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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저는 독자들이 정보와 저를 구분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쓴 글이지만 내가 중명할 수 없다는 뜻이죠
----> 적어도 꽤 양심적이고, 글과 글 쓴이를 분리할 수 있는 식견이 있는 저자다.
 
음을 바꾸면 코드가 바뀌지. 삶도 다를 것 없어. 너도 그렇고.
너도 네 삶에서 여러 음들을 고르면서 너 자신을 표현하는 거야.
의식하게 되면 네 삶도 적절한 코드로 응답할 거야. 
아니, 삶이 '조화롭게' 응답할 거라고 해야겠지.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얻느냐이다.
"진실이란 건 아무튼 너의 결정이야".
그리고 그가 나에게 반복했던 말처럼 "그건 혼자서 생각해봐."
 
(첫 번째 마디: 그루브)
 
이야기는 작가 안에 있는 거야. 안 그래?  아니면 연필 안에 있나? 
네 문제는 이거야. 너는 네 이야기를 베이스 기타로 하려고 해. 베이스 기타를 통해서 하는 게 아니라
 
(두 번째 마디: 음)
 
다르지만 동등한 음악의 요소 열개를 찾았어,
음, 아티큘레이션, 테크닉, 감정, 다이내믹, 리듬, 톤, 프레이징, 쉼, 그리고 듣기
 
(세 번째 마디: 아티큘레이션과 길이)
 
원래 있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위에 뭔가를 쌓아 올리는 쪽이 휠씬 더 쉬워.
아름다움 따위는 없다고 믿고 맨땅에서부터 만들려고 애쓴느 것보다.
 
흔적을 더 깊이 들어다보면 그 흔적의 주인을 더 깊이 들엳볼 수 있다고도 했다.
 
근거? 누군가의 관점 말고 무슨 근거가 더 있어야 해? 
그리고 말해봐. 그 근거라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너도 경험으로부터 배웠잖아? 중요한 건 그거지

 
(네 번째 마디: 테크닉)

 
연습할 때는 테크닉을 익히기 위해 '집중'을 사용하는 거예요.
그런 다음 그 테크닉을 편안하게 쓸 때는 '집중하지 않기'를 사용하는 거죠.
이 두 방법을 합치면 테크닉을 완벽하게 터득할 수 있어요. 
 

 
다음 번에 뭘 배우겠다고 마음 먹으면, 그걸 이미 할 수 있는 것처럼 구는 거야.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봐. "내가 이 테크닉을 이미 할 수 있다면 어떤 소리가 날까?" 그런 다음엔 그냥 해버려!
 
(다섯 번째 마디: 감정과 느낌)
 
의도야말로 모든 것의 키야.
 
의도가 순수하고 솔직하면 어떠한 감정에서도 아름다움을 끌어낼 수 있어.
그리고 음처럼, 모든 의도 안에도 아름다움의 세계가 존재해.
 
(여섯 번째 마디: 다이내믹)
 
모든 떨림은 태어나기 전부터 전달자가 필요한데, 작곡가가 바로 그 전달자라는 거야.
떨림은 그걸 받아주는 '무언가'가 있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야.
 
사물에서, 이를테면 스피커 같은 사물에서 나오는 진동이 희미할 때, 우리는 제일 먼저 볼륨부터 높이고 봐.
하지만 다른 접근법도 있지. 우리 자신의 볼륨을 키우는 거야. 수용하는 볼륨을
 
(일곱 번째 마디: 리듬과 템포)
 
(여덟 번째 마디: 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나는 톤을 바꿈으로써 누군가의 몸과 마음, 태도를 바꿀 수 있다.
 
(아홉 번째 마디: 프레이징)
 
(열 번째 마디: 공간과 쉼)
 
(열한 번째 마디: 듣기)
 
(마지막 마디: 꿈)
 
[ 자평 ] 배우려던 것은 배우지 못햇다. 뜻하지 않은 것도 배우지 못했다. 나랑은 안 맞은 책....
 
활용한 통찰을 찾는 경험론자였을까? 아니면 어설프게 요기나 선사들의 책에 감동한 한 예술인의 창작 소설일까? 
 
이런 스토리 방식이라면 <더 골>처럼 재미는 없지만 읽은 목적은 충족시켜주는 나름대로운 가르침은 있어야 했지 않을까?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목적인 음악에 대해서는 별 배운 것이 없고, 이 책이 지향한 음악을 통한 인생의 통찰에 대해서도 별다르게 새롭게 배운 점도 없다.
한마디로 내게는 낭비된 시간이었다.

 
이렇게 한 분야의 고수를 우연히 만나, 그 고수가 평생을 닦은 절세무공의 핵심을 전수받는다는 류의 스토리는 꽤 식상하다.
 
고려원의 <영웅문>세대인 나는 예전 무협지에서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대단한 고수를 만나 절세비급을 전달받는 식의 스토리에 익숙하다.

 
분야는 무공에서 살아 가는 방법, 인생의 의미, 우주의 진리 따위로 바뀌 었지만 이런 스토리 틀로 어릴적 읽은 것들만 해도 꽤 된다.
 
1984년 국내 번역된 구제프의 <위대한 만남>

1989년에 국내 번역 출간된 스와미 라마의 <내가 만난 히말라야의 성자들>

1999년 나왔던 베어드 T. 스폴딩 의 <초인생활>

2000년 나왔던 프레데릭 렌즈의 <히말라야에서 만난 성자> 등 등

가장 최근에 본 책은(읽었다는 것이 아닌 나온지 확인해 본 책)  1970년대 유명했던 채널러인 제인 로버츠 여사의 책  <세스 매트리얼>란 책도 있다
절판된 전작(육체가 없지만 나는 이 책을 쓴다)은 <Seth Speaks>란 원서를 번역한 책이고, 이 번 책은 <The Seth Materials>이란 책을 번역한 절판된 책의 재개정판이라 한다. 

 
이런 Master들이 진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경험상 이제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그만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고도만을 기다리기만 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되지 말아야 겠다.
 
[장정일 칼럼] 고도를 기다리지 말자
[장정일 칼럼] 고도를 기다리지 말자 (hankookilbo.com)

[장정일 칼럼] 고도를 기다리지 말자 | 한국일보

www.hankookilbo.com

 
" 오지 않지만 하염없이 기다리는 행위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의미는 선택적이다. 즉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는 절망이지만, 그래도 기다린다는 것에는 일말의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양자택일을 뿌리치자."
 
" 두 주인공이 보여주는 유아성과 자기기만은 설사 고도가 오더라도 고도를 알아 볼 능력이 그들에게 없다고 말한다."
 
" ‘고도는 누구인가’, ‘고도는 왜 오지 않는가’, ‘언제까지 고도를 기다려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이제 그만두자.
대신 고도가 왔을 때 ‘우리에게 고도를 알아 볼 능력이 있는가’, ‘우리에게 진짜와 가짜 고도를 구별할 능력이 있는가’라고 고쳐 묻자. 그럴 때, 이 연극의 진정하지만 숨겨진 절망이 나타난다.
 
인간의 근원적 절망은 고도가 오지 않는 따위에 있지 않고, 고도가 우리 앞에 나타나더라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무능력에 있다. 인간은 이미 항상 와 있는 메시아에게 ‘언제 와’라고 묻는 어리석은 아이면서, 지금 이 순간도 무수한 메시아를 죽이고 있는 모순된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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