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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에 대한 감상의 폭과 넓이가 어떤지 한번 사무벨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감상을 두 책에서 비교해 읽어 보았다. 

 

비교하여 읽어 보면 어느 작가의 지식, 더 나아가 생각의 폭과 깊이가 더 큰지/깊고/높은지 금방 알 수 있다. 

 

한 책은 이 책을 위대한 생각/질문을 주는,  매우 더 독보이게 하여 읽고 싶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책은 '고도를 기디라며'를 그저 지친 일상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의미를 부여하라는 지침을 주는 평범한 자기계발서쯤으로 만들었다. 

 

사무엘 베케트는 '내가 책에서 쓰고자 한 것은 무엇이다'라고 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해석은 읽는 자가 선택할 일이다.

하지만 베케트가 책을 쓴 목적과 책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 안다면 무엇이 더 좋은 해석인지는 스스로 판단이 되리라....

먼저 2006년에 나온 김용규님의 '철학까페에서 문학읽기'에 나오는 '고도를 기다리며'

'권태'의 의미.  텅빈 무대의 대본 없는 배우, 인간

 

하이데거는 권태란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염려하는 현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기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의 구조는 '붙잡고 있음'이자 동시에 '공허 속에 놓아둠'이라 했다.

 

우리는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시간 죽이기'를 시작한다고 한다.

 

우리는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언제 올지도 모르고 또 무엇인지도 모르는 죽음에 의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는 존재가 아닌던가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주는 지루함은 단순히 '흥미 없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근본적 구조에서 나온 '존재론적 권태'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권태를 주제로 관객들을 흥미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권태 자체를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이 권태를 스스로 체험하게 한다.....전통적인 연극이 무엇인가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연극을 반연극이나 신연극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카뮈나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작가들이 부조리를 말할 때는 보통 '세계와 그 안에서의 삶이 가진 이해할 수 없음'을 뜻한다......<존재와 무> <구토>, <이방인>과 <페스트> 등은 철학적 또는 문학적으로 부조를 설명하며 이해시키려 한다.....하지만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매우 특이하게 부조리를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려고 하는 대신 부조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

 

베케트가 한 일은 적어도 두 가지다. 

하나는 '변화 없는 시공간'을 창조한 일이다. 전통적 연극에서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의 변화는 사건의 전개를 통해 표현된다. 하지만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아무런 사건도 전재되지 않는다.....시간은 반복되고 공간은 고정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거다. 이 자체가 부조리인 것이다.....베케트는 무의미한 대화와 행동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역사적 시간의 전개가 불가능한 시공간을 창조했다. 이것이 그가 보여주는 첫 번째 부조리인 것이다.

 

'부조리 그 자체'를 보여주기 위해 베케트가 한 또 하나의 일은 '성격 없는 인물'을 창조한 것이다. 전통적 연극에서 인물은 성격에 의해 창조된다. 하지만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통적 의미에서 보면 성격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이것 역시 부조리하다.

연극에서 한 인물이 어떤 성격을 갖기 위해서는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 확실한 의미와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베케트의 인물들의 말과 행동에는 어떤 의미도 목적도 없다.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주인공'도 없고, 이와 갈등하는 '대립자'도 없다.....

 

베케트는 결국 '변화 없는 시공간' 안에 '성격 없는 인물'들을 그저 내던져놓은 것이다.

 

하이데거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존재와 시간>에 의하면, 인간은 그 어떤 특별한 의미없이 그저 세계로 '내던져진 자'이다. 이 '내던져짐'에는 거룩한 신의 섭리도, 정해진 운명도 없다. 인간의 모든 것은 오직 자신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그저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고 '현존재'라고 부르는 뜻이 여기에 있다.....자신의 모든 것이 오직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만 맡겨져 있는 자리, 이 선택과 결단에 의해서 비로서 존재의 의미가 밝혀지는 자리,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이다. 

 

사람들은 우선 보통 남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따라, 즉 '평균적 일상성'을 따라 살아간다. '대개 사람들이 그리하듯' 자기 자신 보다는 자기 밖의 세상 모든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따라 '잡담'을 하고, 그들을 따라 '애매하게' 행동함으로써, 서로서로 동질화 및 평균화를 꾀한다는 거다. 그럼으로써 위안을 얻는 거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일상적 삶을 '비본래적 삶'이라고 불렀다.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서 사는 '본래적 삶'이 아니라는 뜻이다.....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퇴락', 곧 '무너져 내림'이라고 했다. '세상사람'들은 그저 남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 말하고, 남들이 행동하는 대로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진정한 삶은 무너져 내린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시간 죽이기'에 불과한 자신의 비본래적인 삶이 마치 자기가 선택하고 결단한 자신의 본래적인 삶인 것처럼 위장도 하고 활기를 불어넣어 스스로를 위안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 죽이기'에 분주히 몰입하는 동안에는 살아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는 거다. 

 

"우리는 행복하다. (침묵) 이제 우리는 행복하니까, 이제 뭘한다? "

"고도를 기다려야지."

 

"이제 우리는 신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외치며 나치 수용소에서 죽어간 독일 신학자 본회퍼(1906~1945)의 '숨은 신'에 가깝다. 고도(Godot)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의 약속을 지키지도 않으며, 등장인물들을 전혀 돌아 보지 않기 때문이다. 

 

'깊은 권태' 또는 '본래적 권태'...이 권태에 대해서는 '시간 죽이기'가 불가능하다. 아무리 비본래적인 일상생활에 분주하게 몰입해보아도 '깊은 권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상황이 가진 근원적이면서도 숙명적인 권태....

 

하이데거는 '깊은 권태'를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곧 '실존'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실존이란 다른 사람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세상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기획하고 그것을 따라 산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이러한 행위를 '기획투사'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기획투사는 자신의 존재가능성에 스스로를 던져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기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행위이다. 한마디로 진정한 자기, 본래적 자기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 임제선사의 말과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이제 결정하라. 전락할 것인가, 실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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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나온 안상헌님의 '경영학보다는 소설에서 배워라'에 나오는 '고도를 기다리며'

인생이란 '잘'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것.

 

일상의 허무를 내색하지 않는 것은 밥법이이 지겨움이 끝이 없고 그것에서 탈출할 뽀족한 수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몸살로 사흘만 앓아누워도 '돈도 명예도 다 필요 없고 그냥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척추암 선고를 받고 2년여 걸쳐 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받았던 정영희교수도 당시, 그리웠던 일상의 황홀을 술회한 바 있다...."그리고 저 치열하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리라."

 

권태와 환희의 갈림길에서 환희로 가는 길을 끊임없이 더듬어 보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상을 살아가는 자세다.

 

일상의 황홀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이미 한번 멈춰본 사람들이다. 인생의 급브레이크가 걸리는 순간을 경험한 사람들은 안다. 불의의 사고, 커다란 질병, 돌이킬 수 없는 배신 같은 일로 일상의 궤도를 이탈해본 사람들은 궤도의 안정이 얼마나 멋지고 황홀한지를 알고 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본 사람들에게는 이후의 삶이 덤이 되는 법이다. 덤으로 사는 삶은 충분히 황홀할 수 있다. 

 

일상을 수시로 엄습해오는 권태, 그 속에서의 탈출과 구원에 대한 기다림, 하지만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는 무력감,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은 '이 광활한 혼란 가운데서 우리가 고도를 기다린다는 그 점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 버리지 못하는 희망과 꿈이 우리에게 일상의 황홀을 안겨다준다.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성은 이미 한없이 깊은 영원한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야. 너 내 말 알아듣겠냐?"

 

"디디, 우린 늘 이렇게 뭔가를 찾아내는 거야. 그래서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되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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