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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들

탁월한 사유의 시선 by 최진석

비즈붓다 2017. 2. 18.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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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내용 ]


ㅇ 우리는 철학 수입국으로 살았다....'높은 수준의 생각'은 수입해서 산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한 사유의 결과를 숙지하고 내면화하면서도 스스로 '생각한다'고 착각해왔다. 수입된 생각으로 사는 한, 독립적일 수 없다.

ㅇ 선도력을 가져본 적이 있는 나라는 선도력을 가져 본 적이 없는 나라보다 매사에 '수준'이 높다.

ㅇ 무엇이든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안목의 높이만큼만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ㅇ 전략적 높이를 행사해본 적 없이 그저 전술적 차원에서만 살아본 사람들...
'내용'이 전술이라면, '시선'은 전략이다.

ㅇ 문제는 지금까지 '따라하기'와 훈고에 더 집중하다 보니, 무의식적으로라도 그것들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앞서려 덤비거나 창의를 발휘하려는 의지 자체가 줄어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선도나 창의에 대한 절실함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ㅇ 중국은 서양으로부터 완전히 패배당한 다음에 신중하지만 강력하고 일관되게 복수를 준비한다.

ㅇ 새로운 사상, 새로운 문화 ,새로운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만 건강한 정치 제도가 가능하고, 이 건강한 정치 제도가 가능해야만 과학기술 문명이 발전하게 된다고 인식한 것....

ㅇ 높을 뿐만 아니라 더 종합적이고 근본적이며 독립적이고 주도적....전략적인 사고란 이미 만들어진 판 안에서 다른 것들에 대응하는 형태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판 자체를 새로 짜는 일이다. 판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판을 새로 짜는 일에 대한 사고가 바로 전략적 사고다.

ㅇ 문제는 철학자들이 사용했던 시선의 높이에 동참하는 능력을 배양해서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자기가 자기 삶의 격을 철학적인 시선의 높이에서 결정하고 행위하는 것, 그 실천적 영역을 의미함....문제를 철학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철학이지, 철학적으로 해결된 문제의 결과들을 답습하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는 말...

ㅇ 장자는 절대 누구처럼 산 사람이 아니다....우리가 흔히 아는 철학자들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닮기 위해 살지 않았다....자기만의 시선으로 자기처럼 산 사람들이다.


ㅇ 세상 속의 잡단한 변화를 수학자는 '수'를 가지고 압축해서 포착해버리듯 철학자는 '관념'으로 압축해서 다룬다.

ㅇ 철학 생산자들은 모두 시대와 세계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하게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모든 철학은 다 시대의 자식들이다. 시대를 건너가는 가장 높은 차원의 시선이 바로 철학이기  때문이다.


ㅇ 무엇인가 새로 만들면서 이루는 일정한 범위를 '장르'라고 한다. 선진국은 바로 이 '장르'를 만들다.

ㅇ 책임성을 발휘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번잡한 일상 속에서도 군중의 욕망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그 흐름을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그 흐름을 하나의 관념으로 포착하고 그 포착된 관념이 구체적으로 적용되어 하나의 새로운 장르를 형성하는 것...


ㅇ 질문이 일어나려면 우선 궁금증과 호기심이 작동해야만 한다.

ㅇ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이다. 질문 - 독립된 주체 - 궁금증과 호기심 - 상상력과 창의력 - 시대에 대한 책임성 - 관념적 포착 - 장르 - 선도력 - 선진국은 이렇게 연결됩니다. 사실 질문이 성한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ㅇ 나라가 한계를 느끼거나 정체되어 있다면, 문제는 분명하다. 그 나라를 끌고 갈 꿈과 이상이 설정되지 못했거나 설령 설정되었다 해도 현실적인 요구와 일치하지 못하면 당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ㅇ 철학적 높이에 도달하는 것은 가장 높은 차원에서 시대를 관념으로 포착하는 일이지 그 시대를 관념으로 포착해낸 결과들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다.

ㅇ 철학적인 태도를 갖는 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높은 차원에서 현실로서의 지금 이 세계를 읽는 일이 되는 것이다. 사유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사유하는 것이다.

ㅇ 자기 내면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욕망으로 자기 인생을 채운 사람들이지 기존에 있는 문법이나 논리로 그것을 해석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직 오지 않은 곳으로 그냥 무모하게 건너갈 뿐이다.

ㅇ 비평만 하는 것이 일상화...참여자나 행위자로 혹은 책임자로 존재하지 않고 제3자처럼 존재....구경꾼으로 존재...점점 비평가와 분석가가 많아짐.....일류 비평가과 일류 분석가가 넘쳐남...이는 꿈과 자신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임..

지금 우리에게는 일류 비평가와 일류 분석가보다는 이류라도 좋으니 1인칭 참여자들이 필요한 때....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살다 가겠다는 의지로 뭉친 이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바로 꿈을 꾸는 무모한 사람들....

ㅇ 종속성을 벗어나는 일은 의식 있는 개별자가 역사적 책임성을 회복해야만 가능해지는 일이다....자신이 독립적으로 시대의식을 파악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자신만의 능력으로 세상에 질문을 제기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말...

ㅇ 관찰을 유지시키는 힘, 그것이 바로 집요함이고 몰입이다. 인생의 다양한 방면에서의 승패는 자신을 이 몰입의 단계까지 집요하게 끌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좌우..

ㅇ '나 자신만의 즐거움'을 장자는 자쾌(自快)....독립적인 삶을 말함...의존적 쾌락이 아닌 내 안에서 내가 생산해 낸 나만의 고유한 쾌락, 이것이 '자쾌'...이것이 자유이고 독립이다


ㅇ 이론의 사유가 아니라 사유의 결과물이다. 철학적 사유는 자신이 직접 세계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일이다. 사유의 결과물인 '이론'에 갇히면, 사유의 대상인 '세계'에 직접 접촉하려는 도전적인 용기가 약해진다.

ㅇ 물컵을 본다...대개는 이미 가지고 있는 관념들을 조합시켜 그냥 '물컵'이라고 '판단'해 버리고는 중간에 시선을 거두어들인다....물컵을 정말로 보는 사람은 자신의 시선을 물컵까지 보내고 또 시선을 계속 거기에 머무르게 할 수 있다.

ㅇ 관찰, 통찰, 사유의 집요함은 같은 부지런함이 지식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격적인 차원의 것이라는 점이다.

ㅇ 능동적인 주체는 자신이 주인이기 때문에,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근본적인 토대인 궁금증과 호기심이 살아 있다. 그래서 질문을 할 수 있게 된다. 능동적 주체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추체로 등장한다.

모든 것이 자기로부터 말미암기 위해서는 자기 이외의 것들은 다 자신의 외부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안에는 자기만 있어야 한다. 이때 자기 이외의 것들은 자기를 키우고 단단하게 하는 수단으로만 사용될 뿐이다.


ㅇ 태연자약( 泰然自若)에서 자약은 자기가 자기로만 되어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태연은 아주 크고 넓고 여유로운 모습이다....태연자약은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자신만의 흐름과 결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모습이다.

ㅇ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변화를 꿈꾸는 그 사람이 우선 성숙해져야 있어야...

ㅇ 지식과 경험이 증가함에 따라서 정말 더 창의적이 되었고 더 여유로워졌는가? 더 행복해졌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식과 경험이 주는 무게보다 나의 무게감이 작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ㅇ 모든 창조적 행위는 지식 간의 진위를 따지는 일에서 일어난다기보다는 그 사람만의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문제 있는 이 세계를 이전과는 다르게 건너가보려는 적극적인 시도에서 일어난다...치밀하고도 자세하게 벌이는 지적인 논증보다도 궁금증이나 호기심....앞뒤 세세하게 재지 않는 배짱같은 것들이 휠씬 더 큰 역할을 한다....

ㅇ 순자 '권학'편

    積土成山(적토성산), 風雨興焉(풍우흥언)

積水成淵(적수성연), 蛟龍生焉(교룡생언)
-> 정말 진실하고도 성실하게 탁월함을 추구하고 덕을 이루고 있는지, 그것만을 예민하게 경계하며 살아야 하는 것

성숙되고 독립된 주체가 발산하는 것이 창의성이고 상상력이다. 상상력이나 창으력은 발휘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것이다.

ㅇ 이질적인 것 사이에서 동질성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굉장히 높은 사유 능력인데, 이 능력의 표현을 은유라고 한다.

ㅇ 종교는 기본적으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철학은 회의와 반성을 근거로 한다.

ㅇ 모든 철학은 시대의 자식이다. 한 시대의 특수한 문제의식을 보편적 단계의 사유 체계로 승화시킨 것이 철학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보편적 사유 체계가 모든 문제에 유효하거나 언제나 영원히 유효할 수는 없다. 불변하고 절대적인 보편 진리는 없다.

고도로 지적인 높이에서 세계의 흐름을 포착하는 능력으로 형성된 사유 체계가 철학인 것이다. 그리고 그 지성적인 높이는 그 시대의 핵심적인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고전에 있는 '진리적'인 것들이 당시의 구체적인 세계와 어떤 유기적 연관성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한 후,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유기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시대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세계에서 포착된 자기만의 문제가 자기에게서 먼저 진리로 드러나는 것이 관건이지, 경전에 있는 진리를 묵수(墨守)하는 것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 느낀 점/배운 점 ]


부제는 '우리가 꿈꾸는 시대를 위한 철학의 힘'
내용은 최진석교수님이 건명원에서 한 강연을 엮은 책...

가장 먼저 나 같은 문자중독, 지식/이론중독으로 '아는체 병'이 걸린 자의 무의식적인 자만심을 때려 주는 아래 글이 아팠다.
저자와 같은 이런 생각은 나도 중환자실에 있으면서 매우 많이 했었다.
(물론 이렇게 고상하진 않지만, 신이 있다면 "내가 이 세상에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으니 살려 달라고 하겠는가?"라는 화두였다.)

"이론의 사유가 아니라 사유의 결과물이다. 철학적 사유는 자신이 직접 세계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일이다. 사유의 결과물인 '이론'에 갇히면, 사유의 대상인 '세계'에 직접 접촉하려는 도전적인 용기가 약해진다."

"지식과 경험이 증가함에 따라서 정말 더 창의적이 되었고 더 여유로워졌는가? 더 행복해졌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식과 경험이 주는 무게보다 나의 무게감이 작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독자적 사유에 대한 동경은 20대에 였던 것 같다.
라즈니쉬, 마하리쉬를 필두로 한 인도에서 한 소식 했다는 분들.....
노자,공자, 순자, 묵자, 한비자 등 그 숱한 춘추전국시대를 누볐던 분들....
이런 분들을 만나보거나 해설하는 많은 한국분들의 순한 해설서를 읽다 보면
어느새 왜 우리 나라는 남의 생각을 해설하는 사람만 있고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없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대를 꿰뚫는 문제의식, 남에게 빌린 지식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우리 선조를 찾다가 내가 발견하여 소장하고 (물론 완독은 아직 못했다) 아래와 같다.

우선 이 분들의 생각이 온전히 한국적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근대 인물 중에 내 마음에 넣어져 있는 분은 세 분이다. 경허선사, 다석 류영모, 무위당 장일순

경허선사의 경지가 어느 정도 인지 모르겠으나 한국 선불교를 언급할 때 그분의 거쳐 가지 않을 수 없다. 기괴와 파고의 선승......딱 봐도 웬지 도인을 것 같은.. Force...

그에 대한 일화나 남긴 글을 읽어 보면
경허는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은 하지만 자기만의 특징과 언어가 있다.
아주 독특하고 기발한 자시만의 행동이 있다.

지금을 절판된 박영규씨가 쓴 '달마에서 경허까지'...

콧구멍 없는 소


다석 류영모 선생을 어느 책에서 처음 접했는지는 모르지만 이후 그분의 저술을 전독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 사회생활하면서 내 싸인은 '가온찍기' 였었다..
이 분은 공자, 노자, 예수, 부처 등을 가릴 것 없이 따다 쓰지만 독특한 자신만의 버부림이 있다. 평소에 행동도 독특하고...여튼 자신만의 목소리가 있는 분이다.

제소리가온 찍기다석 류영모 어록


특히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저서는 많지가 않아 다 읽어 보는 것이 가능하다.
사진도 동네 아저씨 같은 얼굴에 글 자체도 매우 순박하여 막걸리 처럼 따뜻하게 넘어간다. 내 고향과 가까운 원주에 계셨던 분이라 더욱 가깝게 느껴지고....
특히 '좁쌀 한알'이라는 책을 보면 이 분이 지인들에게 선물한 붓글씨의 글귀와 글씨가 나오는데 글씨 자체가 이렇게 예쁜지 정말....

노자 이야기나락 한알 속의 우주좁쌀 한 알


다른 측면이지만 이런 부류의 책도 최진석교수처럼 독자적인 높이를 가진 분들의 책이라고 생각된다.

하영선씨가 쓴 '역사속의 젊은 그들'이란 책이다.
18세기 '북학파'에서 21세기 '복합파'까지 우리 역사에서 한국 외교의 길을 개척한 선각자 여덟 명의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열악한 한국의 현실 속에서 세계열강에 둘러 싸인 현실에서 우리 선조, 당시는 젊었던 여덟 분들의 젊은 지식인들은 어떻게 외교 강국의 길을 찾았는가?"를 기술한 책이다.

역사 속의 젊은 그들


철학자말고 아니지만 독립적 생각과 행동을 생각할 때 가장 진하게 내 머리에 떠 오르는 사람은 국사 교과서에 잠깐 나오는 최충헌의 노비... '만적'이라는 분....

(시대적 상황을 고찰해 볼 때 나는 이 분이 참 대단한 용기를 가진 분이라는 느낌)
(당시에는) 이 분의 저작권인 줄 알았던, 노예 해방을 주장한 멋진 반항의 은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그 후 이말이 원래는 진나라 시절 유방/항우 보다 먼저 민란을 일으킨 진승(陳勝, ? ~ 기원전 209년)이라는 깡패 두목쯤이 되는 사람의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항우와 유방 1


아마 BC73년에서 71년까지 2년에 걸쳐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로마와 이탈리아 본토를 뒤흔든 노예 반란시절에도 이런 외침은 있었을 것 같다.
(책을 읽지 못했고 스탠리 큐브릭 감독,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영화 〈스파르타쿠스〉를 보았다. 그 야한 미국 드리마 '스파르타쿠스'도 보긴 했다.)
책에서는 스파르타쿠스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로마를 끝장내버리고, 노예와 주인이 없는 세상을 만들 것이오.”

소설 스파르타쿠스




반란이나 혁명이 아니더라도 생각이라는 차원에서
뭔가 뒤집으려고 인생 전체와 목숨을 다 걸어본 사람들이 좋았다.

이이, 이황보다는 서경덕 좋아 했었다.
화담집에 나오는 그 분의 행장에서 생각의 반란의식을 보았기 때문이다.

화담집

"17살 때에는(1506)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 대목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배우는 데에 먼저 물()의 이치를 탐구하지 아니하면 책만 읽어서 무슨 소용인가’라고 탄식했다..자기 자신의 사색과 궁리의 힘으로 스스로 깨닫는 데에 힘을 쏟았다"라도 한다. 퇴계 이황은 그런 서경덕을 가리켜 ‘성현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비판했다고 한다.....서경덕에게 중요한 것은 학문적 정통성이나 전통적인 권위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얻은 이치였고, 유교 경서에 주석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이치를 궁리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학문적 독립성과 자율성, 그리고 주체성을 우선시 했다."

임제가 좋았고, 하륜보다 정도전이 좋았다.
임제선사의 가장 멋진 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마음을 버려라: 임제


유성룡과 이항복보다 정여립이 좋았다.
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해서 여러 계층의 인물들과 격이 없이 지냈다고 한다.
평소 생각이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를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물론 둘 다 맹자의 사상이란다.)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똑바로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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