단백함. 정의가 생각하게 하는 수준 등 등)

 

물론 다루는 개념의 범위가 다르기는 하지만...

가장 재미있던 것은 앰브로스 비어스 (Ambrose Bierce)의 '악마의 사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류의 책은 그냥 스쳐 지나가면 되지 구매하고 읽고 소장할 수준은 못된다고 본다. 

대충 이런 식이다...'가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기준의 척도' 정도로 정의한다.

이런 식으로 정의할 수도 있구나! 하고 웃고 넘어갈 일이지 죽자고 분석하고 마음에 새길 정도는 아니다.

박민영씨 책 정도가 된다면 이는 상당히 머리를 굴려서 이해하야 하는 책이다.

 

 

 

2009년에 나온 책이나 내 나이 30대 즈음에 읽은 책이리라.

책에 있는 약력을 보면...

 

"시인생활 50년.

미국 버클리대학교 초빙교수(시론 강의), 하버드 옌칭연구소 연구교수 역임, 서울대 초빙교수... 등 등

전 세계 21개 국어판으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국내의 문학상 15개와 훈장을 2개 받음...."

 

그러나 이후 이 한방에......

 

 

평소에 나는 '좋은 글/말'= '좋은 사람/인격'이라고 헷갈리지 말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말 좋고 글 좋은 사람이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인간만도 못한 행동을 할 때가 많다.

 

이런 내 생각에 근거가 되는 (대단한 분의 책들이 있어) 너무 다행이다.

저널리스트인 폴 존슨 (Paul Johnson)는 '우리가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그 지식인의 위대한 성취는 인정하되, 그가 께 실제 삶에서 얼마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측면을 드러 내면서 윤리성과 도덕성이 취약한가!'를 까발려 보여준다.

 

 

 

좀 더 최근 책이면서 좀 더 얌전하지만 더욱 깊이 생각해 볼 책은 프랑수아 누델만 (Francois Noudelmann) 라는 철학 교수가 쓴 '철학자의 거짓말'이다.  그는 책에서 데카르트, 칸트, 헤겔, 사르트르, 보봐르 등 철학자 및 사상가를 중심으로 이론과 실천 사이에 놓인 ‘거짓말’을 보여 준다.  그는 철학자의 이론이 “속이 훤히 비치는 유리”라고 생각하는 바람에 우리가 철학자의 인성과 그가 만들어 낸 이론적 구성물이 투명하게 일치한다고 믿어 버린다는 사실,그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왜 그래서는 안되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살아가는 사람과 사유하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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