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멋진 유행가 365 by 임진모
[ 밑줄/연결 ]
(봄날은 간다(1953년), 백설희)
음악 전문가와 대중 모두가 손꼽는 가요사의 명작 중의 명작
멜로디도 빼어났지만 노랫만도 이전, 이후의 곡들과 비교해 클래스가 달랐다.
가사 한마디 한마디가 언어 예술의 극치를 선사한다.
(처녀 뱃사공(1959년), 황정자)
윤부길작가가..
천재 무대인으로.....언론은 그를 '원맨쇼의 선구자', '한국 최초의 개그맨'으로 받들었다.
1947년 그가 기획한 화려한 형식의 첨단 뮤지컬 <부길부길쇼>는 원맨쇼의 극치이자 유랑극단 역사의 전설로 남아 있다...
윤항기, 윤복희 남매의 부친
(노란 셔츠의 사나이(1961년), 한명숙)
한국의 대중가요 역사에서 쇼핑한 순간 1순위에 꼽히기에 충분한 노래..
우선 기성가요와 완연히 다른 서양식이었고 무지 빨랐다.
정말 중요한 것은 가수도 그것도 여가수가 '몸을 흔들며' 노래했다는 사실이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에 의해 민주당 정권이 와해된 살벌했던 시기였다....
(님(창살 없는 감옥)(1962년), 박재란)
박재란은 모든 것을 갖춘 1960년대 최고 인기 가수였다.
'꾀꼬리 가수'라는 별명처럼 빼어난 목소리와 가창력을 바탕으로 가요의 스펙트럼을 대폭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그 시대 가요 장르가 늘어난 것은 그의 공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폴카, 트위스트, 탱고, 차차차 등 주로 서구적인 풍의 노래를 불렀고 정서적 대척점이라 할 <맹꽁이 타령>과 같은 신민요도 불렀다.
무대에서 최초로 미니스커트와 유리 구두를 선보인, 이른바 패션니스트....
음악성, 다양성, 비주얼, 열정 등 모든 가수의 조건에서 그와 함께 나열되었다.
(동백아가씨(1964년), 이미자)
음악계는 음반 시장이란 말을 제대로 만들어준 <동백아가씨>를 국내 음반산업의 시작을 알린 기념비작으로 규정한다.
같은 해 1964년 비틀즈가 미국에서 상륙해 서구 음반산업의 폭발을 이끌었다면 한국에선 이미자가 레코드 시장을 이끈 셈이다.
(밀집 모자 목장 아가씨(1964년), 박재란)
비록 현실은 고구마말랭이고 쌀엿일지 몰라도 노래론 초코렛, 아이스콘을 찾은 것이었다.
히트곡이 다발이었던 최고 가수 박재란의 히트 리스트 중에서도 1순위였다.
(별이 빛나는 밤에(1969년), 윤향기)
1950년대 중반 이후 60년 이상의 세월을 풍미한 록 음악은 기본적으로 젊음의 음악이다.
1960년대 록을 대중화한 영국의 비틀즈가 말해주듯 록은 또한 기타, 드럼, 베이스 등 각 악기의 연주, 작자, 작곡 모두 멤버들 스스로 해내면서 청춘의 자주를 실현한다. 우리도 초기 록 밴드 애드포부터 리더 신중현이 모든 곡을 창작했다.
(달타령(1972년), 김부자)
20세기 한국 대중음악의 중추는 굳이 분류하자면 트로트(이미자), 미국 음악(최희준), 포크송(김민기), 로큰롤(신중현), 이 네 장르의 음악이었다.
(미인(1974년), 신중현과 엽전들)
<미인>의 드높은 대중 예술성은 여러 설문조사에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함께 늘 최고 수위를 다투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1974년 동양방송의 한 라이브 프로에서 연주한 순간 즉시 삼천만의 가요로 떠오르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하지만 신중현이 유신 찬양곡 만들기를 거부하면서 정권의 분 밖에 난 후 <미인>은 사회 비판적 기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향락과 퇴폐라는 이유로 금지처분을 당하고 말았다. 1987년까지는 아예 방송에서, 길거리에서 노래를 들을 수 없었다.
(행복의 나라(1974년), 한대수)
한대수 또한 자작곡 풍토를 열었다. 그것도 쇼크였다.
이제는 외국 노래를 번안하거나 전문 작곡가가 준 노래를 부르는 수동성과 작별하고 자기가 곡을 쓰고 자기가 노래하자는 능동의 흐름이 청년 음악가들 사이에서 생겨났고 여기에 그가 불을 당겼다.
(돌아와여 부산항에(1975년), 조용필)
1968년 미8군에서 기타리스트로 밴드 활동을 7년 가까이 했지만 그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건국 이후 최고 대중가요 설문조사를 하게 되면 이난영의 <목표의 눈물>,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신중현의 <미인>,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와 더불어 어김없이 수위를 다투는 역사적인 곡이기도 하다.
(한동안 뜸했었지(1978년), 사랑과 평화)
음악 관계자들은 각 악기들, 기타, 베이스, 드럼, 건반 연주에서 누가 최고냐를 논할 때 예외 없이 사랑과 평화를 거쳐간 구성원들을 뽑곤 했다. 기타 최이철, 건반 김명곤, 드럼 김태홍, 베이스 이남이가 대표적인 멤버들이다. 이 밴드와 함께 한국 록 연주력이 일취월장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꽃밭에서(1978년), 정훈희)
그는 출전했던 국제 가요제에서 단 한 번도 빈손으로 돌아온 적이 없었다.
1978년에 다시 참가한 칠레 가요제에서도 최고 가수상을 수상했다. 이 대회 출전곡이 바로 정훈희 스스로도 수작으로 꼽는 <꽃밭에서>였다.
(열애(1979년), 윤시내)
(어미나와 고등어(1983년), 산울림)
(바위섬(1984년), 김원중)
실상 바위섬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고립된 섬과 같았던 5.18 당시의 광주를 가리켰다.
(님 떠난 후(1986년), 장덕)
그때까지 우리 음악계의 여가수 가운데 직접 곡을 쓴 인물은 없었다.
(사랑하기 때문에(1987년), 유재하)
(타타타(1991년), 김국환)
넘치는 기지와 해학으로 '양인자만이 쓸 수 있는 언어'라는 찬사를 받았고 더러 음악 관계자들은 '대중가요 노랫만의 끝판 왕'이라고 했다.
(거짓말(2007년), 빅뱅)
[ 자평 ] 그냥 좋아하는 것들은, 평가 할 수 없다.
1947년 이인권선생의 <귀국선>부터 2017년 브레이브걸스의 <롤린>까지 가요 365곡에 대한 역사적 개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