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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언제나 불안한 시대)

 

"삶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삶은 가치 있는 것이 된다."  - 알베르 카뮈

 

아무리 물리적 외부 기술을 연마하고 강화하더라도, 아무리 새로운 인류의 또 새로운 인류가 되더라도 우리는 내부의 오래된 두려움과 불확실함과 불안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불안은 우리 인간의 유한성과 필멸성 그리고 인식적 한계에 대한 근본적인 반응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불안은 인간이라는 양태의 구성 요소이자 존재를 인식하는 우리 의식의 필요적인 반응이다.

 

"우리는 항상 불안할 것이다.그러나 불안해하는 것에 대해 불안할 필요는 없다."

 

철학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철학은 우리 삶의 불확실한 윤곽과 궤적을 인식하도록 돕는 방식으로 우리의 감정을 치유한다. 

---> 글쎄. 모르겠다. 그런 철학자가 있었다면 누구였었는지 좀 알려 줬으며 좋겠다. 

"옳음을 인식하는 이성과 옳음을 실천하는 자아 사이에는 언제나 거리가 있다. 그 거리만큼이 거짓말의 영역일 것이다. 항상 스스로를 검열하고 진실을 추구할 것 같은 철학자도 예외는 아니다. 되려 앞서가는 이성과 발 묶인 현실 사이의 괴리는 더 심할지도 모른다."

 

나는 거울 속 나 자신을 온전히 인식하고 받아드림으로써 치유됐다.

 

(항상 불안한 존재)

 

실존주의 철학은 삶의 부조리와 무의미를 강조하지만, 이는 삶이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세상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어떻게든 거기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몸부림치면 자기모순에 빠지고 불안을 초래하게 된다. 그것이 '실존적 위기'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진실이다. 

우리 실존의 '진정성'을 찾지 못한 채 우리 자신이 발견하거나 실현할 수 없는 것들을 갈구하는 순간 불안이 찾아온다.

 

 

(무아의 불안)

 

불교 철학의 '두카(dukkha)'라는 개념이다. 흔히 '괴로움'이나 '고통'으로 번역되지만, 본래 뜻은 '불만족' 또는 '불충분'에 가깝다.

 

우리는 그냥 무아로서 여기에 있고, 이렇게 무아로서 여기에 있다가, 무아로서 돌아가고, 다시 무아로서 돌아온다.

이것이 '윤회(samsara)'다.

 

 

(불안할 자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 존재와 그 의식이 '신성한 실체'로부터 부여받은 게 아닌 스스로 본질을 구성해나간다고 보기 때문에 '무신론적' 휴머니즘이다.

 

살면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할 특정 장소와 시간에 그저 '던져진' 존재임을 깨닫는다. 인간은 그렇게 세상에 던져진 뒤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실존주의 철학을 사회적.경제적 계급, 젠더, 인종과 상관없이 모든 인류 개인의 선택에만 집중하고 공동체의 도덕은 도외시하는 부르주아적 자유주의 사상이라고 치부했다.

 

실존주의가 사회라는 유기체보다 개인의 선택과 자유에 과도한 비중을 두는 것도 사실이지만, 반대로 그 사회 구조와 제도와 관습이 우리 개인의 불안을 생성하고 유지하는 원흉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 것도 실존주의다.

 

니체는 우리에게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고 외쳤고, 운명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삶, 자신의 불안을 자신의 일부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힘에의 의지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의 가치를 높여 그 높아진 가치로 자신의 삶의 열어나가려는 의지를 말한다.

 

붓다와 마찬가지로 니체도 우리가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세상과 타인의 강력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무리'속에서 울부짇는 유순한 양이다. 무리의 요구와 명령을 기어이 깨부술 독립적이고, 도전적이고, 자주적인 '고귀한 영혼'은 언제나 소수다.

----> 2024년 12월에도 이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없이 매일 TV에서 증명해 주고 있다. 

 

여전히 '위버맨쉬'도 아닌 '원숭이' 같은 소수가 세상을 쥐락펴락하고, 더 평범해진 대중은 거기에 순응하면서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이 원숭이처럼 남들만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을 지배하려는 이데올로기에 맞서 우리 자신만의 의미와 가치를 응수해야 한다.

 

'비존재', '무'가 불안의 근원이다.

 

우리 주변의 누가 사려 깊고 친절하게 답해준다 한들 어차피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불안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혹시라도 그들에게 엄청난 자신감이 엿보인다면 그냥 허세에 불과한 것이다. 모두가 같거나 비슷한 실존의 질문을 던지면서 산다.

---> 항상 답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조심해야 한다.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신뢰하는 '나'의 문제다.

"제발 사는 법을 알려주겠다는 전문가를 만나면 도망치세요. 더 늦기 전에"

 

불안의 기분은 우리를 거대한 '존재의 공허' 앞에 세워 실존의 두 가지 핵심 측면, 즉 '죽음'과 '무'를 직시하게 한다.

'죽음'은 우리 존재의 확실한 결말을 나타내고, '무'는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없는 삶은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가치도 없음을 가리킨다.

 

우리 세상과 우리 존재의 기반은 모래 위에 세워졌다. 우리는 모두 우연히 피와 뼈와 살을 부여받아 재현된 세월 동안 세상에 세 들어 살다가 가는 존재들이다. 이게 전부다.

 

우리는 불안과 만나야 움직인다. 태곳적부터 그랬다.

불안해서 일했고, 불안해서 조심했고, 불안해서 용감했다. 우리는 불안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트라우마와 불안)

 

세상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없는 안정을 얼마만큼 무시할 수 있느냐가 불안을 진화하는 우리 자아에 통합할 열쇠가 된다.

 

혐오로 바뀐 불안이 계속 쌓여가는 시대다.

 

최후의 죽음이 아닌 최초의 출생, 분리, 단절이 불안의 근본적 원인이다.

 

프로이트의 '분리 불안'도 불안 이론 최종 단계에서 나온 개념인데....

 

 

(불안 사회)

 

"우리의 필요와 욕망은

광고와 언론이 만든 것이다. "  -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우리의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두려움은 경제적 궁핍이다. 

거기에서 우리 시대의 모든 재앙, 가난, 질병, 소외, 핍박 모두가 쏟아져나옴을 알기 때문이다.

 

마르쿠제가 보기에 불안은 현대 자본주의 세계와 계급 사회가 낳은 소외의 결과일 뿐이었다.

 

마르쿠제는 우리의 실존 탐구가 물질세계의 불편함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게 아닌 철저한 조사와 정치적 비판과 행동을 위한 자극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능력과 역량을 발휘해 사회를 바꿀 현실적 선택이었다.

 

진짜 필요한 것은 약을 먹는 게 아니라 사회 구조, 즉 사회의 가치와 관점을 바꾸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담론과 행동을 통해 입법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더 열심히 아무 생각 없이 일하면 일할수록 우리는 이 세계를 스스로 더 낯설게 만들고, 자신에게 자아를 몰아내 자기 자신을 "세계-내-집-없는-존재"로 전락시킨다.

 

'새로운 우상'을 믿고 의지하라고 명한다.

국가와 시장을 비롯한 잡스러운 이데올로기에 순종하고 충성하면 안정과 번영을 약속하겠노라 으스댄다.

 

 

(불안과 더불어 산다는 것)

 

"두려움은 희망 없이 있을 수 없고,

희망은 두려움 없이 있을 수 없다. "  - 바뤼흐 스피노자

 

바른 행동을 유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수용전념치료는 감정을 그대로 수용하고 가치 있는 행동에 전념하도록 이끈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 순간에 집중해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를 찾는다.

 

세상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보물인지 함정인지 상관 말고 초연하게 살 필요가 있다. 

 

중년의 위기는 

지금껏 살아온 삶과 살아오지 않은 삶, 살지 않은 삶 그리고 살아갈 삶을 향한 불안이다. 

 

우리는 언제까지고 목표나 종착점 없이 행위 본연의 가치에 집중하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아텔릭(atelic/미완의)'활동을 해야 한다.

--->  저자의 해법은 <수용전념치료>나  <Noe-Advaita> 철학과 비슷한 것 같다.

----> 수용전념치료나 2024년 아무 국내 첫 번역서로 나오는 것 같은데, 토니 파슨스(Tony Parsons)의 책을 좀 봐야 겠다.

"현재"와 "현존"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데, 미완의 활동으로 개선한다는 측면에서는 수용전념치료법과 유사한 듯 하다. 

 

오직 현재만이 우리의 행복임을 마음속에서 계속 되뇌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불안할 것이다. 불안하기에 우리는 존재할 용기를 낼 수 있다. 불안하기에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할 자격이 있다. 

 

 

[ 자평 ]

'불안'이라는 단어를 다양한 지성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만족한 책이었다.

하지만

결국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은 뽀족한 방법이 없구나'라는 결론이 더욱 불안해 지게 할 수도 있는 매우 불안한 측면도 있는 책이었다. 

 

'이토록 뭉클한 철학이라니...

붓다, 사르트르, 니체, 키르케고르, 틸리히, 하이데거, 프로이트, 마르쿠제, 마르크스의 불안한 나를 불안해하지 않는 법'이 책 겉표지에 있는 문구다.

 

글쎄 '뭉클한'이라는 형용사에는 공감이 잘 안 갔다.

또한 '불안해하지 않는 법'을 배웠는지도 몰라겠다. 그냥 원래 그렇구나, 운명이거나 인간으로 사는 동안 어쩔 수 없구나 정도로 체념(??)하게 되었다.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 ~ 1965년)란 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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