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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첫째, 반야심경에서 사성제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독송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둘째, 우리나라의 대승불교는 상당 부분 힌두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특히 유식의 아뢰아식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사실상 아트만사상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셋째, 선불교는 힌두화된 대승불교가 중화사상으로 콧대가 높은 중국에 전래되면서 유교(성리학)의 심성사상 및 직관과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도가(노장)사상과 섞이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흔적은 하나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불교라고 할 수 없고 중국의 조사교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불교의 무아에서 '나'는 생활인이나 인칭적 의미에서의 '나'가 아니라 사람을 구성하는 것(오온)에 영혼과 같은 인격적 개체로 여길 만한 영속적인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무아는 그것이 망아의 황홀한 상태를 말한다거나, 무념무상의 경지에 드는 것과 같은 정신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아 부처님이 되셨는가,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연기법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진지하게 사유하여 일체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모든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것은 연기의 진리를 알았기 때문이다. " (경 <우다나>)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 것이요, 진리를 보면 연기를 본 것이다." <중아함경>
 
둘째로 사상제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알아야 할 바(고성제)을 알았고 닦아야 할 바(도성제)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집성제)를 버렸다. 그래서 나는 붓다, 깨달은 사람이다."  <숫따니빠따>
 
세 번째로 제법(온, 처, 계)의 여실한 관찰에 의하여 일체존재의 성품이 무상, 고, 무아임을 았았다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의 특징은 매우 분석적입니다. 일체의 존재현상을 명료학 보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 특히 선종에서는 이러한 분석과 사유는 없고 그런 분석적인 생각을 전부 번뇌나 망상으로 치부해 버리고 바로 직관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다 보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집니다.
 
교학으로서의 법은 오온, 12처, 18계, 사성제, 12연기의 다섯 가지 주제로 집약됩니다. 수행처로서의 법은 4념처, 4정근, 4여의족, 5근, 5력, 7각지, 8정도의 일곱 가지 주제로 구성된 37조도품(보리분법이라고도 함)으로 정리되고 이것은 다시 계정혜 삼학과 사마타, 위빠사나 등으로 체계화됩니다.
 
불교 수행의 핵심은 관념(개념)을 틀을 깨고 실재(법)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위빠사나입니다.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존재'는 12처로, '세계'는 18계로,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면 모든 법의 무상, 고, 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법의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단위인 찰나도 일어남과 머묾과 무너짐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인류가 자기고 있는 네 가지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불교적인 대답..
첫째, 진리란 무엇인가하는 불교의 진리관
연기법과 사상제
ㅇ 나와 세상은 조건 발생(연기)이다. 여러 조건들(연)이 얽히고설켜서 많은 괴로움을 일으키는(기) 것이다.
 
두 번째, 나는 무엇인가하는 불교의 인간관
오온
ㅇ '나'라는 존재는 물질, 느낌, 인식, 심리작용들과 의식의 다섯 가지 무더기의 적집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세상이란 무엇인가하는 불교의 세계관
ㅇ 눈, 귀, 코, 혀, 몸, 마노와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의 12처와 여기에다 여섯 가지 의식을 더한 18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번째, 진리의 기준과 속성은 무엇인가 하는 삼법인에 관한 것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라고 정리하고 계십니다.
 
초기불교의 인식론은 외계의 실재를 인정하고 이를 인식하는 유물론적 경험론입니다.
 
나의 실재는 오온, 12처, 18계의 심신복합체이며 이들의 상호작용입니다. 이것이 삶의 현상의 모두(일체)입니다.

 
사성제는 불교의 모든 교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합니다.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다섯 명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했을 때로부터 시작해서 구시나가라에서 반열반에 들 때까지 45년 동안 가장 많이 설한 가르침이 바로 이 사성제입니다.

 
오온이라는 것은 불교에만 있는 독특한 것으로 불교 교리의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괴로움은 인간이 개별적으로 겪는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불안전, 불안정, 결핍, 불만족 같은 인간의 조건 자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사성제는 연기법과 더불어불교의 핵심진리입니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오운 가운데 하나일 뿐인 마음(식)을 절대화하면 부처님이 그토록 부정했던 외도의 자아이론(아트만)을 떨어지고 만다는 점을 경계해야 합니다.
 
느낌이나 생각 등의 현상을 자기동일적 주체를 상정함이 없이 인연에 따라 발생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연기법입니다.
 
유식의 아뢰아식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트만사상입니다.
 
아뢰아식은 아트만, 여래장, 불성, 진여, 참나 등과 사실상 같은 개념으로 힌투교적인 개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무아사상에 의하면 아뢰아식뿐만 아니라 여래장, 불성, 진여자성, 참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은 괴로움의 끝이라는 멀고 긴 목표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알아차림이 빠지면 불교 수행은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초기불교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교다..
경전은 빠알리어로 된 5부 니까야와 한역된 4부 아함경이 있습니다.
상좌부 전통이 남아 있는 남방의 초기불교 국가에서는 오로지 석가모니 부처님만 인정할 뿐, 다른 부처나 보살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경전도 니까야만 인정하고 금강경, 반야심경, 법화경, 화엄경, 정토경 등 대승경전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승불교는 힌두화된 불교다.
화엄경, 반야심경, 금강경, 해심밀경, 정토삼부경..... 등 등 
대승경전은 불교경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종교문학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선불교는 불교가 아니라 중국의 조사교다.
중국의 유교사상(성리학의 심성사상)과 무위자연과 직관을 주장하는 도가사상이 섞이면서 생긴 중국화된 불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교가 아니라 중국의 조사들의 언행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 조사교일 뿐입니다.
중국 조사들의 계보가 이처럼 갈린 것은 교리 차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중국 전래의 유교사상인 문중의식에 의한 구분이라는 데 특성이 있습니다.
 
솔직히 고승들의 선문답이라는 것이 어지간히 공부한 이 사람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것이 중생들의 괴로움의 소멸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불교 변천의 큰 줄기를 되돌아보면 초기불교가 사실(연기법)에 기초하여 사실(사성제, 삼법인)을 말하는 경험적, 과학적(해체관찰, 사념처)이었던 것이 대승에 와서 부처님을 신으로 믿고 떠받드는 유신적, 관념적 종교가 되더니 선종에 와서 불교는 외도를 닮아 가고 중국의 노장철학, 생활철학으로 변화해 버리고 맙니다.
 

 
[ 자평 ]
 
불교도는 아니지만, 인간 <석가모니>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런 관심에서 확장된 근래에 읽었던 불교에 관한 책 중 기억에 남고, 정리에 가치가 있는 책 중 하나다. 
그런 저자 중  <비구범일>,  <시현>이 있다. 

 
내가 불교에 대해 처음 접한 책들은 선사들의 말씀을 모은 책('달을 가르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 끝은 왜 보고 있나, 1990년)이나 스님이  쓴 에세이(여보게 저승갈 때 무얼 가지고 가나, 1993년) 종류였다. 이후 고승들의 말씀을 읽는 것에 빠져는 시기가 있었으며 대부분은 다 버리고 몇 분의 책은 서가에 남아 있다. 

 
이런 책들을 통해 읽은 불교와 석가모니 부처의 불교가 꽤 차이가 난다는 것을 가르쳐 준 책은 법정 스님이 엮은 숫파니파타(1999년)가 있었고 특히 해커붓다(2014년)가 내게는 충격이었다. 

 
이 때 이후로 나는 종교인들이  쓴 책들은 읽지 않으며 특히 선승들의 책은 더 읽지 않는다.
읽을 필요가 있을 때는 선수행자들, 스님들의 책은 제외했고 외국의 전문학자들이 연구한 책들을 선별하여 읽었다.

 
젊은 때는 '깨달은 사람' 이라는 환상에 빠져 인생사 모든 문제을 해법을 줄 것 같은 환상(갈애)이 있어 이런 분들이말씀를 찾게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분들은 나같은 범인이 느끼는 현실적 고민에 대한 경험이 미약하다
특히 현실적인 세속가 고뇌를 해결해 주는 답변으로서의 현실인식도 약하고, '탁'하는 통찰력도 없어 보였다. 
그저 '참나에 믿고 맡기라'거나 '놓아 버리라'는 것 밖에 특별한 메시지는 없는 것 같고.....
 
아직도 이런 갈애를 가진 분들이 있고, 이런 갈애를 채워 줄 것 같은 상품은 계속 나온다.
무엇이 진품인지는 잘 모르겠다. 명확한 것은 나의 갈애일 뿐.....
석가모니 말씀대로 나의 갈애가 작다면 가품에 빠질 위험도 없고, 진품을 가릴 노력도 필요 없어질 것이다.
진정한 문제와 해법은 ‘나의 갈애’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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