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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 ]

 

율리시스처럼 두려움을 뛰어넘은 자는 자유로운 사유와 사랑을 하고, 지혜를 드러낼 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 마음을 열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서구사회가 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환경주의자들이 기후변화, 유전자변형식품, 셰일가스, 원자력 등의 잠재적 위험성을 들고 맹렬히 공격하는 통에 거꾸로 뒤집혀버린 메시지다.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 중 한 명인 조지프 슘페터가 주장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가 왜 우리 운명을 혁신을 위한 혁신이라는 끝없는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하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모든 형태의 유물, 문화재, 전통과의 끊임없는 단절이라는 논리에 

자연스레 우리를 가두는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현대 경제에는 두 가지 성장 구조가 존재한다.

케인스식 경제성장은 소비자의 숫자가 늘고 그들의 주머니가 최대한 두둑해질 때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보며,

슘페터식 경제성장은 과거의 모든 유물, 즉 이전의 생산품, 생활 방식, 산업 구조 등을 점차 구식으로 치부하게 하는 

혁신을 진정한 성장 동력으로 여긴다.

 

케인지의 이론....유명한 '소비를 통한 경제회복론'만큼은 인정하고 있다.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는 읽고 또 읽어야 할 가치가 있는 실로 합당하고 적절한 이론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경제성장을 가능케 하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 생산 체계의 모든 핵심 분야에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데에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먼저 혁신은 피고용자의 불안정성과 유연성을 끊임없이 만들어내, 

경영자들로 하여금 전 세계적 차원의 경쟁에 적응하기 위해 계속해서 전략에 매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장의 바탕이 되는 기술적 혁신은 생활 방식과 사회 관습들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뿐 아니라,

초기에는 어쩔 수 없이 실업과 불평들을 야기하고, 나아가 역설적이게도 성장이 아닌 퇴보를 불러오는 것이다.

 

당연히 사회 구조의 해체도 혁신의 폭에 비례한다.

영어로 general purpose technologies(범용 기술)라고 부르는 기술이 나타날 때 사회 해체의 정도는 최고조에 이른다.

범용 기술이란 본래의 분야를 넘어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기술을 가리킨다.

증기, 전기, 정보처리, 나노 기술 등이 대표적인 예다.

 

사회는 두 가지 태도를 보였다.

하나는 '퇴보'를 주장하는 이론가들의 태도로,

더 보편적으로는 과거의 구조들, 즉 역사의 흐름에 따라 사라질 '기득권'을 고수하고자 하는 이들의 입장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적응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향유한다면 

더 나은,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긴 삶을 누닐 수 있을만큼 새로운 논리에 적응하자는 입장이다.

 

결국 이것이 우리가 겪고 있는 게 단순한 일시적 '위기'가 아닌,

영구적 혁신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익명적, 기계적, 자동적, 맹목적인, 혁신을 위한 혁신의 논리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전진하고 있을 뿐이다.

 

전방위적 혁신이란 많은 의미를 지닌 전망이나 웅대한 문명 계획이 아닌 

하나의 과제이자 절대적 필요, 중대한 명령이 되었다. 

다윈 진화론의 자연선택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혁신하지 않는 기업은 사라지거나 다른 기업에 먹히는 운명에 놓였다.

 

오늘날 세계사의 특징은

우리가 어떤 세계를 왜 만들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전혀 단편적이지 않은,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이유로 인해 세상의 흐름은 그 의미를 잃었다.

 

현대 자본주의는 역사적 의미가 사라지고 구조적으로 예측하거나 들여다 볼 수 없다는 특징 외에...

세계화 속에서 국가 정책이라는 수단은 사실상 아무런 효용이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한 나라의 경제성장이 재무부 장관의 손에 달여 있다고 여기는 것은 우습기만 한 생각이다.

그 본질적인 이유로, 국가 정책은 국가- 민족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데 비해 시장은 세계화되었고, 

결국 기존의 정책적 수단 대부분이 헛되이 굴러가게 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국가가 무능해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시기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정책은 정부의 수단을 점점 더 무효화시키는 세계화와, 또 다른 혁신을 위한 혁신인 시청률의 논리

(이를테면 '특종주의')에 매여 있는 광적인 미디어화 사이에 놓인 채 점차 바닥으로 곤두박칠치기 시작했다.

--> 이 책이 나온 2014년에는 그런 것 같다. 

코로나19가 휩쓸고 있는 2020년에는 그런 부분도 있고 국가의 힘이 강해지고 반세계화되는 흐름도 있다.

향후 이런 흐름은 일정 기간 지속될 거 같다.... 상황은 예측과는 조금 달라지고 있다.

 

세계화된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철학적인 부분에서도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분명하다. 바로 힘과 의미에 대한 질문이다....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매일같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세상의 흐름을 어떻게 다시 붙잡을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을 위해, 어떤 계획과 큰그림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하는가?

 

샤를 폐기(Charles Peguy)의 말처럼 매일 아침 전날의 조간신문이 '호메로스보다 더 낡은 것'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도 호메로스는 새롭다. 그리고 오늘자 신문만큼 낡은 것은 없을 것이다" 라는 어록을 남긴 바 있다.

 

공익을 위한 정책 시행보다 중요한 국가의 역할을 바로

사회가 스스로의 미래를 상상하고 자의식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기업 대표들이 오래전부터 품어온 단 하나의 목표는 바로

세상 아이들의 소비자, 가능하면 중독자, 즉 디지털에 중독된 소비자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것이 그의 직업이고, 국민의 소비가 늘어나지 않는다면 이 기업은 분명 파산에 이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소비와 중독이 완벽하게 닮아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유전자 구조와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우리 회장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고객의 정의가 마약중독자의 정의와 완전히 일치한다.

더 자주, 더 많이 구매하는 고객을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들을 더 빨리 이러한 고객으로 키워내기 위해서는 이들을 결핍의 논리로 던저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면 될까? 핵심은 두가지다.

첫째, 대규모 광고활동을 벌이는 것이다. 

둘째, 전통적 가치를 최대한 철저하게 파괴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유는 간단하다.

내면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을수록, 도덕뿐만 아니라 문화적/정신적으로 안정적이고 튼튼한 가치체계를 확립하고 있을수록, 끊임없이 소비해야 할 것만 같은 일종의 필요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전통적 가치들을 잃을수록 중독에 쉽게 빠지며, 결국은 저항조차 없이 소비 논리에 몸을 맡기게 되는 것이다.

--> 1000% 맞는 말이고 무서운 말이다. 

나처럼 평생을 비즈니스 조직에 근무하거나 이런 조직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컨설턴트, 증권사/은행, 경영학 교수 등 등)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무의식적으로 중독자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심지어 요즈음 과학이 소비를 부축이는데 기여하는 분야가 생기고 있다.

 

프랑스어로는 "버터와, 버터를 살 돈과, 버터 파는 사람의 미소를 전부 가질 수는 없다."

 

어쨋든 예의 바르고 교양 있는 잘 자란 아이들과, 그가 끝없이 만들어 내고 싶어하는 산만하고 소비를 하는 아이들을 

모두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들이 같은 뇌 속에 공존할 수는 없다.

 

부르조아는 이제 전통을 끊임없이 파괴하려는 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의 파괴를 유감스러워한다. 그의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주동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때로는 치명적인 몰락으로, 때로는 성공의 약속으로 나타나는 

이 상황의 내막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이것이 무서운 점이다. 또한

이것이 이런 철학자들이 있어야 하고, 우리가 이들을 가끔씩은 쳐더 봐야 하는 이유이다.

중독자들은 스스로 중독자인지 인지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시대는 존엄한 것의 사라짐도, 가치의 종말도 아닌,

인류의 새로운 모습이 구현되는 과정일 뿐이다. 

나는 이것을 인간의 신성화, 또는 인류 스스로가 지닌 '내재성 안의 초월성'을 바탕으로 하는 '제2의 인본주의'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가 신성하게 여기게 되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을 통해  진정한 예술이란

아름다운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대상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그림으로 그려진 주제가 아닌, 그 주제를 다루고 있는 방식이야말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 연결 ]

 

저자는 뤼크 페리 (Luc Ferry)라는 프랑스의 교육부장관이었으며 철학자다.

원래 이런 책을 쓴 분이다. 

 

같은 주제를 두드리더라도 유럽은 좀 더 넓고 깊게 두드린다.

미국은 좀 더 얇게 좁게 두드린다. 

 

유럽을 무시하기 어려운 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정신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도 끊임없이 두드리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돈을 중심으로 한 주제를.....

유럽이 대북을 친다면 미국은 소북을 두드린다. 

 

세월이 지나고 나아가 들수록 같은 주제라도 유럽에서 두드리는 사람을 찾게 된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현상을 보고도....

 

시류를 타고 가볍게 두드리는 분도 있다. 

현실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호흡이 짧고 경박하다.

시류 밑바닥의 흐름을 무겁게 두드리는 분도 있다.

이런 책들에 사회적 고민이 함께 해야 한다. 깊게 넓게 오랫동안 힘이 실려야 한다. 

그러나 이런 책들을 별로 없다. 쓰기 힘들고 써도 안 팔린다. 

 

독자가 선택할 부분이다. 

 

[ 자평 ] 읽어 볼 만 하다. 

 

다루는 주제는 클레이튼 크리스텐슨교수의 파괴적 이론으로 알고 샀다. 

하지만 경영학 이론으로서의 파과적 혁신이 아닌 경제학 이론으로서 슘페터의 '혁신'으로 보는 것이 맞다. 

 

다루는 방향은 '파괴적 혁신은 우리로부터 무엇을 앗아갔는가'라는 것.....

 

100페이지 정도 밖에 안되는 책이라 많은 것을 기대할 수 는 없다.

 

유사한 주제지만 베르나르 스티글러 (Bernard Stiegler)의 저서가 좀 더 깊이가 있는 듯 하다.

 

생각이 깊이 차이가 아니라, 좀 더 초점이 좁기 때문이기도 하고, 양이 많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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