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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우리는 지금까지 철학 수입국으로 살았다. '보통 수준의 생각'은 우리끼리 잘하며 살았지만, '높은 수준의 생각'은 수입해서 산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한 사유의 결과를 숙지하고 내면화하면서 스스로 '생각한다'고 착각해왔다. 수입된 생각으로 사는 한, 독립적일 수 없다.
--> 100% 동의하고 서문에 이 말이 마음에 들었다.
--> 자신의 목소리가 없는 사람의 책은 지루하다. 그래서 많은 선사들의 책이 지루하다. 많은 동양철학자들, 역사가들의 말이 지루하다. 말마다 선진국 사례를 들이대는 경제학자들의 말도 진부하다. 자기 목소리가 없다.

선도력을 가져본 적이 있는 나라는 선도력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나라보다 매사에 '수준'이 높다.....
선도력은 지성적이고 문화적이며 인문적이며 철학적이고도 예술적인 높이의 시선에서 형성된다. 인격적인 토양에서 터져 나오는 창의력이나 상상력을 발휘하여 용기 있게 도전한 결과다.

부자는 있지만, 자본가는 희귀하다. 국민이나 백성은 있어도, 시민은 아직 제대로 자라나지 못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돈이 자본으로 바뀌고, 부자가 자본가로 바뀌어야 한다. 백성이 시민으로 바뀌어야 한다.
돈, 부자, 백성이 자본, 자본가, 시민으로 바뀐다는 것은 사적인 범위 안에 갇혀 있는 시선을 깨고 나와 역사적으로나 공적으로 책임성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 글쎄. 취지는 대강 이해가 간다. 그러나 따지고 들면 자본이 돈보다 어떤 점이 사회적/역사적으로 공공적 책임을 발휘하는지?!!!
--> 철학자 고병권씨는 이 자본의 문제가 만만치 않음을 자본 시리즈로 10권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철학자의 책을 읽고자 한다면 이 분의 책을 읽을 바에는 고병권씨의 아무 책이라도 읽는 것이 100배는 나을 것 같다.)



(1강. 부정: 버리다)

철학의 시작은 곧 전면적인 부정이고.....새로운 생성이란 전략적인 높이에서 자기 주도적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스스로 자신의 나아갈 길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한, 항상 종속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무엇이든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안목의 높이만큼만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으니까요.

전략적인 내용의 차이보다 전략을 행사할 수 있는 그 수준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전략적 높이를 행사해 본 적이 없이 그저 전술적인 차원에서만 살아본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내용'이 전술이라면, '시선'은 전략이다.

철학을 수입한다는 것은 곧 생각을 수입한다는 뜻이다. 생각을 수입한다는 말은 우리가 수입하는 그 생각의 노선을 따라서 산다는 뜻이다. 생각의 종속은 가치관뿐 아니라 산업까지도 포함해 삶 전체의 종속을 의미한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결국 가장 높은 차원의 생각 혹은 사유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 '철학'이 무엇일까?
--> 버트란드 러셀은 한 마디로 "진리의 추구 자체를 위한 노력, 부주의한 독단과 확신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려는 노력"이라고 썼다.


-->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 (Jose Ortega y Gasset)는 "철학은 우주에 대한 인식"이라고 말한다.



칸트가 무슨 말을 했고 노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는데, 정작 나 스스로의 생각하는 능력을 퇴화해버린 기묘한 상황 앞에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철학.....이것은 서양의 학문구조이고, 서양이 세계를 보는 전략적 시선의 총화....

서양의 힘은 과학기술 문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중국인들은 과학기술 문명을 가능하게 해주는 더 큰 힘이 배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바로 정치제도였다....
중요한 점은 중국인들이 과학기술도 중요하지만, 그 배후에서 강한 힘을 발휘하는 정치 개혁이나 제도 개혁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할 정도로 사유의 높이가 상승했다는 것이다.

더욱 큰 힘은....문화, 윤리, 사상, 철학으로 보았다. 새로운 사항, 새로운 문화, 새로운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만 건강한 정치 제도가 가능하고, 이 건강한 정치 제도가 가능해야만 과학기술 문명이 발전하게 된다고 인식한 것이다...

'철학'이 가장 근본적인 기능을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
중국의 중심 철학이 유교에서 서양의 철학인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이동한 것이다...

철학은 곧 사유의 독립을 의미한다.

미국은 인류 최초의 실험국가이다......최초로 평민들끼리 힘을 합쳐 만든 나라다...

어느 순간 미국인들은 독일 관념론적 시각으로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 결과 '실용주의' (Pragmetism)가 탄생한다...

높을 뿐만 아니라 더 종합적이고 근본적이며 독립적이고 주도적이다. 전략적인 사고란 이미 만들어지 판 안에서 다른 것들에 대응하는 형태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판 자체를 새로 짜는 일이다. 판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판을 새로 짜는 일에 대한 사고가 바로 전략적인 사고다.

새로운 생성이라는 것은 바로 전략적인 높이에서 자기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자신이 직접 그 길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최근의 사회 경제적 흐름 속에서의 역사적 사실만을 근거로 말한다면,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우리의 시선이 그 정도 높이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일본에 대한 대응은) 그저 피상적이거나 대중적이거나 전술적인 대응일 뿐이라는 것이다.
--> 글쎄. 그럴수도 있겠다. 그런데 궁금하다. 저자는 각 나라의 시선의 높이가 보이는가 보다...
--> 적어도 다른 것들의 시선의 높이가 보이려면 자신의 시선의 높이는 그 시선의 높이보다 더 높아야 한다...그런가?
--> 라마나 마하리쉬는 말한다.."산에 오르는 데는 여러 길이 있다....진인은 정상에 다 올라와서 거기 앉아 다른 사람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는 사람은 모든 길들을 다 볼 수 있다." 즉...산에 올라와서 봐야 올라 오는 사람이 보이는 것이다.
--> 또한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히 진짜 보다도 더 높게 평가하거나, 낮게 평가할 개연성이 크다.
--> 지표를 놓고 상대적으로 결과가 높다면 현실보다 높게, 지표가 낮다면 현실을 더 낮게 평가할 개연성이 크다.
--> 하여 예수님도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셨다고 했다.
--> 조주선사도 "성공한 이는 고향에 가지 마라"라고 했다.
--> 우리네 속담에도 "가까운 무당보다 먼데 무당이 영험하다"라는 말이 있다.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법이다.

'전쟁'이나 '침략'이 좋고 나쁨의 문제에 해당하는 것일까?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인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판이 짜여질 때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뒤틀림 현상이다. 세계가 새로운 판으로 재조정하는 과정이다.....
누가 주도권을 가지고 그것들의 발생이나 억제를 자기 통제하에 둘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실패와 성공이 벌어지는 판 자체를 자기가 주도했느냐 상대가 주도했느냐 하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 전쟁이나 침략이 생존 판을 두고 벌이는 주도권 싸움이라는 것에는 100% 동의
---> 다만, 철학자, 사상가를 포함한 정신을 다루는 자들이 '이것은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주도권의 문제'라고 지적 희석을 하는 것은 나쁘고 요망한 것이다. 전쟁과 침략은 그냥 나쁜 것이다. 세치 혀로 이런 요망함을 떤 자들은 근대에도 많다...
--> 종교학자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Brian Daizen Victoria)가 쓴 '전쟁과 선'은 ' 20세기 초중반의 일본 (선)불교나 독일의 나치즘에 협력한 독일교회'에 대해 잘 설명해준다. 이들의 얼마나 요설스러울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 러일전쟁 시절 톨스토이는 양 국 사이의 반전 평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일본 선사인 샤쿠 소엔에게 연대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소엔은 이를 냉소적으로 거절한다. " 비록 부처는 생명을 취하는 것을 금하였으나, 그는 또한 모든 중생들이 무한한 자비의 수행을 통해 함께 연합할 때까지, 평화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소이다. 따라서 양립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 조화를 일으키는 수단으로서, 살생과 전쟁은 필요한 것이오."
-- > 샤쿠 소엔(??宗演·1860~1919)은 허접한 사람이 아니다. 선불교의 주요 종단인 임제종(臨濟宗)의 최고 고승 중 한 명으로 꼽히고, 미국에서 포교에 큰 역할을 했다.


--> 남 얘기가 아니다. 박노자씨의 칼럼에 의하면 동국대학교의 초대 총장을 역임한 친일 불교의 거두 권상로(1879~1965)는 “성전에 임하는 병사의 계율”이라든가 “완벽한 지혜를 얻은 자는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죽여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니 전선에서 살인을 해도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라는 식의 망발을 계속했다고 한다.(https://www.minjok.or.kr/archives/65329)

철학이란 철학자들이 남긴 내용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삶의 격을 철학적인 시선의 높이에서 결정하고 행위하는 것, 그 실천적 영역을 의미한다.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철학이지, 철학적으로 해결된 문제의 결과를 답습하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는 말이다.
--> 철학이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결했는가? 인류 최고의 철학자로 손꼽힌다는 플라톤이나 칸트는 무슨 문제를 해결했지?
-->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는 것에는 동의. 하지만 문제 자체를 해결한 것은 기술이나, 공학, 의학, 과학이 더 낫지 않았나? 철학자가 철학적으로 해결한 문제가 문제 자체의 해결책이었던 것이 뭐가 있었나?
--> 내 소견으로는 철학자는 '문제'가 진짜 문제인가? 그 문제가 지금 당장, 모두가 정말 해결해야 할 문제인가? 그 문제는 혹시 다른 문제의 표면이 아닌가? 등 등 다른 관점(눈높이와 시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장자는 절대 누구처럼 산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철학자들은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닮기 위해서 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기만의 시선으로 자기처럼 산 사람들이다.

세상 속의 잡다한 변화를 마치 수학자가 '수'를 가지고 압축해서 포착해버리듯 철학자는 '관념'으로 압축해서 다룬다....
물리학은 세계를 물리적인 원리로 포착, 화학은 화학적인 연관으로 포착, 철학자는 '관념'으로 포착....
거대한 세계의 변화를 파악해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거나 새로운 '방향'을 생산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데카르트의 '물질'과 '정신', 포이에르바하의 '물질', 프로이트의 '무의식'
--> 이런 측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다나카 마사토 (田中正人)..
--> 또한 딴지를 걸자면 저자는 이 책에서 어떤 개념과 관념을 포착했는지 모르겠다....'선진국' 되자?


철학을 수입한다는 것은 생각을 수입한다는 것....
생각을 수입한다는 것은 삶이 기본 원칙들을 수입한다는 것으로 결국 종속성을 드러낸다. 즉, 독립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사유의 종속성으로 창의적이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창의적 결과들을 따라하기만 하는 것, 이것이 철학 수입국인 한 벗어나기 힘든 치명적인 문제이다.
---> 자국 우선 주의가 이제 철학에도 영향을 미치나 보다.



철학 생산국들은 그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을 구성한다....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니체, 공자, 노자, 주자, 양명.....
그들의 철학은 모두 그들의 시대에서 태어났다.

철학 생산자들은 모두 시대와 세계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하게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모든 철학은 다 시대의 자식들이다. 시대를 건너가는 가장 높은 차원의 시선이 바로 철학이기 때문이다.

(2강. 선도: 이끌다)

선진화란 사유의 상승이 기본 조건인바, 사유의 상승에 대한 해답은 바로 철학에 있다.
철학이란 시대의 흐름을 포착해내는 지성인의 힘이기 때문이다.

선도력을 갖기 위해서는 '장르'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장르가 선도력을 갖게 하고, 선도력이 '선진'을 가능하게 한다.
이 장르의 출생처라 바로 철학적 시선으로 포착된 관념이다.

철학과 현실이 긴밀히 작동하고 있음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단계는 선진국을 경험해 본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선진국은 독립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으로 세계를 선도하는데, 이 독립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의 주요 자양분이 바로 철학적 시건이다...
중국, 영국, 독일, 스페인, 미국 등 등은 선진국도 운용해보았고, 심지어 제국을 운용한 경험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으로 역사를 운용해 본 적이 있다는 말이다. 반면 한국은 그런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철학적 시선으로 국가와 사회를 운용해본 적이 없다...
한국에게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이 선진국을 운용해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다... 선진 국가, 선진 기업을 운용해본 적이 없고, 선진 정치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선진' 단계의 방향을 향해 몰입할 내면의 동력을 형성할 수 없는 것이다.
--> 피식 웃었다. 그럼 인류 역사 중 가장 오랫동안 제국은 운용한 로마는 무슨 제국 운용 철학이 있었는가?
--> 선진국 추종자인가? 정신적 왜소증이나 피해의식이 있는 건가?

무언가를 새로 만들면서 이루는 일정한 범위를 '장르'라고 한다. 선진국은 바로 이 '장르'를 만든다.
저는 어떤 나라가 문화적인가 아닌가 하는 점은 바로 장르를 만들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한다고 본다.

'꿈'. 고유한 장르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가 그 사회의 선진성 여부를 보여준다....
꿈이 있는 사람은 선도적인 삶을 살고 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종속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책임성을 발휘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번잡한 일상 속에서도 군중들의 욕망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그 흐름을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그 흐름을 하나의 관념으로 포착하고 그 포착된 관념이 구체적으로 적용되어 하나의 새로운 장르를 형성하는 것이다.

대답은 주로 '우리'속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다. 질문은 '우리'로부터 이탈한 독립적 주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대답이란 이미 있는 지식이나 이론을 그대로 먹어서 누가 요구할 때 그대로 다시 내뱉는 일이다. 이때는 누가 원래 모습 그대로 뱉어내는가, 누가 더 많이 뱉어내는가, 누가 더 빨리 뱉어는가에 따라 승분가 갈린다..
--> 저자의 의도는 알겠다. 그런 의도라면 차라리 시험과 대답으로 용어를 바꾸는 것이 어떨까  싶다.
--> 우리 사회에서 그대로, 더 많이, 더 빨리 뱉고자 하는 것은 시험과 답안이다. 대답은 그렇게 쉽지 않다.

질문이 일어나려면 우선 궁금증과 호기심이 작동해야만 한다. 이 궁금증과 호기심은 다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다...인간은 결국 질문할 때에만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이다.
질문- 독립적 주체- 궁금증과 호기심 - 상상력과 창의성 - 시대에 대한 책임성 - 관념적 포착 - 장르 - 선도력 -선진국 이렇게 연결된다. 사실 질문이 성한 나라가 선진국이다.

먼저 시작해서 다른 나라를 따라하게 만드는 능력을 선도력이라고 한다. 결국 선도력이 선진국을 만드는 것이다.

나라가 한계를 느끼거나 정체되어 있다면, 문제는 분명하다. 그 나라를 끌고 갈 꿈과 이상이 설정되지 못했거나 설령 설정되었다고 해도 현실적인 요구와 일치하지 못하면 당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민주화 다음 단계는 무엇이어야 할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선진화다.
선진화라는 것 문화적이고 철학적이며 예술적인 시선을 구체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도력을 형성하는 일이고 세계의 흐름을 관념의 높이에서 포착하는 일이다.
--> 글쎄. 인류는 경제제도로서의 자본주의 이후의 자본주의, 정치/사회제도로서의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이 아직 없는 것이 아닌가?

탈레스가 최초의 철학자가 된 것은 모두들 만물의 근원을 신이라고 '믿을 때',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탈레스가 최초의 철학자였다는 것은 그 시대의 방향을 최초로 알려준 깃발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 글쎄...조금 구체적으로 파야 한다. 왜 탈레스가 기록에 적힌 최초의 철학자인가는...
--> 이봉호교수는 '최초의 철학자들'에서 왜 이들을 최초의 철학자라고 하는지 아래와 같이 썼다.
--> 첫째, 토론과 연설을 중요시했다. 둘째, 지식의 공개와 증명에 대한 강한 요구에 따라 방법론과 인식론 관련한 철학 탄생의 조건을 만들었다. 셋째, 주변국에서 수용한 기하학과 천문학 등을 보편학문으로 전환해 사고의 범위를 확장했다....이 세가지 특징은 하나의 단어로 수렴된다. 바로 '증명(demostration)'이다. 대중에게 자신의 주장을 연설하고 대중의 검토를 받는 것에 서도 논리적 증명은 중요한 일이었고, 공적 영역이든 사적 영역이든 지식을 대중에게 공개하고 검토받는 데에도, 주변국의 지식을 수용해 학문 영역으로 발전시킨 과정에서도 증명은 중요했다.
--> 나는 이봉호교수의 설명에 손을 들어 준다.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에 대해서 모두 신을 믿을 때, '물'이라고 생각해서 최초의 철학자인 것이 아니다. 왜 자신이 물이라고 생각하는지 토론하고 연설하고, (나름) 증명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 물론 탈세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등 최초의 철학자들이 당시 익히 그냥 믿고 있던 신화의 설명에 의심을 품고 우주의 근본 물질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 철학의 시작을 철학사에서 '신화(myth)'에서 '이성(logos)'으로의 전환'을 시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기존의 문법을 넘어 새 문법을 준비하려는 도전,
정해진 모든 것과 갈등을 빚는 저항,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궁금해하는 상상,
이것들이 반역을 삶이라면 철학을 한다는 것은 반역의 삶을 사는 일이다.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자신만의 고유한 욕망으로 자기 인생을 채운 사람들이지 기존에 있는 문법이나 논리로 그것을 해석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직 오지 않은 곳으로 그냥 무모하게 건너갈 뿐이다....

자기가 바로 참여자이자 행위자가 된다. 비평가나 비판가로 비켜나 있지 않는다. 구경꾼으로 살지 않는다.
비평만 하는 일이 점점 일상회되는 것....바로 구성원들의 이탈 현상이다.
구성원들이 참여자나 행위자로 혹은 책임자로 존재하지 않고 제3자처럼 존재한다. 구성원들이 구경꾼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구성원들 가운데 점점 비평가와 분석가가 많아진다면 이는 매우 좋지 않은 조짐이다...
제3자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꿈과 자신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일류 비평가와 일류 분석가보다는 이류라도 좋으니 1인칭 참여자들이 필요한 때다.
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살다 가겠다는 의지로 뭉친 이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바로 꿈을 꾸는 무모한 사람들 말이다.
--> 1000% 동의한다.

"선진국으로 진입할래? 안 할래?"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싶어? 안 하고 싶어?"이렇게 욕망의 방향을 명확히 설정하고 덤빌 것인지 안 덤빌 것인지를 정하는 일이 핵심이지, 한가하게 가능성 여부나 묻고 분석하는 것은 남의 집 불구경하는 것과 같이 의미 없는 행위일 뿐이다.

(3강. 독립: 홀로 서다)

집요한 관찰과 예민함으로 기존의 것을 낯설게 바라볼 때, 그리고 홀로 세상에 부딪치는 참된 용기를 발휘할 때 철학은 탄생한다.

공자 이전 사람들이 모두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바로 하늘의 명령(천명)에 있다고 믿을 때, 공자는 여기서 이탈하여 인간이 인간이 이유가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인간이 인간이 이유는 인간에게 있다."

후진국에서는 '늑장대처' '땜질처방' '대중요법'과 같은 한탄들이 자주 등장한다. 항상 선제적 대응에 실패하고 사태가 발생해야만 움직이는 습성 때문이다. 이는 주도적으로 역사를 전개해 본 경험이 없다 보니 당연히 예민함을 발휘해 본 적이 없고,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형성된 습성이다.
--> 글쎄. 그런가? 늘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이번 코로나 사태로 우린 깨달았다.


인간 가운데 가장 탁월한 인간은 은유하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창조와 창의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으니까..

관찰을 유지하는 힘, 그것이 바로 집요함이고 몰입이다. 인생의 다양한 방면에서의 승패는 자신을 이 몰입의 단계까지 집요하게 끌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좌우한다.

'나 자신의 즐거움'을 장자는 자쾌(自快)라고 했다... 이 '자쾌'가 독립적인 삶을 말한다. 의존적인 쾌락이 아닌 내 안에서 내가 생산해낸 나만의 고유한 쾌락, 이것이 '자쾌'다. 이것이 자유이고 독립이다.

우리가 쉽게 믿음 속으로 빠져드는 이유는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믿고, 모든 문제를 그 믿음의 기준으로 해석해버리면 항상 명료하다.... 믿음의 내용 그 이상으로 넘어갈 수 없다.

이론은 사유가 아니라 사유의 결과물이다. 철학적 사유는 자신이 직접 세계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일이다.
사유의 결과물인 '이론'에 갇히면, 사유의 대상인 '세계'에 직접 접촉하려는 도전적인 용기가 약해진다.......
철학적 사유는 기본적으로 세계를 사유하는 것이지 사유의 결과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4강. 진인: 참된 나를 찾다)

한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의 수준은 사실 그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가 작동시키는 생각의 높이일 뿐이다.
생각의 높이가 시선의 높이를 결정하고, 시선의 높이가 활동의 높이를 결정하며, 활동의 높이가 삶의 수준을 결정한다. 결국 그 사람들이 이루는 세계의 수준을 결정한다.

'따라하기'를 하면 최초의 사람이 겪었던 고뇌와 숙고와 불안을 겪지 않을 수 있다. 매우 편하고 안전하다.

문제는 관찰, 통찰, 사유의 집요함 같은 부지런함이 지식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격적인 차원의 것이라는 점이다.

선진국으로 올라서도록 해주는 대부분의 조건이 인격적 차원의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이다. 창의성은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것이다. 인격이란 토양에서 튀어나오는 것.....

장자의 '자기살해'는 기존의 가치관에 결탁되어 있는 나를 죽임으로써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충만해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는 '허심(自快)'의 상태를 갖게 한다.

능동적 주체란, 자기만이 자신의 주인이 된 주체를 말한다.
--> 내가 아는 가장 멋진 표현은....임제선사의 말이다..


'자유'라는 말 자체가 '자기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자기가 주인이라는 뜻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일등보다는 일류를 꿈꾸는 사람이다. 일등은 판을 지키는 사람이고, 일류는 새판을 짜는 사람이다. 우리가 따라하고 부러워하는 바로 그 단계이다.

(5강. 문답: 공유하다)

내 생각을 '옳다' '그르다'의 잣대로 사용하는 순간 우리 삶은 형편없어진다...
자기 꿈마저도 다른 사람에게서 검증받으려고 한다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큰 인간은 외부의 것들과 경쟁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 자신과 경쟁할 뿐이다.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지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부족한지 더 나은지를 따지지 마라. 경쟁에 빠지지 마라.
--> 내 내 선진국 타령을 하더니 이건 또 뭔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 우선 성숙해 있어야 한다....
혁명을 완수하지 못하는 이유는 혁명을 하려는 사람이 먼저 혁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새길 필요가 있다. 즉 혁명을 하려는 사람이 먼저 성숙되어 있지 않으면 그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개인의 성숙이 그만큼 중요한 이유이다.


모든 창조적 행위는 지식 간의 진위를 따지는 일에서 일어난다기보다는 그 사람만의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문제 있는 이 세계를 이전과는 다르게 건너가보려는 적극적인 시도에서 일어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상황에는 치밀하고도 자세하게 벌이는 지적인 논증보다도 궁금증이나 호기심이랄지, 앞뒤 세세하게 재지 않는 베짱 같은 것들이 휠씬 더 큰 역할을 한다.

사실 이질적인 것 사이에서 동질성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굉장히 높은 사유 능력인데, 앞서 이 능력의 표현을 은유라고 했다. 이 은유를 통해 완전히 이질적인 것들이 상호 연결되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철학은 회의와 반성을 근거로 한다.
철학은 어떤 믿음도 거부한다. 오히려 믿음 자체를 다시 들여다보고 거기에 새로운 진실을 찾아 준다.

모든 철학은 시대의 자식이다. 한 시대의 특수한 문제 의식을 보편적 단계의 사유 체계로 승화시킨 것이 철학이다. 그렇다가 하여 그 보편화된 사유 체계가 세계의 모든 문제에 유효하거나 언제나 영원히 유효할 수는 없다.


[ 자평 ] 불편함으로 시작하여 실망으로 끝난 책. 시덥지 않은 훈수 두기를 싫어하는 나는 읽고 버린다.

문장의 어투로 보아 강연 내용을 다듬어서 낸 책인 것 같다.
일반적으로 강연이나 인터뷰를 모은 집은 저자가 스스로 써낸 책보다 내용의 질이 떨어진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현장에서의 내공이 책을 쓰면서 한 문장 한 문장 훑어 쓰는 내공을 앞설 수는 없다.

경영, 경제, 자기계발서를 손에서 놓은지는 꽤 되었다.
대신 과학서적은 자주 읽고, 소설/시/인문학/사회학 서적을 가끔 읽는다.

인문학 서적 중 철학서적도 가끔은 읽는데 동양철학은 아예 손을 대지 않은지 꽤 되었다.
동양철학을 쳐다 보지도 않게 된 이유는 대충 아래 책을 읽은 이후이니 2012년 이후 부터 인 듯 하다...



최교수님 책은 워낙 베스트셀러로 홍보를 때려서 책을 사서 한 번 꼼꼼히 줄을 치면서 다 읽고 중요하게 줄친 부분만 읽고 이번에 정리하면서 총 세번을 읽었다.

내 관점에서는 버린다. 이유는...

첫번째. 불편함. '과도한' 홍보 문구

2018년 쯤인가 워낙 베스트셀러였고 서평도 좋았고 훌륭한 철학자라고 하도 그러길래 읽어 봤다.

다시 보면서 첫눈에 거슬리는 것은 앞뒤로 참으로 요란한 홍보 띠지다.



요란하다!! 남들이 보면 칸트나 헤겔, 니체나 하이데게가 책을 냈는 줄 알겠다.....

아무리 마케팅/영업/홍보가 중요한 자본주의 시대라도 정신을 논하는 책을 낸다는 사람이.....
이런 낯간지러운 홍보 문구는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꼭지가 덜 떨이지고 ego 그대로 드러나는 너무 돈스러운이 느껴진다.
정신의 문제를 논한다는 철학자가 이렇게 까지 돈 냄새를 노골적으로 풍겨야 하나?!!!

내가 좋아하는 김영민교수의 약력을 보았다. 참으로 초라하다. 한 줄이다..
철학자.천안과 서울 등지에서 인문학 학교 ‘장숙藏孰’(http://jehhs.co.kr/)을 열어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두번째. 실망. '철학적 눈높이 = 선진국' 이라는 건가? . 철학은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야 하는가?

저자 주장의 핵심은 이렇다.
"철학은 시선의 눈높이 이며 (국가/사회/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는 선진국은 선도하고 선진국을 유지할 시선의 높이가 있어 선진국이 되었고, 그렇게 운영되고 있다.
시선의 높이 = 생각의 높이 = 삶의 높이 = 사회나 국가의 높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철학적인 눈높이가 높다는 선진국은 어떤 나라인가? 저자의 말은 왔다 갔다하여 난 모르겠다.

길게 보면 제국을 운용해 본 역사적 경험이 있는 나라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로마제국, 몽골제국, 대영제국, 러시아제, 스페인제국, 프랑스제국, 한나라/당나라/청나라, 포로투갈제국, 돌궐제국, 흉노제국, 페르시아 제국 등을 말하는 것인가? (https://palme.tistory.com/20)

어떨때는 (청일 전쟁 후 중국의 서양 극보기를 풀어 쓸 때 등) GDP순위가 철학적 눈높이의 순위인가?



아니면 현존하는 최고의 철학자가 있는 나라, 혹은 철학자들의 수가 많은 나라가? 최고의 선진국인가? 그렇다면 어디?

1929년 생으로 철학책을 읽어는 봤다는 사람은 다 아는 하버마스가 아직 살아 있고, 현존하는 최고의 석학 중 한 분이라는 파스칼 메르시어(페터 비에리)이 있고, 천재 철학자라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있으니 독일인가? 독일이 가장 철학적 눈높이가 높은가?


현존 최고의 언어학자/지성인/미국의 양심이라는 '노암 촘스키'와 인류의 살아 있는 지성/세계 100대 석학/마빈 민스키가 '현존 최고의 철학자'라 말한 대니엘 데닛, 스티븐 핑커 등이 아직 살아 있으니 미국인가?

세계 100대 석학이며서 화생물학자, 대중과학 저술가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가 아직 살아 있으니 영국인가?

정치/경제/문화/역사를 아우르는 지식과 통찰력으로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현존하는 프랑스를 넘어 유럽 최고의 석학 자크 아탈리가 있는 프랑스인가?

슬라보예 지적이 살아 있으니 슬로베니아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세계행복지수 순위가 철학적 눈높이 순위인가?


또한 저자가 그렇게 철학과 사회/문화 경제 제도에서 탁월한 선진국이 2019년 ~2020년 지금 보여주는 모습은 탁월한 시선의 눈높이 인가?

누구의 높이를 말하는건가? 지도자나 지도자 집단? 국민 전체의 평균적 높이?
이들이 우리 지도자나 국민 전체의 평균보다 시선이 높아 보이는지?



세번째. 실망. '철학적 눈높이가 무엇인지 그 내공을 좀 보여주지?'

저자는 철학자는 시대의 흐름을 한 마디 개념으로 정의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 것 같다. 보통 위대한 철학자들에게는 자신만이 정의한 개념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철학자로서 시대를 꿰뚫는 무슨 개념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선진국으로 가자. 그러려면 철학적 눈높이가 높아야 한다.
새로운 시도를 하자. 창의적이자. 등 등.......

어디에 시선의 눈높이가 있고, 어디에 생각혁명이 있는지 나는 도저히 찾지 못했다.
오히려 참으로 현실감(조직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는, 그리하여 인간들의 결합이 무늬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잘 못 될 경우는 얼마나 똥칠을 하는지? 등 이런 저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는 티가 너무 나는 것 같다.)

이 책을 다시 읽고 정리할 즈음에 읽었던 박세길작가의 책이 휠씬 뛰어나다.
사회와 역사를 읽고, 어떤 방향으로 우리 국가/사회/개인이 나아가야 할 지를 제시한다는 측면이라면 박세길작가의 책을 읽는 것이 얻을 것이 많을 것이다..




곁다리 네번째. 다시 실망. '철학'의 목적에 대하여... 겨우 선진국인가?

철학을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내내 불편한 질문은 이것이었다.
"철학은 삶에 도움이 되는가? 철학은 생활에 도움이 되는가? ....철학은 잘 살자고? 선진국 되자고 하는 것인가? "

나도 그런 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저자가 강연을 하고 이 책을 쓴 목적은 아래 김용운교수의 목적과 비슷할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 시절에 내내 외웠던 아래 문구가 생각났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국민교육헌장이다.

사회학자 김호기교수에 칼럼에 의하면 1968년 12월 5일 선포된 이 헌장은 광복 이후 가장 주목할 철학자, '한국철학 연구의 개척자’로로 꼽히는 박종홍이 국민교육헌장의 주역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박종홍 등이 초안을 쓰고 대통령 박정희가 문안의 완성에 참여했으며 광복 이후 최고의 철학자와 최강의 권력자가 함께 만든 공동 작품이었다라고 한다.

철학자로서 박종홍은 ‘현실’에 대한 실존주의적이면서도 실용주의적인 접근을 중시했다. 그런데 이 접근은 ‘나’보다 ‘우리’를 우선시하는 국가주의를 내포하고 있었고, 이러한 사상의 연장선상에 바로 국민교육헌장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808032130340834)

너무 나간 것 같기는 하지만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느낌은 서구적 욕망의 시선에서 자본의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요구하는 것을 정신에도 부여하려는 나쁜 의도이다. 이것이 철학자라는 사람이 해야 할 말인가?!!!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불편한 단어는 국가자국주의, 국가이기주의, 국가전체주의, 국가공동체주의.. 등 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선과 전쟁(Zen at War)', , '불교 파시즘'을 쓴 빅토리아 교수의 경고가 머리에 떠 올라랐다.
이 문장에서 종교 -> '철학'으로 바꾼 것과 크게 뭐가 다른가 싶다. 나는....

" 선의 무아는 천황의 의지와 명령에 절대적이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복종이었따.
그리고 종교의 목적은 국가를 보위하고, 감히 국가의 자기 증대의 권위에 맞서는 나라와 인간을 처벌하는 것이었다." 라고 했다. 실제 스즈키 다이세츠(D.T. 스즈키)와 하라다 소가쿠가 그런 주장을 했다고 한다.


철학자 앤서니 그레일링은 국민은 인위적인 구조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경계는 과거의 전쟁으로써 그려진 피의 경계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했다. “하나 이상의 다른 문화가 공존하는 고향이 아닌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 문화적 유산은 국민 정체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독일 철학자 맑스, 프로이트, 니체, 후설, 룩셈부르크, 하이데거, 벤야민, 아렌트, 가다머, 하버마스, 호네트 등이 독일이라는 나라의 발전적 방향에 대해 논의한 것이 있을까?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레비나스, 블랑쇼, 바르트, 라캉,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 데리다, 바디우가 프랑스 사람이라고 프랑스가 선진국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제언을 한 것이 있나?


로티, 촘스키 등이 미국을 부강하고 강한 나라로 만들 철학적 방향을 제시한 적이 있나?


국내 철학교수가 쓴 책 중 근래에 읽었던 아래 책보다 한참 못 미친다. 허접하고 실망스럽다.
(조중걸교수가 자신이 쓴 책이 이런 책과 비교 된다고 하면 나라도 정말 욕나올 것 같다. 자존심 상하고...)


남의 생각 따라 하지 말자고 한다. 맞지만 현대 철학자 대부분은 상당한 독서가 였다.
저자는 노자를 재해석하는 것 외에 자기가 쏟아 낸 자기만의 철학적 개념이 무엇인지?



국가에 대한 생각을 논하려면 차라리 이런 책들이 나는 더 도움이 될 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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