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읽은 책들

참 불교론 by 군맹서진

비즈붓다 2017. 3. 13. 22:09
728x90

ㅇ 불교에 있어서 중생이란 무명이다. 그리고 무명이란 연기법을 거역하고자 하는 힘이다. 그리고 이 무명은 현상계의 창조자이며, 연기법인 광명은 현상계의 지배자이다.

 

ㅇ 무명이란 소멸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각하고 소중히 간직하여야 할 대상인 것이다.

 

ㅇ 수행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말과 행동인 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ㅇ 무명이 존재하지 않는 몸과 마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몸이나 마음의 상태를 문제 삼는 가르침으로 오해하고 있다.

 

ㅇ 인도의 일부 불교논사들은 아리아적인 사고기반 위에서 불교를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였고, 또 중국의 모든 불교논사들은 아리아적 사고기반이나 중용적인 사고기반 위에서 불교를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특히 중국에서 탄생한 선종은 도교의 뼈대 위에 불교라는 옷을 입힌 것에 불과한 것으로 불교라고 볼 수 있는 요소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대표적인 불교로 행세하고 있다.

 

ㅇ 종교란 진실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제시하는 가르침이다...붓다의 육년 고행의 목적은 고통의 근원을 없애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내용은 고통의 근원을 없애는 방법일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목적은 고통의 근원을 없애는 방법이다.

 

ㅇ 진정한 목적은 고통의 근원을 없앤 결과를 이 몸이 누리는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험이어야 한다는 개별성, 누구나가 하는 경험이어야 한다는 보편성, 그리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하는 타당성인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ㅇ 과연 개별성과 보편성 그리고 타당성을 모두 갖춘 진리가 존재할 수 있을까.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불교의 출발점이다. 그것은 바로...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라고 하는 사실이다.

 

ㅇ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 이것은 개별성과 보편성을 갖춘 사실이며, 또 영원히 변하지 않을 그 이유가 충분히 입증되어지는 타당성을 겸비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벽한 진리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불교사고의 출발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진리가 바로 불교사고의 출발점인 것이다.

 

ㅇ 배려니, 사랑이니, 인정이니 하는 모든 것들 모두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여기"뿐인 것이다.

 

부모와 자녀는 동시에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자녀가 한 살이면 부도도 한 살이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를 키우면 자녀도 부모를 키운다. 다시 말해서 자녀가 부모에게 자녀교육을 받는다면 부모는 자녀에게 부모교육을 받는 것이다.

 

ㅇ 마음이 물질인 육신이 없이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마음은 육신과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음도 역시 관계 그 자체인 것이다.

 

나의 몸과 마음은 변화와 관계 그 자체이다.

 

ㅇ 모든 것은 관계를 맺고 변화한다는 진리인 연기법을 거역하려 하기  때문이다. 즉 거역할 수 없는 연기법을 거역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이다......이 무명이 바로 고통의 근원인 것이다.

 

ㅇ 나와 네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관계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너와 내가 실재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ㅇ 무명이 없어졌다는 것은 연기법을 거역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연기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명이 사라졌다는 것은 모든 관계에 순응하면서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변화와 관계와의 마찰도 사라질 것이다.

 

ㅇ 연기법에 순응하는 삶이란 어떠한 삶인가. 그것은 새옹지와 같은 삶이다.

 

ㅇ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연기법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연기법을 손상시키지 않고 연기법을 거역하는 것이다. 마치 중력을 손상시키지 않고 중력을 거역하여서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처럼.

 

ㅇ 무명이란 무엇이었던가. 모든 것은 관계를 가지고 변화한다는 근본적인 연기법을 거역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의지였다.....과연 의지가 없다면 이 세상은 존재할 수 있을까. 아마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삼라만상의 창조주는 연기법이 아니라 무명이다.

 

ㅇ 끊임없이 현재를 과거로 만들고 미래를 현재로 만들면서 현재 속에 품고 있는 역동적인 현재만이 실재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과거를 알기 위해서는 현재 속에서 과거를 끄집어내야 한다. 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현재 속에서 미래를 끄집어내야 한다.

 

ㅇ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우주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ㅇ 나의 생각은 우주의 생각의 일부분이며, 나의 말은 우주의 소리의 일부분이며, 나의 행동은 우주의 움직임의 일부분이다. 그러니 나의 삶이 어떠하였던지간에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이 우주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ㅇ 나의 몸은 단 한 번도 변화와 관계를 거역해 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몸은 그 자체가 연기법인 것이다. 따라서 몸에는 무명이 있을 수 없다.....마음 역시 나의 의지와는상관없이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고 변한다.....마음도 역시 그 자체가 변화와 관계에 순응하는 연기법인 것이다. 따라서 마음도 역시 무명이 있을 수 없다.

 

ㅇ 무명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업에 있다. 다시 말해서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다. 몸은 늙고 병들고 죽지만 내가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으려 노력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