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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연결 ]

 

자기 계발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은 자기 집착과 완벽주의와 결합하면서 고된 일이 되어 버린다.....

자기 계발은 개인적, 문화적 질병이 되어 가고 있다. <뉴요커>에 실린 한 기사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죽도록 자기를 계발하는 중이다."

 

내면에 대한 탐구는 부당한 사회 질서로부터 관심을 돌리는 노예를 위한 철학과 다를 바 없다...

 

인문주의 맥락에서 근대란 개인주의와 개성 있는 개인으로서 자아라는 강박이 점점 더 강해진 시기다.

 

자기 계발 문화와 개인적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의 결합은 파괴적이다. 언젠가는 포기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설명한 대로 "성과 주체는 더 이상 유능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알고 발전시키려는 노력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다. 이 노력이 문제가 되는 것은 루소가 지적한 대로 자기 몰두와 개인주의적 경쟁이 결합할 때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요가나 명상과 같이 에고를 잠재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신 활동들이 역효과를 내서 되레 자기중심성을 강화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베이붐 이후 세대들은 자아와 자기 계발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했다.운동, 요가(히피의 유산 중 하나)는 물론 약물(예를 들면 리탈린)을 복용하거나 상담 치료도 다녔으며 온갖 종류의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여 새로운 능력을 기르고 자기 계발에 힘썼다.

 

1946년 출간한 강연집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의 제1원칙을 정의한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 용어로 설명하면, 인간에게 본질은 없고 그저 존재한다는 듯이다. 인간은 단순히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기투(Project)다. 

 

올리비아 골드힐의 말처럼 "샤르트르는 최초의 자기 계발 전문가였다."

 

현대 자본주의는 역설적이게도 자기 계발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촉진한다. 자기 계발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 건강화 자기 계발은 그야말로 잘나가는 상품이다.

 

우리의 불행을 먹고 살고 사람들의 관심을 사회 변혁이 아니라 개인의 자조와 자기 계발에 돌리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을 떠받치며 심지어 이런 시스템에 의해 조장된다.

 

니체의 언어를 빌리면 인간은 스스로를 길들이고 자본주의는 그것을 통해 돈을 번다.

 

우리는 스스로를 24시간 감시 체제에 몰아넣은 체 얌전히 자신에 관한 데이터를 생산하여 그것을 상품화하는 기업들에 업로드한다.

 

자기 계발 문화는 사람들이 사회 전체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개인적인 해결책에만 집착하도록 조장한다.

 

착취가 자기착취로 재규정되면서  자본주의 시스템은 여전히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는다.

 

집단 행동을 통해 사회를 변혁하거나 인문주의자들의 방식대로 천천히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은 너무 고된 일이라고 여긴다. 대신 기술적 편법의 형식을 취한 신속한 해결책에 크게 환영받는다. 자기 계발을 위한 기술이 병들고 불공정한 사회를 해결하기 위한 하이퍼루프인 셈이다. 

 

우리는 '내가 곧 나의 데이터'라는 느낌을 받는다. 스스로 데이터를 생산하고 처리하는 기계로 인식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자기 계발 사상은 인간 본성을 주어진 것으로 보고 그것을 고치고 다듬음으로써 소위 '조물'된 인간을 교육하고 개선하고자 한다.....

인간 개량이란 새로운 기술적 도구를 통해 인간의 육체와 정신 자체를 개선 또는 '개량'하는 것을 말한다.

 

루소가 경고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의견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행복을 온전히 자신의 내면에서만 찾는 것도 불가능하다. 행복은 타인에 달려 있기도 하고 운도 따라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는 계획되는 것이 아니며, 마치 미리 만들어져 있는 뻔한 공예품이나 제품인 것처럼 이야기할 수 없다. 

내가 누구인지는 오직 삶의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상호 작용하고 다양한 사건을 헤쳐 나가면서 드러난다.

바로 내가 되어 가는 것이다. 자아는 사물이 아니라 이야기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누구인지는 세상과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이며, 이것은 서사성에 의해 달성된다.

자아는 진화하는 이야기다.

 

케냐의 신학자 존 옴비티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나는 우리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며,우리가 있기에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바꿔 썼다.

 

우리는 더 이상 근대적인 개인이 아니라 탈근대적 분인으로 AI를 비롯한 디지털 기술에 의해 분석되고 통제된다.

 

진정 자아를 개선하고 싶다면 일단 타인이나 기술로부터 분리된 자아를 만들어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개인에 집중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바꾸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을 바꿀 수 없다.

 

카보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성공의 열쇠는 "될 대로 되라지. 이 절망적인 세상 외면하면 그만이야."가 아니라  "이 망가진 제도를 함께 바꿔 보는 게 어때?"가 되어야 한다.

 

자기 계발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도 집단행동과 사회 변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사회 변혁에 대해 고찰하는 자아의 철학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비민족주의적 사고여야 한다.

 

기술 개선을 위해 노력하되 이것이 서사, 의미, 가치 개선을 위한 노력도 의미한다는 것을 명심하며 문화 개선에도 힘써야 한다. 

 

건강 자본주의라는 함정에 빠지지 말고 빠른 향상을 약속하는 감언이설에 속지 말자. 

단순히 우리의 처지만 개선하는 게 아니라 아예 판을 바꾸어 보자. 자기 자신을 바꾸는 데 집착하지 말고 사회를 변혁하자. 

 

 

[ 자평 ] 생각해 볼 만한 질문, 그리고 방향성.....

 

"문제를 정확히 진단한 사람이 답까지 정확히 제시할 의무까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이 딱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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